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J1. 횡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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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니 악마쥐 한 마리다. 경계의 끝에서 뒷다리만 잘려 나가 버둥거리고 있었다.
"아직 남은 놈이 있었네"
그때 대시보드에서 노란불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무거운 땅울림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익숙한 느낌에 고개를 돌리니 왼쪽 창 너머에서 멧돼지 괴물 여러 마리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내려가서 잡을까?"
성희의 말에 나도 검을 뽑으려고 했으나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놈들의 뒤로 반짝이는 뭔가가 쫓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민이다."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아 상황을 지켜봤다. 전방에는 안간힘을 쓰며 기어가고 있는 악마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멧돼지 다섯 마리가 달려가고 있다.
"하필 저기로 뛰어가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멧돼지 괴물들은 엄청난 무게감으로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악마쥐는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무심하게 하지만 사정없이 바닥을 구르며 지나갔다.
카악! 파직!
유일한 생존 악마쥐는 그렇게 순식간에 멧돼지 다섯 마리에게 밟혀 터져나가 흔적조차 사라져 버렸다.
그 뒤로 유민이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더니 슬쩍 우리에게 손을 한 번 흔들고는 멧돼지들을 순식간에 추월해서 한 마리의 어금니를 잡아 옆으로 날려버렸다.
꿰에에엑!
그 바람에 놈은 달려가던 무게감 그대로 옆으로 쓰러지며 계속 구르더니 바로 근처에 있던 놈들도 같이 넘어트리며 마구 뒹굴었다.
"근데 왜 사람을 보고 도망을 가지?"
성희가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처음엔 다섯 마리가 아니었던 모양이야."
우리가 태연하게 상황을 구경하는 사이 바닥에서 버둥거리며 일어나던 멧돼지 괴물은 차례로 머리가 곤죽이 되고 있었다.
뻑! 파직 뻑! 파직
"유민이 이마는 무슨 해머 같다."
"어머 정말 그러네!"
마침내 다섯 마리의 멧돼지 괴물이 전부 떡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지자 그는 온몸에 초록색 괴물 피를 뒤집어쓴 채로 운전석 바로 옆으로 걸어오더니 태연하게 물었다.
"여기 왜 이래요?"
자주 다니던 사거리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어 있어서 그도 놀란 것 같았다.
"이야기가 길어"
그때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코르카 다섯 개가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빠른 속도로 버스로 날아들었다.
"어? 뭐야!"
그 광경을 본 유민이의 얼굴에서 무덤덤이 잠깐 사라졌다.
버스는 다른 각성자가 죽인 괴물의 코르카도 먹어 치운다.
"아, 버스 연료가 저거라서"
유민이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내가 어제저녁에 이 이야기를 빠트렸나? 혹시 몰라서 버스 설명을 너무 대충 해줬나 보다.
"저거 괴물돌이요?"
유민이는 코르카를 저렇게 부르는구나
"응 그래 괴물돌이지"
"저거 지하실에 좀 있는데"
"뭐? 얼마나?"
그는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집에 가서 보여드릴게요. 저 먼저 갑니다."
내가 버스에 태우기 꺼리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아예 내가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는 빠르게 언덕 쪽으로 사라졌다.
'눈치가 빠른 건가, 아니면 뭐 바쁜 일이 있나?'
무덤덤한 게 녀석이 무심하거나 눈치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부서질 것 같은 마음을 방어하는 최후의 보루는 아닐까?
난 대시보드를 살폈다.
[8/1000]
유민이 덕에 코르카 다섯 개가 충전되었다. 좀 전에 어이없이 코르카를 거의 다 날렸지만 그래도 큰 피해 없이 지나가서 다행이었다.
난 룸미러로 말없이 좀 전의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식구들을 살폈다. 표정이 무덤덤한 게 정말 이 동네에서 전염이라도 된 거 같았다. 말수도 줄었고 표정도 없었다.
난 버스를 돌려 언덕 쪽으로 다시 올라갈 준비를 했다. 그때 창밖으로 사거리의 괴이한 모습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룸미러 너머로 보이는 작은 성희가 오늘은 낯설게 느껴졌다. 나만 그런 건 아닌 거 같다.
다시 언덕을 올라 빌라 앞에 버스를 세우는데 유민이가 온몸에 물을 뚝뚝 흘리며 입구에 나타났다. 괴물 피를 약수터에서 씻어내고 오는 길 같았다.
"교회 밖으로 더 삐져나오고 있어요."
푸른 덩굴이 생각보다 빠르게 자라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악마쥐가 저 위치를 알게 되면 좀 골치 아플 거 같은데
나는 버스에서 내리며 교회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기서는 첨탑의 위쪽만 조금 보였다.
"쥐같이 생긴 괴물이 본 적 있어?"
"쥐요? 아···. 그 이쁘게 생긴?"
"어 귀엽게 생겼더라고"
"그놈 잡기 힘들어요. 몰려다니고 엄청 빠르고"
민머리 철인 유민이도 버거운 놈들이었다.
"그놈들이 저 파란 덩굴 즙을 좋아하더라고"
"그래요?"
우리는 잠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멀리 보이는 첨탑을 응시했다.
"아참! 코르카···. 아니 괴물돌이 있다고?"
내가 어쩔 수 없는 덩굴 식물보다 사실 나에겐 이게 더 중요했다.
"네, 지하실에요. 따라오세요."
난 유민이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형이 낮에는 여기 있는 거야?"
"예."
계단을 내려가자 음침하게 어두운 안쪽에 철문이 보였다. 유민이가 바로 문을 열었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깜짝이야!"
열자마자 지하실 입구에 붉은 두 개의 눈이 나타났다. 유민이 형은 낮에 계속 이러고 있나?
유민이는 형의 어깨를 토닥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난 잠시 머뭇거리다 애써 그 붉은 눈을 피하며 조심스럽게 따라 들어갔다.
촛불도 없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내부는 은은하게 밝았다. 온통 초록의 빛으로 물들어 있는 모습이 마치 외계 행성 같아 보이기도 했다.
"으아"
난 나도 모르게 나약하고 촌스러운 소리를 질렀다.
너무 많았다.
코르카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이···. 이걸 네가 전부?"
"예. 제가 잡으면 이렇게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형이 잡으면 안 나와요. 신기하죠?"
"대체 몇 개야?"
"안 세어봤는데 너무 많아서 세기도 그렇고, 약하지만 빛이 있어서 집에서 조명으로 쓰려고 했거든요. 근데 집에 두니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더라고요. 잠도 잘 못 자게 되고, 그래서 창고로 옮겼죠. 형이 좋아해요. 이걸"
유민이의 수다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게 버스 연료라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지금 깜짝 놀란 건 나다. 눈앞에 쌓여있는 코르카는 개수를 세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내 옆에 유민이 형이 붉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지만, 지금은 조금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이거 내가 가져도 돼?"
내가 묻자 유민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우리 형도 괜찮을 거예요. 안 그래도 요즘은 둘 데도 없어서 안 주워 왔어요. 혹시나 쓸데가 있나 싶었는데 약하게 빛나는 거 말고는 쓸 일이 없더라고요. 우리 집에는 욕실에만 하나 뒀어요. 딴 데 두면 거슬려서"
이게 웬 횡재인가? 대체 몇 개지? 버스에 넣어봐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일일이 세기에는 너무 많았다.
"어···. 그래"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갑작스러운 횡재에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다. 근데 이걸 다 언제 옮기나?
'혹시?'
난 코르카 한 개를 집어 들고 문밖 계단 쪽으로 던졌다.
와당탕!
코르카는 계단 쪽으로 떨어져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위로 올려 드릴게요. 어?"
유민이가 차분하게 말하는 와중에 계단에 떨어진 코르카가 혼자서 빠르게 진동하게 시작했다.
"저거 또 움직이네?"
점점 허공으로 부양하더니 쏜살같이 계단 위를 돌아 사라졌다. 계단 쪽은 버스의 흡수 범위에 들어가나 보다.
"버스가 근처에 있는 건 알아서 주워 먹거든."
난 코르카 두 개를 들고 다시 그쪽으로 집어 던졌다. 그러자 유민이가 다가오더니 말했다.
"제가 할게요."
그는 허리를 숙이더니 하나씩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팔 움직임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마치 속사포처럼 코르카 덩이가 계단 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나와 유민이 형 괴물은 그 모습을 까만 눈과 벌건 눈으로 구경했다. 둘 다 입을 벌린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실에 있던 코르카 대부분이 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네 개의 코르카만 남겼다.
"이건 조명용으로 둘께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올라가서 버스의 게이지를 확인할 차례였다. 난 설레는 마음을 움켜쥐고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계단을 오르는 동안 밖에서 잠깐 뭔가가 번쩍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
그리고 일 층으로 다 올라왔을 때 나와 유민이는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버스가 사라졌다.
유민이는 그저 호기심의 눈빛이었으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의 시작과 끝
우리 식구의 보금자리
멸망한 세상에서 나의 모든 것
그 버스가 눈앞에 보이지 않았다.
난 잠시 멍하게 서 있다가 거리로 뛰어나왔다. 그리고 미친 듯이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버스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 어떻게?"
성희나 아이들이 나를 두고 어디론가 갔을 리는 없다.
버스가 갑작스럽게 코르카를 많이 흡수해서 탈이 난 건가? 갑작스러운 소멸? 아니면 버스가 먹튀를?
온갖 생각이 다 들었지만 그건 그저 내 상상일 뿐이었다.
대체 어찌 된···.
그때 세상이 번쩍하는 느낌이 들더니 갑자기 버스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어?"
내가 몰던 우리 버스가 아니다.
창문 안쪽으로 사람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묘하게 우리 버스 느낌이 남아있었다.
"형 왜 이런 거예요?"
갑자기 사라졌던 버스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마도 누군가 진화 버튼을 누른 것 같다. 그거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난 잠시 버스 외관을 살피다 버스 옆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지연도 없이 잠금장치가 바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느낌이다.
문을 열자 거실 바닥에 남매가 쓰러져 있었다. 급하게 올라가서 아이들을 살펴보니 별다른 외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잠이 든 것 같다. 난 아이들을 침대로 옮겼다.
"으···."
그때 운전석 쪽에서 성희의 신음이 들렸다.
"어떻게 된 거야?"
성희는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나 이내 얼굴을 쓸어내리며 날 바라봤다.
"버스 대시보드에 손을 올리고 밖을 살피고 있었는데 갑자기···."
"뭐?"
"대시보드에 분명 버튼이 없었는데 내가 손을 대고 있던 자리에 갑자기 버튼이 나타났어."
"진화 버튼?"
성희는 미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었다. 버스가 이유 없이 사라진 게 아니어서
그런데 진화? 천 개 이상 코르카를 먹었다고?
그때 내 시야에 코르카 게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459/3000]
버스가 다시 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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