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중년 사내들
마치 왜곡된 시간조차 정지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놈의 입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하지만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저 괴물과 별반 다르지 않은 놈의 표정만이 나에게 읽혔을 뿐
'너 따위가 어떻게···.'
놈의 황당한 눈빛을 마지막으로 마침내 기대하던 소리가 들렸다.
콰직!
동굴 안에서 마치 번개가 치는 것처럼 푸른 빛이 번쩍거렸다. 그 폭풍 같은 엄청난 충격에 난 그대로 뒤로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어? 이쪽은?'
순간 바닥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젠장'
내 몸이 동굴 입구를 벗어났다. 난 다급하게 양팔을 휘둘러 잡을 것을 찾았다.
탁!
오른손에 날카롭게 튀어나온 바위의 끝부분이 잡혔다. 손에서 끈적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등 뒤에서 폭포수가 여전히 기이하게 허공에 멈춰있다.
주변이 멈춰버린 그 공간에서 나만 이질적으로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이 흔들거렸고 눈부신 파란 섬광은 여전히 동굴 안에서 번쩍거리고 있었다.
난 다시 동굴 입구로 올라가려 안간힘을 쓰며 팔을 당겼다. 그러자 피가 손가락 사이로 번져 나왔다.
"끄응"
내 머리가 잠시 위로 떠오른 그 순간 동굴 안의 모습이 짧게 눈에 들어왔다.
기이한 번개 불빛은 두 개의 비틀어진 시공간 사이를 넘나들며 마시울을 마구 난자하고 있었다.
난 팔에 온 힘을 집중해 상반신을 들어 올렸다. 동굴 입구로 올라가는 건 어려워 보였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습은 생생히 볼 수 있었다.
비틀어진 시공간에 갈가리 찢기고 있는 놈은 그곳을 벗어나기 힘들어 보였다.
"뀌아아아아악!"
그런 괴성 같은 비명이 들려왔다.
"너···. 이···새끼···."
파파파파팍!
그 순간 동굴이 엄청나게 흔들리더니 내가 간신히 잡고 있던 바위 모서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난 옆의 경사로로 뛰어내리려 그네처럼 몸을 흔들었다.
콰쾅!
하지만 끝내 엄청난 진동과 함께 동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그때 갑자기 시간의 흐름이 제자리를 찾은 듯 뒤에서 폭포수 흐르는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려왔다.
차가운 물줄기가 내 온몸에 튀기 시작했다. 그 물기는 바위 끄트머리를 간신히 잡고 있던 내 손에 묻었다. 피와 물이 범벅이 되었다.
"아씨"
마침내 손이 미끄러지며 난 절벽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문득 거대 촉수 거미에 잡혀 허공에서 떨어질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아이들이 날 구했는데
그런 때도 있었는데
폭포수가 내 온몸으로 쏟아졌다. 마치 경쟁하듯 나와 폭포수의 엄청난 물은 동시에 아래로 그렇게 한없이 떨어졌다.
부서진 바위의 파편이 폭포수보다 빠르게 날아와 내 온몸을 파고들었다. 그 상처 위로 무심한 폭포 물이 튀었다.
난 하늘을 향하던 고개를 돌려 저 아래 내가 떨어질 지점을 확인했다.
'젠장 또 바위!'
온몸으로 발버둥 쳐봤지만 소용없었다.
난, 마치 그곳으로 떨어져야 하는 운명인 것처럼 여전히 단단한 바위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하강하고 있었다.
이렇게 끝나버릴 줄 이미 알고 있었나?
그런데 오늘은 왜 미련이 없지?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다.
오래전에 허공에서 떨어질 때는 나의 무모한 행동에 미련이 남았었다.
지금은?
세상을 구하진 못했지만, 저 파란 머리···. 아니 흰 머리 새끼는 찢어버렸다.
더 알아내고 싶은 게 많았지만
모든 사실을 안다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리고 내가 진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벌써 바위가 내 눈앞 가까이 다가왔다.
마치 그때처럼
응?
끄윽
또 멈췄다. 주먹 하나만큼의 거리에서
난 그때처럼 피가 머리로 쏠려 시야가 순간 까매졌다. 하지만 정신을 잃지 않으려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그때 숲 언저리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난 팔을 뻗어 바닥을 짚었다. 그러자 날 허공에 잡아두던 그 힘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순간 난 거꾸로 된 자세에서 중심을 잃고 바위 옆으로 쓰러졌다.
"윽"
저벅저벅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난 황급히 일어나려 했으나 순간 현기증이 일어나 다시 주저앉았다.
투둑투둑! 쿵!
내 주변으로 부서진 동굴의 파편이 우수수 떨어졌다.
고개를 들자, 내 머리만 한 돌덩이 여러 개가 나를 향해 떨어지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젠장'
난 바로 옆으로 피하려 했으니 돌덩이 하나가 이미 내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난 황급히 검을 휘둘렀다.
쾅!
내 검에 맞은 돌덩이는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날렸다. 하지만 아직 두어 개가 남았다.
'어?'
그런데 나머지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돌가루 먼지가 흩어지자, 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머지 돌은 여전히 허공에 떠 있었다.
"휴, 겨우 찾았네!"
중년 사내의 음성이 들렸다. 눈이 침침해서 그의 모습이 흐릿한 윤곽으로만 보였다.
그가 손을 한번 휘저으니 허공에 있던 돌덩이들은 순식간에 강 쪽으로 가볍게 날아갔다.
풍덩!
난 강에 떨어지는 돌덩이를 확인하고 다시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
시야가 조금씩 돌아오는지 사내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년의 사내가 거지꼴을 하고 나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난 자세를 고쳐 앉으며 검을 겨누고 그를 바라봤다. 얼굴엔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있었고 긴 머리카락은 몇 년은 자르지 않은 듯 너저분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다.
"아저씨"
나이가 들면 목소리도 변한다. 하지만 원래의 음색은 남아있기 마련이다.
중년 사내의 목소리에서 여러 나이대의 누군가가 바로 떠올랐다.
청년 준수와 어린 성운이가 모두 그 안에 있었다.
"어···. 어찌?"
녀석은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늦을 뻔했어요."
가까이서 보니 아까 버스에서 날 죽이려 했던 준수··· 아니 성운이가 맞다. 눈가에 잔주름이 잔뜩 생겨있었지만 분명 녀석이다.
난 녀석이 버스 안에 있을 때 추방했다. 일전에 태형이도 그랬었다. 둘의 공통점은 추방 직후에 버스 근처에서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는 거다.
아주 다른 어떤 곳으로 갔을 거라 추측만 했다. 그런데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런 꼴로 나타나니 난 내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놀라셨죠?"
나이 든 얼굴과 다르게 말투는 여전히 어렸다.
"몇 시간도 안 되었는데···."
내 말을 그가 끊었다.
"20년쯤 지났어요."
"뭐?"
녀석에게 14년이 지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불과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오늘만 세월에 관한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듣는 건지
"대체 어디서···. 어떻게?"
내가 질문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뭘 물어야 할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웃겼어요. 정말"
"뭐가?"
"액정을 코로 누르시다니"
"..."
그 장면을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다. 이 중년의 사내는 성운이가 확실했다.
하지만 난 그의 가벼운 말에도 얼굴 근육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이 텅 빈 느낌이다. 이게 상실감이라는 건가
마시울이 말한 또 다른 어떤 곳, 성운이도 그 어딘가에 빠졌다가 다시 돌아온 듯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또한 알 거 같은 곳
그저 내가 궁금한 건 나도 거기에 갈 수 있을까 하는 거다.
이왕이면 버스를 가지고
그녀가 있는 그 세상으로 나도 가서
예전처럼 버스에서 같이 지내며 굳이 목숨을 걸며 무리하지 않고, 세상을 지키려고 발버둥 치지도 않고
우리만 딱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만큼 그렇게
"왜 놀라지 않으세요?"
중년의 성운이가 난데없이 갑자기 나타났는데도 나는 나의 상실감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더 놀라면 죽을 것 같아, 심장 터져서"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심이었다. 하지만 난 덤덤하게 그에게 물었다.
"나 죽이려고 하더니"
반말로 말하기에 이제 부담스러운 외모가 되었지만, 나에게는 아직 예전의 어렸던 성운이의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그는 아까 버스 안에서와 전혀 다른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런데 갑자기 그의 입이 멈췄다. 그리고 다시 주변 흐름의 강력한 변화가 느껴졌다.
난 검을 틀어쥐고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무심하게 흘러내리는 폭포수도
여전히 떨어지던 동굴의 부스러기도
바람에 날리던 나뭇잎도
모두 멈춰버렸다.
'끈질긴 새끼'
난 검을 등에 다시 꼽고 활을 꺼내 바로 화살을 걸었다. 그리고 화살촉에 다시 푸른 불꽃을 올렸다.
"나와라."
난 사방을 향해 소리쳤다. 그런데 그 순간
콰쾅!
엄청난 충격파가 내 부근에 쏟아졌다.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었지만, 나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억지로 안간힘을 쓰며 버티자, 눈에서 피가 쏟아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쏴아아아!
다시 멈춘 시간이 풀린 듯 폭포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문득 강 건너편에서 놈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하지만 내가 눈을 뜨고 버티는 건 성운이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무심하게 말했지만, 녀석을 다시 만나 반가웠다. 저 나이가 될 때까지의 세월을 같이 보내진 못했지만, 그리고 한때 어떤 오해와 분노와 안타까운 상황으로 녀석의 잘못된 판단이 있었다 한들
녀석은 나의 식구였다.
풍덩!
그때 누군가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강물 쪽을 확인하려 했지만, 나는 반대편 숲으로 튕겨 날아가고 있었다.
"윽!"
거대한 나무에 등을 강하게 부딪치며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고통 따위를 느낄 겨를은 없었다.
"성운아!"
난 바로 일어나 여전히 손에 꽉 쥐고 있는 활과 화살을 든 채 다시 강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성운이도, 또 언뜻 본 거 같았던 마시울 놈도 보이지 않았다.
팍!
그때 갑자기 내 머리에 번개가 치는 느낌이 들더니 난 다시 허공으로 떠올랐다.
5미터 정도 떠올랐을까? 아래에서 날 올려다보는 대머리 노인이 보였다. 아까 동굴에서의 충격으로 길었던 흰머리가 모두 타버린 모양이다.
파란 머리에서 흰머리로 가더니 이제 대머리다.
난 허공에 떠올라 회전하는 상태에서도 놈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어떤 대머리는 지구도 지키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어이없는 농담이 튀어나오다니, 좀 전의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놈은 다시 왼손을 들어 휘저었다. 그러자 그나마 조금씩 하강하던 나는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다시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때 보았다. 놈의 오른팔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게다가 얼굴도 삼분의 일 정도가 찌그러져 있었고 한쪽 눈밖에 못 쓰는 상태였다.
'저런 상태에서도 살아있다니···'
어쨌든 아까 완전히 죽이진 못했어도 놈은 지금 정상이 아니다.
허공에서 끝없이 강하게 회전하고 있으니 점점 속이 메스꺼워졌다. 심한 어지럼증에 활을 다시 제대로 잡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아직도 활을 꼭 쥐고 있는 내 손에 감사할 뿐
나는 가까스로 등에서 화살을 다시 하나 꺼내 활에 걸었다.
하지만 너무 빨리 회전하는 탓에 놈을 제대로 조준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반복되는 회전 패턴에 적응이 되자 어지럼증과 상관없이 놈의 모습이 서서히 마치 멈춰있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놈의 정수리를 정조준하고 그 분노를 화살에 담아 활시위를 놓았다.
휘익!
강한 원심력에 화살은 잠시 휘청거리더니 이내 자세를 잡고 놈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됐다!'
놈의 미끈한 정수리 근처에 화살이 당도했을 때 나는 이제 정말 놈을 작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콰직
그런데 이 소리는 놈의 대가리가 박살 나는 소리가 아니다. 사방의 모든 자연이 멈춰있어 고요한 탓에 그 작은 소리가 너무나 잘 들렸다.
화살이 부러졌다.
그때 공중에서 회전하는 속도가 급격히 느려졌고 놈의 모습이 시야에 제대로 들어왔다.
놈은 하나 남은 손으로 화살을 붙잡고 있었다.
난 다시 화살을 빼려고 등의 화살통에 손을 뻗었다.
파악!
하지만 강한 충격파가 다시 나에게 들이닥쳤다. 그 바람에 난 돌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윽!"
고통을 간신히 참으며 등에 있던 화살통에 손을 뻗는데 손에 잡히는 게 없다. 심지어 검집조차 사라졌다.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니 멀리 놈과 나 사이 딱 중간에 화살통과 검집이 떨어져 있다.
난 바로 몸을 일으켜 내달렸다. 그런데 그 순간 내 온몸에서 초록의 불빛이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얼마 달리지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너무 큰 고통이 온몸을 감싸자 아예 감각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끄아악!"
몸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 몸속의 세포 하나하나를 칼로 찌르는 듯한 느낌은 내 숨통을 끊어버릴 듯 점점 내 목과 머리로 더더욱 강하게 이동했다.
"시발 대화 좀 하려고 했더니"
놈은 천천히 나에게 걸어오더니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검집과 화살통을 강물에 던져버렸다.
난 시각 세포가 전부 타버리는 것 같은 고통에 그 모습조차 선명하게 볼 수 없었다.
놈은 날 무심하게 바라보더니 시체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버스 따위 필요 없다. 그냥 죽어라."
순간 놈의 진심이 느껴졌다.
이제 죽어도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그래도 저놈에게 죽는 건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하지만 난 조금씩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고 내 영혼은 이제 정말 지친 듯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아있긴 한 건지 이미 죽은 건지도 이젠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때
콰쾅!
그런 폭음이 들렸다. 이어 거센 바람도 느껴졌다.
하지만 난 이미 시야를 거의 잃은 상태였고 이제는 청각마저 얼마 남지 않은 느낌이었다.
입에서 비명조차도 지르기 힘들었다.
아득해지는 시야에 뭔가 번쩍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먹어가는 귀에서 괴물의 비명도 들리는 것 같았다.
뀌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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