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J1. 기억 각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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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귀신의 소리를 들은 듯 등골이 서늘해지며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지붕 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 웃음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여전히 멀리 건물을 바라보며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잘못 들었나?'
난 버스 주변을 살폈다. 우리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맞아//
"뭐?"
내가 갑자기 큰 소리로 입을 열자 성희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며 다가왔다.
"왜 그···."
나에게 다가오던 성희의 행동이 점점 느려지더니 이내 멈췄다. 그녀의 오른발이 공중에 그대로 떠 있었다.
"성희야"
내가 불러 봤지만, 그녀는 하려던 말을 내뱉던 입을 약간 벌린 그대로 마치 얼어붙은 듯 멈춰있었다.
난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이게 뭐야!'
나라는 난간에 기대어 상반신을 쭉 빼고 멀리 건물 옥상을 여전히 바라보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아들에게 뭔가 말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멈출 수 없는 기침에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고 준호씨는 아까 감탄사를 연발하며 벌린 입을 아직도 다물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구조사 진주씨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그대로 멈춰버렸다는 거다.
나만 빼고
난 성희에게 다가가서 얼굴로 손을 뻗었다.
"가만히"
아까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 같았던 그 음성이 이제는 다른 공간에서 들려왔다. 같은 목소리다.
난 다시 손을 내리고 소리가 들려온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버스 바로 앞에 있는 작은 시골집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 상태에서 만지면 죽어"
시골집 마당 어딘가의 허공에서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뭐야! 너 누구야!"
난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형체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소리가 들려왔던 허공의 공간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더니 무언가 흐릿하고 투명한 물체가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빛을 왜곡시키는 어떤 액체처럼 보이기도 했다.
난 등에서 검을 빼 들고 겨누며 말했다.
"모습을 보여!"
그 형체는 공중에 살짝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나에게 계속 다가왔다.
"네가 봐야지, 왜 나보고 보이라고 하나?"
그 형체가 버스 지붕 위에 다다르자 서서히 투명한 느낌이 사라지더니 조금씩 형체가 시야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 순차적으로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 나타난 건 머리칼이다.
파란색이다. 그리고 길었다.
'파란 긴 머리?'
그러고는 얼굴과 나머지 몸이 그려지듯 서서히 눈에 보였다. 긴 머리와 가녀린 얼굴형이 마치 여성 같았지만 목소리는 남자였다. 하지만 미소년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좀 있어 보였다.
"너 뭐야!"
파란 긴 머리의 사내가 마침내 내 앞에 제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버스 지붕 난간에 앉아 말없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난 검을 놈에게 겨누며 다시 말했다.
"너 뭐냐고!"
그러자 차분한 놈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와 같은 부류"
"뭐?"
그는 난간에서 내려와 근처에 그대로 멈춰있는 성희 옆으로 걸어갔다. 난 놈에게 소리쳤다.
"허튼짓하지 마라"
물론 놈이 우리를 해칠 생각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랬다면 이렇게 여유롭게 나타나서 차분하게 말을 걸지는 않았을 거다.
"어떤 허튼짓?"
난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검을 내렸다.
"됐고, 뭐냐 넌?"
하지만 손잡이를 잡은 손에 들어가는 힘은 멈출 수 없었다. 엄지손가락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녀석은 테이블 위에 앉으며 말했다.
"너와 같다고"
"각성자냐?"
놈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부르나 봐? 뭐 어쨌든"
놈은 옆에 따지 않은 캔맥주를 들더니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 능력은 기억이야."
"기억?"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설명해도 이해 못 할 테고, 으흠"
놈은 헛기침하더니 말을 이었다.
"기억에서 능력을 불러오고 있어 지금 보다시피 시공간 비틀기 같은 거"
난 놈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애써 참았다. 놈의 의도가 뭔지 모른다. 그리고 내가 아는 정보가 너무 없다. 이럴 때는 말을 줄여야 한다.
"그래서 어쩌라고"
일부러 시큰둥한 태도를 보여봤지만, 놈은 개의치 않은 듯 표정에 변화가 전혀 없었다.
그때 그가 성희 곁으로 걸어가더니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일까?"
순간 속에서 꿈틀거리던 뜨거운 게 솟구치는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참았다. 흥분하면 안 된다. 난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죽는다."
그때 놈이 웃음을 터트리며 옥상 반대편 난간으로 걸어갔다.
"하하 농담이고"
그는 멀리 기숙사 건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단해, 그 활은 어디서 난 거야?"
슬슬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본론만 말하지?"
다시 나에게 돌린 그의 얼굴에서 갑자기 웃음기가 사라졌다.
"왜 안 물어봐? 애들 소식"
그때 빗속에서 성운이네와 같이 떠났던 자가 이놈이 맞긴 했나 보다.
"여기 나타난 이유나 말해봐"
"쯧쯧, 알았다고"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 실험실을 망쳐놨더군."
난 박물관 지하의 거머리 부부를 떠올렸다.
"약장수들?"
내가 비아냥거리자 그의 눈빛에 살기가 스쳤다.
"그거 중독이 아니라 깨우는 약이야."
"뭐?"
"각성자들 깨우는 거라고 병신아"
화를 참고 있던 건 그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슬슬 그의 말에서 유치한 욕이 비치기 시작했다.
"각성자가 아니면?"
그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뭔 또 각성자 타령이야, 다 같은 사람이구만"
"돌려 말하지 말고 제대로 설명하라고"
그는 주변에 시간의 흐름이 멈춰있던 사람들을 둘러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각성자와 일반인으로 나누는 거 같은데, 너무 틀에 박힌 이분법적 사고방식 아닌가? 이래서 한국 교육이 문제라니까, 항상 이거 아니면 저거지?"
"맞아, 넌 이상한 놈 난 정상인"
"이 시···."
그는 중2병 같은 욕이 습관처럼 튀어나오려던 걸 간신히 참는 눈치였다.
"다 똑같아, 능력이 다를 뿐이다. 그걸 빨리 개화시켜 주는 방법을 난 기억했다고"
"아까 말한 그 기억의 능력? 누구의 기억인데?"
그가 파란 머릿결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고대 선조의 기억"
"개소리 말고"
"넌 네가 어디서 온 거로 생각해?"
"뭐?"
"네 이상한 버스는?"
문득 그동안의 기억들이 내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듯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내 능력은? 그리고 검과 활을 잡았을 때 느꼈던 내 기억이면서도 내 기억이 아닌 그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내 고대의 세포가 깨어나는 그 느낌이 이놈이 말하는 그 기억이라는 건지도 몰랐다.
"무기도 잘 쓰던데, 어디서 배운 기억은 없지?"
난 잠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움직임이 마치 깨진 영상파일처럼 뒤틀리기 시작했다.
//어···. 시발···. 젠장 벌써//
그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끊어진 채 들리기 시작했고 그의 머리와 몸통과 다리가 분리된 듯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보였다가 사라졌다.
//서울로 와···. 그러면 알게···.//
"애들은?"
난 사실 이게 제일 묻고 싶었던 거다.
//애···. 들···. 그리고···. 네 할아···.//
그리고 갑자기 주변에서 무거운 중력의 흐름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적막하고 먹먹한 공간이 한꺼번에 터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래?"
성희가 끊겼던 말을 이어서 하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때 파란 머리가 만지작거리던 맥주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깡!
"어? 뭐야?"
테이블 자리에 앉아있던 준호씨가 갑자기 떨어진 맥주캔을 보더니 놀라 벌떡 일어섰다.
난 갑자기 바뀐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갑작스러운 정보와 상황에 혼란스러웠다.
내 얼굴을 바라보며 성희가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괜찮아?"
난 갑자기 다리에서 힘이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간신히 참고 있었던 팔다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꽤 긴장했던 모양이다.
"활 쏘느라 무리한 거 아냐?"
나라가 다가오며 말했다. 그런데 주변의 말에 제대로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웅얼거리는 소리로만 들렸다.
'서울? 성운이와 할아버지가?'
돌려서 쓸데없이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갑자기 여유 부리던 놈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진우야!"
성희가 날 흔들며 소리쳤다.
"그만해 어지럽다."
"정신 차리라고!"
난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너 서울에서···."
"뭐?"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기억나는 거 더 없어?"
그녀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일전에 대략 설명을 듣긴 했지만, 혹시 몰라서 다시 물은 거다.
"내가 말한 그게 다야···. 버스에서 하늘을 보고 놀란 기억···."
그녀가 새롭게 떠올린 기억은 없는 듯했다. 난 그녀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파란 긴 머리가 나타났었어."
"뭐? 언제?"
"좀 전에"
성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어···. 어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게···."
난 심호흡하고 마음을 진정시킨 후 좀 전의 상황을 그녀에게 천천히 말해줬다. 그녀뿐만 아니라 옥상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떻게 그런···."
다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이미 설명할 수 없는 일을 많이 겪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좀처럼 어떤 결론에 도달하기는 어려웠다. 너무 모호한 말이 많았다.
"창문에 뭐가 있어요."
은결이의 말에 침묵이 깨졌다. 녀석은 멀리 기숙사 건물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혼란에 빠져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멀리 건물로 향했다.
건물의 창문이 연이어 깨져나가며 무언가가 튀어나와 외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까 그 괴물은 아닌데?"
나라의 말이다.
난 일어서서 눈을 비비고 건물을 응시했다. 하지만 아직 어지러워 시야가 흐렸다.
"인간형이다."
성희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젠장! 사람들은 보여?"
잠시 침묵이 흐르다 나라가 대답했다.
"안 보여, 아까 숨은 곳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다. 인간형 몇 마리야?"
나라가 숫자를 세고 있다. 그런데 시간이 좀 걸렸다.
"아홉···. 열···. 열셋"
건물 안에 있던 괴물 같은 인간이 인간 같은 괴물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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