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다른 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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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나와 성희가 동시에 말했다. 그리고 시커먼 다리가 버스에 닿았다.
꽈직!
그런데 기대하던 소리가 아니다. 접촉 파괴가 동작은 한 것 같다. 닿았던 부분부터 가루가 되어 부서지는 게 바로 눈앞에서 보였으니
"성분이 다른가?"
초록의 액체를 뿌리며 터져나가던 모습을 생각했는데 마치 바스러지듯 가루가 돼버렸다. 그러고 보면 거미 괴물의 다리는 예전에도 좀 달랐던 거 같다. 마치 아주 단단한 플라스틱 같은 느낌이랄까
버스에 닿은 부분부터 대가리 근처까지 놈의 다리 하나가 시커먼 가루가 되어 수면으로 떨어졌다.
놈은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다리 하나가 사라지자, 당황했는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의 움직임에 물결이 크게 일어 버스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나마 버스 자체에 [수평] 기능이 있어 최대한 버스가 버티고 있긴 했지만, 거친 물살을 완전히 다 걸러낼 수는 없었다.
거대한 다리가 버스 근처로 빠르게 움직이다 또 하나가 버스에 닿았다.
빠사사사삭! 뀌이이이이이
놈은 추가로 다리 하나가 또 먼지처럼 사라지자, 고통스러운 괴성을 질러댔다.
그리고 바로 몸의 중심을 잃어 비틀거리더니 거대한 대가리가 수면으로 떨어졌다.
주변을 모두 집어삼킬 듯한 엄청난 물보라가 일었고 놈의 대가리는 수면 아래로 조금 잠겼다가 다시 떠올랐다.
거센 물살에 버스가 마치 뒤집힐 듯 심하게 요동쳤다. 성희는 안전띠를 했고 난 테이블을 부여잡고 버스 뒤로 가 침대에 누워있는 태형을 고정 벨트로 단단히 조였다.
테이블을 부여잡고 다시 운전석으로 간신히 움직이던 와중에 갑자기 버스가 좌측으로 심하게 기울었다. 그 바람에 난 거실 자리에 앉아있던 성희 위로 넘어졌다.
"윽!"
내가 창문까지 미끄러져 가자, 안전띠에 고정되어 있던 성희가 날 끌어안았다.
"괜찮아?"
성희가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간신히 다시 일어나 운전석으로 안간힘을 쓰며 이동했다. 어떻게든 운전석에서 대처해야 한다.
겨우 운전석에 앉아 안전띠를 매고 창밖을 살폈다. 그때 버둥거리던 놈의 거대한 다리 하나가 다시 버스에 닿아 부서졌다.
"코르카는안 나오고, 다리만 계속 날아가"
성희가 뒤쪽에서 중얼거렸다.
"대가리가 터져야 할 거 같아"
난 수면에서 영문을 모르는 듯한 눈알 여러 개를 굴리고 있는 놈의 머리 방향으로 버스를 틀었다.
"간다!"
내가 악셀을 밟자, 버스 뒤쪽에서 묵직한 기계음이 들렸다. 보트 모드의 익숙한 소리다.
버스는 점점 속도를 올리며 놈을 향해 나아갔다. 그런데 그때
"뭐야!"
푸아아아악!
갑자기 놈의 대가리 옆에서 거대한 뭔가가 솟아올랐다. 난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물 위에서 움직이던 버스가 바로 멈추는 건 불가능했다.
물속에서 튀어나온 건 마치 악어같이 생긴 거대한 생명체였다.
난 액정을 살폈다.
"어?"
"왜?"
[ 1 < 0 < 0 ]
"탐지에는 저 촉수 거미만 잡혀!"
그러면 방금 물에서 튀어나온 저 기이한 생명체는 아직 우리에게 적의가 없거나 혹은 탐지가 안 되는 놈이다.
쿠아아아아아아!
큰 괴성과 함께 엄청난 양의 물이 놈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마치 폭우가 쏟아지는 것 같은 물이 버스에 튀어 잠시 앞이 보이지 않았다.
끼익 끼익
긴박한 상황에서도 버스는 태연하게 천천히 앞 유리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그저 구경이나 하라는 듯
그때 앞 유리 너머로 거대악어 괴물이 거미 대가리를 뜯어 먹기 시작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뀌이이익
촉수 거미의 고통스러운 괴성이 아주 잠시 들려오다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이내 십여 개의 붉은 눈이 탁해지기 시작했다.
"죽었군."
거대악어 같은 괴물은 정말 맛있게 촉수 거미 대가리를 남김없이 모두 뜯어 먹었다.
그 바람에 초록의 액체가 사방으로 퍼지며 맑고 투명했던 물은 마치 녹조라떼처럼 탁해졌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촉수 거미를 다 뜯어먹은 거대 악어는 수면을 천천히 헤엄치다 고개를 버스 쪽으로 돌렸다.
분명 버스는 아직 투명 상태인데도 뭔가 느껴지는 게 있는 듯 붉은 눈알을 굴리며 버스 방향을 살피기 시작했다.
"눈이 몇 개야?"
성희가 조수석으로 다가와 앉으며 물었다.
"네 개?"
"근데 모습은 악어랑 너무 닮았어."
"예전 이구아나 괴물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너무 크다."
그 순간 놈이 우리 쪽으로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난 액정의 탐지 숫자를 계속 보고 있었지만 숫자는 오르지 않았다.
"저놈이 막타를 치는 바람에 코르카는 날렸네!"
"계속 이리로 오는데?"
우리는 안전띠를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뒤쪽의 침대에 누워있는 태형이도 확인했다. 침대에 있는 안전띠도 단단히 조여져 있었다.
"접촉 파괴가 될까?"
추측하건대 안 될 거 같다. 아까 작은 생명체가 버스 유리창에 붙었지만 터지지 않았다. 탐지에 걸리지 않는 생명체는 접촉 파괴로도 터지지 않을 거다.
"어떻게 마치 우리 버스가 보이는 것처럼 이리로 오는 거지?"
그때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수면 상태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버스가 있는 부분만 괴물의 초록 피가 통과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놈에게는 분명 수상하게 보일 터였다.
"대놓고 버스 위치가 보이겠는걸?"
내가 버스 좌우 유리와 앞 유리 너머를 살피며 말하자 성희도 이제 알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움직이면 더 수상할 거 같아."
"그러게"
혹시 모를 충격에 나는 운전대를 단단히 부여잡았고 성희는 오른쪽 위에 있는 손잡이를 잡았다.
쿵!
그 순간 놈이 그대로 버스 앞 유리를 들이받았다. 다행히 놈은 우리를 보고 달려든 게 아니라 천천히 접근하다 부딪힌 거라 큰 충격은 아니었다.
"안 터져"
순간 놈의 시뻘건 네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사방을 살피는 게 바로 눈앞에서 보이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시뻘건 눈동자는 마치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능이 낮진 않아 보여'
그때 놈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으허"
마치 입 냄새가 앞 유리 너머 안까지 흘러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방금 뜯어먹은 거미 괴물의 살점이 수십 개의 커다란 이빨 사이사이에 끼어 있었다.
"으"
성희는 보다못해 눈을 감아버렸고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놈에게서 눈을 뗄 수는 없었다.
난 버스를 아주 천천히 후진했다. 저 이빨로 버스가 공격받으면 쉴드와 코르카는 빠르게 떨어질 거다. 아직 탐지 숫자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저놈이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다.
난 사이드미러로 뒤쪽을 확인하며 느리게 계속 후진했다. 거미 괴물 피가 번지지 않은 곳까지 이동하면 놈도 우리를 발견하기는 힘들 거다.
쿵! 쏴아아아
그런데 순간 버스 앞쪽이 갑자기 들렸다. 그 바람에 공중에 떠오른 버스 앞부분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으아!"
그리고 버스는 거의 직각으로 떠올랐다.
"젠장"
무슨 출발 직전의 우주선에 타 있는 기분이다. 그런데 우주선처럼 하늘로 향하는 게 아니라 버스는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마치 침몰하는 배처럼 그렇게
'아무리 보트 모드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침몰하는 것도 진짜 배처럼 침몰하나?'
방어막 [92/300] [1 Kc]
그때 액정에서 변화된 방어막 수치가 눈에 들어왔다. 좀 전의 충격 때문이다. 그리고 이내 버스 창밖으로 우리를 수중에서 들이받은 놈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다른 거대 악어다.
이놈도 촉수 거미의 피 때문에 우리를 발견한 모양이다.
아니면 탁해진 물에서 유일하게 맑아 보인 영역이라 수면으로 올라오다 본의 아니게 충돌한 거든가, 버스를 알고 들이받았을 리는 없으니
악셀을 밟거나 핸들을 돌려도 버스는 제대로 자세를 회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버스는 그대로 직각으로 완전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버스 안으로 물이 들어오지 않는 거 정도?
"어떡하지?"
성희의 떨리는 음성이 귓가에서 아득하게 흘러갔다. 물속으로 버스가 가라앉자, 이상하게 귀가 먹먹한 느낌이다.
"아직은 괜찮아 보여"
점점 물 아래로 내려가자, 창밖에서 초록 피가 조금씩 연해지더니 이내 피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맑은 물인데도 여전히 물의 깊이는 알 수 없을 정도로 물속 깊은 곳은 보이지 않았다.
"오!"
버스의 아래에서 묵직한 기계음이 들려오더니 조금씩 다시 수평으로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의자에 누워있는 것 같은 불편했던 자세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자, 운전대 바로 옆에서 못 보던 레버가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뭐지?"
위아래로만 움직일 수 있는 마치 비행기의 쓰로틀 레버같이 생겼다.
"이건 분명 예전엔 없던 거야, 진화 후에 생긴 거 같아. 왜 아까는 발견 못 했지?"
못한 걸까? 아니면 지금 상황에 어울리는 거라 이제서야 나타난 걸까? 그건 모를 일이다.
큐우우!
물의 장력에 막혀 탁하게 퍼지는 괴성이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거대 악어 두 마리가 물속에서 지르는 소리다.
"여전히 우리 위치를 아는 거 같은데?"
성희가 의문 가득한 눈초리로 창밖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창밖에서 조금씩 흩어지고 있는 거미 괴물의 초록 피가 눈에 들어왔다.
"냄새를 맡은 거야"
놈들은 버스에 묻어있던 촉수 거미의 피 냄새를 맡고서 아래로 내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초록 피는 아주 천천히 물속으로 번지고 있었지만, 완전히 버스에서 씻겨나간 건 아니었다.
"수면에 초록 피 천진데 왜 우리 버스에 묻은 걸로 따라오는 거지?"
나도 그게 궁금했지만 추측하자면 움직이는 피 냄새에 아직 살아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난 순간 본능적으로 레버를 내렸다. 그러자 버스에서 묵직한 진동음이 들리며 앞쪽이 아주 조금 기울어지더니 서서히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 버스는 더 깊은 물 속으로 향했다. 속도가 조금 오르자,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
성희가 뭐라 말하려고 하자 내가 입을 열었다.
"잠수함이다."
난 옆 창문 위쪽으로 피 냄새를 따라 내려오고 있는 거대 악어를 살폈다.
놈들은 한동안 따라 내려오다 더 깊은 물 속까지는 내려오기 힘들었는지 멈추고는 잠시 우리 버스 방향을 바라보는 듯 멈춰있다가 서서히 시야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 깊은 수심으로 진입한 버스의 주변은 점점 어두워졌다.
난 액정의 조명 버튼을 누르고 고개를 내려 창문 너머로 아래를 살폈다. 주변이 갑자기 밝아졌다.
"바닥인가?"
수많은 바위와 그 사이사이 자라난 해초들의 모습은 내가 상상하던 해저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난 레버를 다시 원래 있던 중간 위치로 옮겼다. 그러자 버스는 내려가던 움직임을 천천히 멈췄다. 수평 기능으로 다른 움직임은 크게 일지 않았다.
탐지 숫자는 0이다. 버스의 조명이 닿는 곳이 그리 멀지는 않아 많은 부분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우선 눈에 보이는 건 물살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해초뿐이었다.
"뭐가 움직여"
성희가 손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해초들 사이로 뭔가가 헤엄치고 있었다. 팔뚝보다 조금 작은 생명체다.
"딱히 위협적이진 않은 거 같은데"
그 물고기 같은 생명체들은 버스의 조명 따위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 듯 평화롭게 해초 사이를 넘나들고 있었다.
"근데 저건 뭐지?"
버스의 조명이 닿는 끝부분 어두컴컴한 모랫바닥에서 뭔가 부서진 잔해 같은 게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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