027-J1. 인간과 괴물 사이
난 그가 쓰러지길 기다렸다. 그는 두 눈을 잃었고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누가 봐도 곧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다. 그가 인간이라면 말이다.
각성 여부를 떠나 인간이라면 절대 살아있을 수 없는 상태다. 하지만 놈은 머리와 배가 뚫리고서도 쓰러지지 않고 아직도 그대로 서 있었다.
갑자기 그의 몸에서 출혈이 멈췄다.
그 모습이 마치 괴물 같다.
각성자가 괴물이면
감염된 각성자?
문득 섬뜩한 기분이 들자 황급히 버스로 들어가 대시보드의 램프를 살폈다.
"어?"
노란색의 [Caution] 램프가 빠르게 점멸하고 있다. 근처에 다른 괴물은 보이지 않는다.
괴물 같은 인간인 줄 알았는데 정말 괴물인가?
겉으로 보기엔 정말 평범해 보이는 인간인데, 게다가 나와 방금 대화까지 했는데 괴물이라니
지난 며칠 동안 내 머릿속에 조금씩 정리되던 괴물에 대한 정보가 마구 엉키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그의 눈과 배에서 초록의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의 추측이 현실로 눈앞에 나타나고 있었다.
그 초록의 액체는 순식간에 놈의 온몸을 뒤덮었다.
성운이는 아까부터 동생의 눈을 가리며 안고 있었고 성희도 아이들 곁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밖을 바라보고 있다.
놈은 그렇게 인간형 괴물이 진화하는 것과 똑같이 온몸이 초록 젤리 형태로 변했다.
그럼 적어도 한 시간 정도 후에는 변이가 끝날 것이다. 인간형 괴물도 강했다. 그럼 각성한 인간형 괴물은 어떤 존재일까?
난 검을 들고 다시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초록 젤리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변이가 끝나기 전에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젤리같이 보이는 그 초록의 막 안으로는 검이 들어가지 않았다. 엄청나게 질긴 가죽이 단단히 막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난 버스에서 활을 들고나와 머리 쪽으로 화살을 날렸다.
퍽!
화살촉 부분만 겨우 꽂혔다.
인간형 괴물을 터트릴 때처럼 화살이 놈을 터트리길 기다렸다.
하지만 박힌 화살촉은 조금씩 밖으로 밀려나더니 이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젠장
그때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려 황급히 뒤돌아 활을 겨눴다.
"진우야! 나야"
태형이었다. 그의 손에는 라이터 기름통 여러 개와 성냥이 들려있었다. 아까부터 마트 안의 사람들은 이 광경을 지켜봤을 것이다.
난 그와 함께 초록 젤리의 온몸에 라이터 기름을 골고루 뿌렸다. 그리고 조금 거리를 벌린 후 동시에 불붙은 성냥을 던졌다.
화르륵!
불은 삽시간에 초록 젤리를 뒤덮었다. 그리고 활활 타올랐다. 뜨거운 열기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넌 빨리 들어가"
태형은 불에 타는 초록 젤리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마트 쪽문 쪽으로 뛰어갔다.
나도 버스로 돌아와 불에 타는 초록 젤리의 상태를 주시했다.
"괴물이었던 거야?"
성희의 말이다. 하지만 정확한 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엔 경고등이 들어오지 않았어."
그랬다. 마트 내부 그리고 정문 앞에 버스가 있을 때 분명 놈이 근처에 있었다. 내 옆으로 다가와서 말을 걸 때도 경고등은 들어오지 않았다.
난 다시 그 시점을 떠올렸다.
놈의 태도가 바뀌었을 때다. 그때 동시에 성운이가 노란불이라고 외쳤다. 그때 놈의 속에서 괴물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나?
아이들은 좀 전의 그 공포가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여전히 성희 옆에 붙어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직 위기가 끝난 게 아니다. 나도 식구들을 다독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라이터 기름으로 저놈을 제대로 불태울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지금은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혹여 놈이 괴물로 진화에 성공한다면 버스를 다시 공격할 것이다.
그러면 [Warning] 버튼으로 제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형 괴물이 버스에 닿았을 때 터트려 버렸던 방법이면 된다. 소요되는 코르카는 정도는 문제도 아니다.
끄아아아아아!
초록 젤리 속에서 인간의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괴물의 흉측한 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고통스러운 비명을 들으니 더 소름이 끼쳤다.
우리가 마치 인간을 태워 죽이고 있는 것 같다.
불에 타고 있는 초록 젤리 속에서 검은 형체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아아아악!
그리고 더더욱 심한 인간의 비명이 들려왔다.
성희가 아이들의 귀를 막았다. 나도 손으로 막았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비명이다. 하지만 손으로 막는 건 그다지 소용은 없었다.
불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 라이터 기름이 거의 타버린 모양이다. 초록 젤리의 색상과 형체는 변함이 없었다. 타버린 기름에 그을린 자국만 희미하게 보였다.
난 유심히 그 속을 관찰했다. 더 이상 비명은 들려오지 않았고 안에 있는 검은 형체도 움직임이 없이 멈춰있다.
'죽었나?'
우리는 숨죽이며 놈을 지켜봤다. 그때
꾸륵
놈이 꿈틀거렸다.
꾸르륵
놈의 움직임이 더 커졌다.
쩍!
질긴 초록 젤리를 뚫고 놈의 손이 튀어나왔다.
흉측한 손톱은 인간형 괴물과 비슷했다.
쫘아아악!
놈의 두 손에 초록 젤리는 순식간에 반으로 찢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놈의 모습이 드러났다.
인간형 괴물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피부는 마치 갑각류의 껍질처럼 단단해 보였고 손에 돋아있는 손톱은 회칼이 여러 개 달린 것 같았다.
발은 캥거루의 큰 발처럼 거대했고 역시 거대한 식칼 같은 발톱이 번뜩거렸다.
그런데 정말 공포스러운 건 놈의 얼굴이었다. 머리 전체는 단단한 투구를 쓴 것 같은 껍질이 덮고 있었지만 딱 얼굴 부분만 인간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까 마주한 선량해 보이는 청년의 얼굴이었다.
"헉!"
놈이 감았던 눈을 갑자기 치켜뜨자 흉측한 붉은 눈알이 나타났다. 아까 놈의 눈을 모두 못 쓰게 만들었는데 괴물로 변이하니 괴물의 눈알을 얻은 모양이다.
눈에 보이는 놈의 모습은 정말
끔찍한 괴물이었다.
"하아"
키는 인간과 비슷했으나 그동안 만났던 모든 괴물보다 단단하고 강해 보였다. 진화 이전에도 죽이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어떤 놈인지 상상조차 안 된다.
난 문을 재빨리 열고 놈에게 화살을 한 발 쐈다. 놈의 힘은 상대해봐야 알 수 있다.
화살은 쏜살같이 놈의 얼굴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 순간 놈이 사라졌다.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난 황급히 주변을 살폈으나 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또 지붕인가?'
하지만 지붕에서도 발소리나 진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그때 마트 쪽에서 물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렸다.
난 황급히 운전석으로 가서 버스를 마트 쪽으로 몰았다.
입구에 잡동사니로 막아놓았던 방벽 중앙이 완전히 뚫려 있다.
"제기랄"
놈은 가장 먼저 손쉬운 목표를 택했다. 마치 그곳에 사람이 숨어있는 걸 기억하고 있던 거처럼
"아아아악"
"저리 가!"
놈이 버스에 닿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안의 사람들이 전부 죽기 전에 놈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꽉 잡아!"
난 그렇게 소리치며 버스의 악셀을 밟았다. 버스는 입구에 널브러진 잡동사니를 밀고 밟으며 안쪽으로 움직였다.
와장창! 지이이익!
다시 마트 안으로 들어오니 놈의 뒷모습이 바로 보였다.
놈은 바닥에 넘어진 사람을 향해 날카로운 손톱을 사정없이 휘두르고 있었다.
바닥에는 이미 세 명이 쓰러져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벽 쪽이나 진열대 뒤에서 공포에 질린 얼굴로 정신이 반쯤 나간 채 주저앉아 있었다.
안쪽 사무실의 벽은 이미 부서져 숨을 공간이 되어주지 못했다.
난 버스의 창문을 조금만 열고 활을 겨누었다. 그리고 놈의 머리를 향해 온 정신을 집중해서 화살을 날렸다.
텅
그런 쇳소리가 났다.
놈의 뒤통수에 정통으로 날아간 화살은 마치 철판에 부딪힌 거처럼 힘없이 튕겨 나갔다.
난 놈이 버스로 오도록 창문을 통해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야! 애먼 사람들 잡지 말고 이리 와!"
그의 아래에는 이미 움직임이 멈춘 양복의 사내가 보였다. 점장이다. 그리고 그의 근처에는 마트 아주머니와 소주 아저씨가 쓰러져 있었다. 그들도 움직임이 없었다.
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여전히 선한 청년의 얼굴이다. 그 모습이 더 소름 끼쳤다.
슉!
놈은 순식간에 내가 조금 열어 놓은 창문 앞에 나타났다. 난 깜짝 놀라 창문을 닫으려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놈이 날카로운 손톱을 내 얼굴로 휘둘렀지만, 그 힘에 오히려 놈의 손톱 하나가 부러져 날아갔다.
괴물로 진화하고 각성자의 특권을 잃었다. 놈은 버스에 들어올 수 없다.
뀌이이이이
그리고 괴물의 괴성을 질렀다. 다행이다. 인간의 얼굴로 인간의 언어까지 사용했다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놈은 얼굴만 인간이고 나머지는 그저 괴물에 불과했다.
난 놈이 버스에 붙어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급히 운전석으로 돌아가 [Warning]으로 변한 붉은 램프를 사정없이 눌렀다.
어?
버튼은 누르기 바로 직전에 다시 [Caution] 램프로 바뀌었다. 고개를 돌리니 놈이 창가에 보이지 않았다.
이 새끼가 뭔가 눈치를 챈 건가? 이건 도저히 미리 알고 있을 수가 없는 건데?
그 사이 소주 아저씨 옆으로 다른 아주머니가 쓰러졌다. 그 모습은 너무 참혹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주변 사람들의 처절한 비명이 다시 들려왔다.
'아 시발! 고작 한 놈인데'
각성한 인간형 괴물이라고 해도 한 놈이다. 이렇게 계속 버스 안에서 숨어있기만 하면 저 사람들은 다 죽을 거다.
구석에서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날 바라보는 태형의 눈과도 마주쳤다.
이대로 두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다.
난 방패를 팔에 끼우고 오른손에 검을 들었다. 그리고 버스의 옆문을 열었다.
"억!"
그때 누군가 날 강하게 옆으로 밀쳤다.
무릎식신의 머리칼이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깨어났다. 무릎식신
난 그녀의 움직임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그녀가 놈보다 빨랐다. 이미 놈의 모든 움직임은 그녀에게 다 읽힌 것 같았다.
빡!
무서우면서도 마음이 놓이는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왔다.
빡! 빡!
난 그 소리에서 박자를 느꼈다.
빡! 빡! 빡!
이게 음악이 아니고 뭔가
빠직!
놈의 투구 같던 머리 껍질이 부서져 날아갔다. 그리고 흉측한 놈의 민머리가 드러났다. 붉은 근육이 머리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그의 얼굴도 틀어져 있었다. 선량해 보이던 청년의 얼굴은 찌그러져 마치 못난이 괴물처럼 흉측하게 변했다.
이제 정말 괴물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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