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강릉
거대한 붉은 빛기둥은 하나가 아니었다. 작은 여러 개의 불빛이 멀리서 볼 때 뭉쳐서 하나로 보였던 거다.
성희가 조수석으로 와서 앉더니 붉은빛에 물든 눈망울을 껌벅거리며 말했다.
"저게 대체 뭘까?"
뒤쪽에서 태형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무언가 짐작 가는 게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래?"
내가 묻자 태형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확실하진 않은데···. 그쪽 세상 오염과 상관이 있는 거 같아"
난 룸미러로 힐끗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 그래도 오염에 관해 묻고 싶었어, 그쪽 세상이 거의 멸망할 정도인 게 대체 뭔지"
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벌레 같은 거야, 아주 작은···. 마치 우리의 좀벌레처럼 잘 보이지도 않아, 나도 오염지역 근처에서 희성이가 말해줘서 한 번 본 적이 있거든."
"벌레?"
"응, 물과 흙까지 오염시켜서 근처의 식물들이 전부 시커멓게 썩어가더라고···. 그리고 동물도 직접 접촉하면 피부가 경화되다가 마침내 썩어버려"
말로만 들어서는 그렇게 와닿진 않았다.
"벌레가 아니라 무슨 병균 같은 느낌인데? 그런데 동물이라면?"
"우리가 괴물이라고 부르는 그쪽 동물들 말이야, 그리고"
그는 침을 한 번 삼키더니 말을 이었다.
"생존자 아주머니 한 분의 다리도 썩어들어가는 걸 봤어."
"허어"
그 아주머니가 어떻게 되셨는지는 묻고 싶지 않았다.
"아주머니와 간접 접촉한 사람들은 괜찮았던 거 같아"
태형이의 말이 귓가 언저리를 맴돌다 머릿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졌다.
그쪽 세상이 그렇게 멸망 중이다. 그리고 그곳에 내가 아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정말 아는 걸까?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정말 알 수 없는 나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어쨌든
그쪽의 생존 괴물들은 이쪽으로 피난을 오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괴물 말고 오염까지 같이 넘어오게 된다면?
그나마 아직은 회생의 희망이라도 있어 보이는 이쪽 지구는 어떻게 될까?
문득 태형의 이야기 본론이 아직 나오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저 붉은 빛기둥이 작은 벌레 오염과 무슨 관련인데?"
내 말에 태형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희성이한테서 들은 적이 있어···. 빛기둥이 있던 곳은 잠시 오염이 멈췄다고, 처음에는 정체불명의 빛기둥이 벌레들을 막는 건가 싶었는데"
그때 묵묵히 듣고만 있던 김씨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여기로 오고 싶어 하는 게 괴물만은 아닌가 보구먼, 쿨럭"
내가 방금 머릿속에서 떠올렸던 상상을 녀석이 현실로 말하고 있으니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정말 그렇다면···.'
버스는 그렇게 텅 빈 고속도로를 무거운 침묵 속에서 달렸고 나는 문득 다른 궁금증이 떠올랐다.
"이전에도 붉은 빛기둥을 봤다고 했지?"
내가 룸미러로 태형을 바라보며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 오염 벌레들이 예전에도 넘어온 거라면 이미 여기도 엉망이 돼야 했던 거 아닌가?"
그때 성희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지난 곳 말고 다른 곳으로 갔을 수도 있잖아. 지구는 충분히 크니까"
붉은 빛기둥이 오염의 또 다른 게이트일까? 아니면 우리의 예상과 다른 그 무엇일까?
다들 생각에 잠긴 사이 버스는 다시 바다가 보이지 않는 길로 들어섰다. 도로는 다행히 평소처럼 한산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깨끗한 고속도로 위에서 멀리 표지판이 하나 다가왔다.
<동해>
여기서 빠지면 동해 시내로 들어가는 거다.
"누군가 동해로 간다고 하지 않았었나?"
침묵 속에서 성희가 입을 열자 내가 대답했다.
"편의점 은결이네 외삼촌"
"아···. 요양병원에 원장으로 계신다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은결이와 진주씨는 지금 도계읍에서 어떻게 되었을까? 엄마와 남편을 찾았을까?
나는 나가는 곳 표지판을 지나치며 그들에 관한 생각도 조금씩 지워갔다.
"거기서 곱게 멸망이나 할 것이지 왜 전부 같이 죽자고 꾸역꾸역 쳐오는지 원, 쿨럭"
갑자기 김씨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모두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그때 또 표지판이 멀리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망상 1km>
해수욕장이다. 근처 거래처에 물건을 배달하러 몇 번 온 적이 있다. 여름 시즌때 멀리서 해수욕하는 사람들을 구경한 기억이 떠올랐다. 부럽진 않았다. 조금 외로웠을 뿐
직진하면 강릉이다.
"할아버지는 강릉 어디로 가세요?"
김씨 할아버지가 버스를 탄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이제서야 정확한 위치를 묻는 게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
"쿨럭, 안인항이라고···. 작은 항구 마을이야, 강릉 시내 쪽은 아니고 조금 아래"
"아, 네"
나는 더 묻지 않았고 그도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곧 어떤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버스는 그렇게 계속 달렸다. 근처에 바다가 있지만 도로의 위치와 차음벽 때문에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단지 점점 강해지는 붉은 빛기둥만이 하늘을 뚫고 내려온 듯 우측 전방에서 불길한 기운을 퍼트리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더 달렸을까?
다시 멀리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자 우리는 바다와 하늘이 붉은 빛기둥으로 연결된 걸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마치 용오름 같기도 했지만, 바닷물이 하늘로 올라가고 있진 않았다.
도저히 지구의 모습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정말 기괴한 풍경이었다.
"왜 바다에만 저게 있지?"
성희의 말이다. 나도 같은 궁금증이 피어오르던 참이었다. 멀리 강릉 앞바다로 추정되는 곳에서부터 여기 동해시 앞바다까지 붉은 빛기둥은 바다 위에서만 보이고 있었다.
"지금 대체 몇 시야? 쿨럭"
분명 이른 오후 정도의 시간일 터였다. 아까 출발하기 전에 중천에 떠올라 있던 해도 분명히 기억한다. 그런데 어느샌가 푸르렀던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구름에 가려졌다기 보다는 자욱한 안개가 하늘을 뒤덮은 느낌이다.
"무슨 저녁 같다. 동쪽으로 붉은 노을이 지는 것 같은 느낌이야."
태형이가 중얼거렸다. '나는 해가 동쪽으로 지겠네' 따위의 농담이 떠올랐지만 애써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괴기스러운 상황에도 내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걸 성희가 눈치챈 듯 날 바라보며 말했다.
"참지 말고 말해"
난 그녀를 슬쩍 바라보다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충격적인 경험과 이야기, 그리고 괴기스러운 상황에서도 내 마음은 이상하게 차분하다. 분노와 슬픔이 공존하면서도 마치 단단하게 굳은 어떤 감정 벽 같은 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성희도 그런 내 모습에 이미 적응하고 있었다. 그녀에게도 그런 게 필요해 보였다.
"너무 캄캄해"
마치 해가 진 저녁처럼 온 세상은 검붉게 변하고 있었고 멀리 피에 물든 것처럼 보이는 바다와 붉은 하늘의 모습은 마치 오늘이 지구 멸망의 날인 것처럼 이글거렸다.
난 도로가 너무 어두워 전조등을 밝혔다. 그리고 버스의 전체 투명 [ON] 상태를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때 내 눈에 탐지 숫자가 들어왔다.
[ 0 < 27 < 1532547 ]
"아씨! 이거 뭐야!"
내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자 성희가 놀라서 물었다.
"왜 그래?"
"여기 이거"
그녀는 내 시선이 머무른 액정을 바라보더니 입을 떡 벌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뭔데 그래? 크허억, 쿨럭"
할아버지도 거실의 액정에 표시된 탐지 숫자를 발견한 듯 연신 기침하며 소리쳤다.
"쿨럭, 이게 뭐여! 고장 난 거 아니여?"
난 그때 바다 위에 있는 붉은빛 기둥 중에서 제일 가까운 게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저거냐?"
태형에게 물었다. 그는 이미 그것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마···. 맞아"
붉은 빛기둥에서 뭔가 까만 먼지 같은 것들이 회오리바람에 날리는 것처럼 휘몰아치며 하늘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 거리에서도 보이네"
내가 중얼거리자 성희도 그것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연기 같다."
그때 도로 옆으로 표지판이 지나갔다.
<옥계 2km : 바다가 보이는 휴게소>
몇 번 들렀던 곳이다. 높은 곳에서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장소다. 저곳에서 상황을 좀 파악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속도를 더 올렸다. 2km면 금방이다. 그렇게 조금 달리니 다른 표지판이 나타났다.
<강원도 강릉시>
"강릉이다."
내가 덤덤하게 중얼거리자 모두 표지판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저 권역으로 들어온 것일 뿐 아직 시내가 보이려면 한참 멀었다.
곧이어 옥계 휴게소 1km 표지판이 옆으로 지나갔다.
"휴게소 들르겠습니다."
예전에 이 휴게소에서 우동을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우동 메뉴는 비싸고 맛은 그닥이었다. 그저 여기는 경치 때문에 들르는 휴게소다. 하지만 난 혼자 업무 중에 들러서 그런지 그다지 감흥은 없었다.
마침내 우측에 휴게소 진입로가 나타났다. 나는 버스의 속도를 줄이며 천천히 휴게소로 들어갔다.
아직 대낮인데도 하늘은 이미 검붉게 물들어 있었고 휴게소 주차장과 건물은 마치 밤처럼 아주 어두웠다.
"여기도 뭔 일이 있었구먼. 쿨럭"
주차장에는 마치 방벽을 세워놓은 것처럼 차량이 쌓여있었다. 그리고 오래되어 보이는 시체들이 드문드문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데 인간의 시체 말고도 못난이와 꺽다리 그리고 산산이 부서진 거미 괴물 다리도 보였다.
"각성자가 없었나, 왜 괴물들 시체가 그대로 있지? 코르카 꽤 될 거 같은데"
성희가 미라처럼 보이는 인간과 괴물들 사체를 바라보며 말하자 내가 대답했다.
"다른 괴물에게 당했겠지, 아니면···."
인간과 꺽다리파 모두에게 적대적인 괴물도 많다. 거대파나 악마쥐, 혹은 괴벌레 같은···. 그런데 그놈들의 사체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일방적인 공격이라도 해도 한 두 마리 정도의 사체 흔적은 있어야 하지 않나?
"오염은 아니야."
혹시 몰라서 물어보려 했는데 태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난 버스를 인도로 올려 바다가 보이는 위치까지 몰았다. 벤치와 지붕 정도의 구조물은 이미 많이 부서져 있어 버스로 밀면서 지나가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난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난간 바로 앞에 버스를 세웠다. 그리고 다시 액정을 살폈다.
[ 0 < 47 < 4789123 ]
숫자를 보는 게 더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이게 대체 몇 마리야?"
성희는 아까부터 액정을 살피고 있었다. 난 다시 시선을 멀리 붉은 빛기둥과 먼지 회오리로 옮기며 말했다.
"저 오염 벌레들이겠지"
내가 중얼거리자 뒤에서 할아버지의 엑센트 강한 음성이 들려왔다.
"좀만 한 새끼들, 쿨럭"
예전에는 할아버지의 저 말투가 참 거슬렸는데 언제인가부터 이상하게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든다.
"바다가 이상해"
창밖을 유심히 살피던 성희가 입을 열었다.
바다 수면까지 연기 같은 검은 벌레 때들이 내려온 것 같았다. 그리고 놈들이 닿은 바다의 색이 바뀌는 게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이미 붉은 빛에 물들어 있는 바다는 섬뜩한 검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저게 오염인가?"
내가 입을 열자 태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되는 걸 직접 본 적이 있어?"
성희가 고개를 돌려 묻자 태형은 창밖으로 시선을 그대로 둔 채 대답했다.
"바다는 아니고 호수였어"
난 룸미러로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호수는 어떻게 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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