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J1. 이상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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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일직선으로 검은 눈을 향해 네 개의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달려왔다.
저놈이 나를 노리는 게 아니어서인지 시간은 느리게 흐르지 않았다.
나라가 옆으로 스치는 놈의 대가리를 잡으려 했다.
"아씨!"
그런데 나라의 손에 잡힌 건 놈의 머리 가죽 일부분이었다. 끈적한 액체가 그녀의 손에서 흘러내렸다.
그녀와 동시에 나도 검을 휘둘렀지만, 놈은 공중으로 점프하며 내 검을 피했다.
이건 내가 알던 못난이의 움직임이 아니다.
꿰에에!
그렇게 놈은 머리 가죽 일부가 뜯겨나가고도 검은 눈 바로 앞까지 순식간에 당도했다.
검은 눈은 조금 전에 못난이 때의 공격에 이미 많이 지친 상태였다.
반쯤 감긴 놈의 새까만 눈은 주변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듯 초점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었고 놈의 온몸에서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라와 성희가 붙여놓았던 상처 옆으로 새로운 상처가 수없이 나 있었다.
"본드가 효과가 있긴 했는데"
나라가 중얼거리며 못난이에게 달려들었다. 나도 검을 들어 올리고 놈을 향해 내달렸다.
그런데 그때 검은 눈이 갑작스럽게 경련을 일으키듯 크게 움직이더니 바로 앞에 있던 변이 못난이를 집어삼켰다.
"오!"
나라가 검은 눈 바로 앞에서 다급하게 멈췄다. 나도 못난이의 몸통을 노리던 검을 내려놨다.
우우우우우웅
검은 눈의 닫힌 입 속에서 탁한 초저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 입 거리네"
나라의 말이 들린 직후 갑자기 검은 눈의 몸에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나라가 화들짝 놀라 외쳤다.
"낌새가 이상한데"
나는 검은 눈 근처에 있던 나라의 팔을 잡고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묵직한 파동이 검은 눈의 입 속에서부터 번지고 있었다. 우리는 갑작스러운 이상한 느낌에 심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버스로!"
우리는 다급하게 버스 옆문으로 뛰어 들어갔다.
"버스 빼자!"
버스에 타자마자 성희에게 외쳤다. 그런데 그 순간
푸아아아악!
검은 눈이 머리부터 폭발했다.
"으아!"
우리는 버스 창밖에서 터져나가고 있는 참혹한 광경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시뻘건 피가 초록의 액체와 섞여 터널 안과 밖으로 마치 분수처럼 퍼져나갔다.
"자폭이네"
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지만 다들 아무런 말이 없었다.
버스 유리창에 피떡이 되어버린 살점과 검붉은 피가 범벅이 되어 달라붙어 있어 밖이 보이지 않았다.
창문에 붙어서 흘러내리는 찐득한 액체를 보고 있기가 힘들어 고개를 돌렸다.
"애써 치료해놨더니"
나라가 중얼거렸다. 성희는 조수석으로 옮겨 앉았고 난 운전석에 앉아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끼이익 끼이익
작은 살점 조각들이 창문에 많이 붙어있어 거슬리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와이퍼가 지나간 유리의 창밖 모습은 정말 참혹했다.
검은 눈이 있던 자리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살점 덩어리가 바닥 전체를 뒤덮고 있었고 사방으로 퍼졌던 핏물은 천장과 벽에서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아···."
난 악셀을 밟았다. 여기 계속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 새끼, 만나면 죽인다.'
지능 꺽다리, 다리 뜯긴 놈이 재생되어 살아왔던, 아니면 그놈과 같은 종이었든 어쨌든 놈들은 일반 꺽다리와 다른 능력이 있다.
방금 놈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우리는 놈들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
나는 검은 눈을 지켜내지 못했다.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 손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버스는 그렇게 터널 출구를 지나 고가도로를 달렸다.
스치는 바람에 창문에 붙어있던 살점 조각들이 조금씩 밖으로 흩날렸다. 하지만 피에 오염된 창문 너머는 여전히 잘 보이지 않았다.
와이퍼가 지나간 부분에 의지해 나는 버스를 몰았다.
액정의 탐지 숫자는 다시 0이다.
우리는 바로 이어진 다음 터널로 진입했다. 전조등과 사방 조명에도 피가 많이 묻어있는지 조명의 밝기가 너무 어두웠다.
버스 안에서는 아직 그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세차 좀 해야겠는데"
무거운 분위기가 어색해 내뱉은 것 같지만 사실은 본심이다. 버스가 너무 엉망이다.
검은 눈의 죽음이 안타깝긴 하지만 거기에 또 감정을 소모할 수 없었다.
우리는 실패한 게 아니다. 그저 검은 눈이 자신을 스스로 지키지 못했을 뿐이다.
할 만큼 했다.
시발
나도 내 마음을 사실 잘 모르겠다.
막 들어온 이 터널에는 아무도 없었다. 도로도 깨끗했다. 마치 그날 이후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터널을 별일 없이 빠져나오니 교량 구간 너머 또 터널의 입구가 멀리 보였다.
그때 도로 위에 있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동해 33km, 삼척 27km>
표지판 너머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모이고 있었다.
'또 비가 오려나?'
그 홍수 난리가 지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또 먹구름이 몰려온다.
난 액정을 다시 살폈다. 코르카 3,005개가 그대로다. 그리고 [진화] 버튼이 은은하게 깜박이고 있다.
"진화네"
조수석에 앉아있던 성희가 나지막이 말했다.
난 고개만 끄덕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다시 터널을 지나고 조금 달리니 새 국도의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도로에 베리어가 처져 있고 표지판에도 우회전 표시가 되어 있었다. 난 핸들을 돌렸다.
편도 1차선 도로로 접어들자 우측에는 아직도 물이 완전히 빠지지 않은 논과 마을이 보였다. 도로의 흙탕물은 대부분 빠져있었지만, 지대가 조금 낮은 마을은 흙탕물이 남아있었다.
"마차리?"
성희가 마을 표지판을 읽었다.
"마차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을 거 같은데"
나는 버스의 속도를 늦추고 우측 마을 방향으로 들어섰다.
"왜?"
뒤에서 나라가 물었다.
"정리 좀 하고 가자"
마을 안쪽 도로로 들어서자 버스 바퀴가 반 정도 물에 잠겼다. 충분히 지나갈 수 있는 깊이다.
난 버스를 천천히 움직였다. 흙탕물이 버스 바퀴 사이에 끼어있는 안타까운 피의 잔해를 씻어주길 바라면서
난 바로 눈에 보이는 마을회관 주차장으로 들어가 버스를 세웠다.
"진화에 관해 설명했던가?"
나라와 할아버지가 대답이 없다. 예전에 버스에 대해 대략 설명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들도 그게 뭔지 이해할 수는 없었을 거다.
"다들 편안하게 앉아요, 눈이 좀 부실 겁니다."
"콜록, 난 누웠어."
옆자리의 성희와 테이블 자리에 있는 나라를 확인한 후 나는 다시 액정으로 시선을 옮겼다.
[진화]
난 바로 버튼을 눌렀다. 심호흡 따위는 하지 않았다. 머뭇거릴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익숙해지기 힘든 강렬한 눈 시림을 느끼며 아득한 심연으로 빠져들어 갔다.
* * * * *
번쩍!
아 벌써 진화가 끝난 건가?
난 눈을 떴다.
'어?'
이상한 숲이다. 언젠가 본 것 같은 나무와 식물들이 무성하다.
'여긴 대체 어디?'
내가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식물이다. 난 손을 뻗어 바람에 흔들리는 두꺼운 나뭇잎을 잡았다.
탁!
나뭇가지에 붙어있던 초록의 나뭇잎을 뜯어냈다. 그런데 감촉이 이상했다. 말랑말랑한 게 무슨 실리콘 같은 느낌이다.
바스락
수풀 속에서 의문의 소리가 들려와 나뭇잎을 급히 주머니에 넣고 등의 검을 찾았다.
내 등에는 검집도 활도 없었다.
그때 수풀 사이로 붉은 눈 두 개가 보였다.
'젠장'
나는 뒤돌아 뛰려고 했다. 그런데 다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다리가 얼어붙은 느낌이다.
수풀을 해치고 붉은 눈의 정체가 눈앞에 서서히 나타났다.
꺽다리다.
놈의 손···. 아니 앞발은 뭉툭했다. 그런데 뭉툭한 앞발이 나뭇가지 같은 걸 쥐고 있었다. 부러진 창 같아 보였다.
점점 다가오는 놈의 모습은 이전에 봤던 그놈과는 달라 보였다. 머리가 더 컸고 이마에 작은 뿔 같은 게 수십 개 달려있었다.
놈은 마침내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아 시발 진짜!'
난 주먹을 꽉 틀어쥐고 놈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그런데 내 주먹은 놈에게 닿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그때 나의 상반신이 앞으로 조금 쏠리며 놈의 뭉툭한 앞발이 눈앞에 바로 보였다.
놈이 쥐고 있던 부러진 창에는 익숙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Z
희성이가 만든 창이다.
번쩍!
다시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 * * * *
"끄아아아"
뒤쪽에서 들려온 나라의 비명에 눈을 떴다.
'꿈인가?'
옆의 성희도 그 바람에 깼는지 눈을 가늘게 뜨며 꿈틀거렸다.
"쿨럭"
기침 소리를 들으니 할아버지도 정신을 차린 것 같다.
'방금 뭐였을까?'
그동안 몇 번의 진화를 겪었지만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했다. 바람이 느껴졌고 코앞까지 다가왔던 꺽다리의 역겨운 그 냄새도 너무나 생생했다.
"괜찮아?"
멍한 눈빛으로 조금 전의 기억에 빠져있는 날 발견한 성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난 허공에 머물던 시선을 옮기며 정신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아···. 꿈을 꾼 거 같아서, 너는 꿈 안 꿨어?"
그녀는 잠시 말없이 날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도?"
성희도 비슷한 꿈을 꾼 걸까?
"넌 무슨 꿈이야? 난 꺽다리가···."
내가 꾼 꿈을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묵묵히 내 말을 듣고 있더니 입을 열었다.
"난 할아버지···."
"뭐?"
그때 뒤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콜록, 꿈에 내가 나왔어?"
"그게 아니고요."
그때 나는 순간 등에서 차가운 냉기가 흐르는 걸 느꼈다. 그녀의 표정에서 무슨 말을 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뵌 지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거리긴 하지만 너희 할아버지 같았어."
난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하지 못하고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할아버지라니
몇십 년 동안, 이 버스를 캠핑카로 개조하고 수리하던 버스의 주인 할아버지다. 그런데 정작 할아버지는 어떤 단서도 없이 버스만 남기고 사라지셨다.
그 덕분에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이런 버스를 만드실 정도의 할아버지라면 아마도 어딘가에 안전하게 잘 계실 거라 막연하게 생각했다.
걱정하고 안타까워한다고 내가 뭘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할아버지의 버스가 헛되지 않게 내가 잘 살아남으면 언젠가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할아버지가···."
그녀는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다그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디 갇혀계셨던 거 같아···. 동굴 같은 느낌이었는데···. 꼭 감옥 같기도 하고"
"감옥?"
"그리고 의식이 없어 보였어···."
이건 정말 꿈이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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