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J1. 들꽃
해가 떠오르기 시작할 때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햇빛에 비친 읍내의 풍경은 더욱 처참해 보였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눈에 띄지 않았고 흔했던 아침의 새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부서진 자동차나 무너진 건물 잔해가 차도를 막고 있어 일반 차량이었다면 진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난 버스로 밀어버릴 수 있는 건 천천히 밀면서 전진했다. 마치 장갑차가 불법 주차 차량을 사정없이 뭉개는 것 같은 묘한 쾌감도 밀려왔다.
잔해들을 무리 없이 밀고 나가는 버스는 힘이 굉장했다. 중장비를 모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날카로운 잔해를 해치며 나가는데도 버스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는 느낌이다.
대신 쉴드가 줄어들고 결국 코르카의 손실로 이어지겠지만 지금은 달리 방도가 없었다.
난 운전석 창문을 열었다. 옆문을 열어 놨을 때도 괴물은 들어오지 못했다. 심지어 괴물의 초록 피도 깔끔하게 씻겨내 버리는 방어막이다.
그런데 시원한 바람은 창문을 타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뒤에서 테이블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리를 마친 후 그녀는 거실 테이블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그녀의 긴장한 표정이 백미러로도 여실히 보였다.
난 전방과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버스를 몰았다. 읍내라고 하지만 여전히 시골이다. 대부분 단층 건물이었고 공터와 텃밭도 많이 보였다.
읍내가 크지 않아 그녀가 말한 장소 근처에 도착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읍사무소 건너편 맞지?"
그런데 내가 알고 있던 그 읍사무소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 입구에 표지판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여기가 읍사무소 앞인지도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건물이 사라졌다.
그런데 무너졌다고 하기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버스를 멈추고 뒤돌아보자 그녀는 버스의 오른쪽을 보고 있었다. 나도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도 건물은 없었다. 심지어 건물의 잔해조차 보이지 않았다.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빈 땅이었다.
'왜 좀 전에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
여기로 도착할 때 버스의 앞 유리 너머로 휑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는데도 난 읍사무소 건물을 찾는 데만 정신이 팔려 오른쪽을 제대로 못 본 것 같다.
"어···. 어떻게···."
그녀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난 주위를 둘러봤다. 이쯤이 맞는 거 같다. 어제 멀리 수많은 거미 몬스터가 있었던 곳, 바로 여기쯤이었다.
그래도 무너진 건물의 잔해는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싹 잘라내서 어디론가 옮겨버린 것처럼 이렇게 깔끔하지?
난 주변을 살핀 후 검을 들고 조심스럽게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가을의 아침 햇살은 따가웠다.
난 단층 상가 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걸어가 땅을 살폈다. 무언가에 그을린 느낌이다. 건물의 바닥에 있어야 할 기초 설비도 보이지 않았다.
뜯어낸 게 아니라 원래 건물이 없었던 것처럼 그저 공터였다. 심지어 잡초까지 자라있었다.
'어떻게 이런?'
부서진 건물의 잔해를 깔끔하게 치웠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괴이한 상태다.
난 주변을 더 둘러봤다.
읍사무소 건물이 있던 자리와 근처의 일정 영역만 이런 상태였다. 그래서 이 부근에 도착했을 때도 길을 잘못 든 줄 알았다.
오는 길에는 무너진 잔해가 곳곳에 있었다. 심지어 도로 위까지 거의 막고 있어서 버스로 밀어버리느라 쉴드를 많이 까먹었다.
그런데 이 부근만 마치 그대로 어디론가 사라진 것 같은 풍경이다.
그녀도 버스에서 내려 내 옆으로 걸어왔다.
"이해할 수가 없어"
그녀는 허망한 표정으로 가게가 있어야 하는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매 순간 우리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과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세상은 바뀌었고 우리는 새로운 지식을 쌓기 시작해야 한다.
바뀐 세상은 우리의 이해를 바라는 게 아니다. 우리가 생존하려면 이제 적응해야 한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는지 그대로 서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난 혹시 모를 괴물의 습격이 신경 쓰여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일단 버스로 가자"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어딘가에 살아 계실지도 모르고"
내 말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왜 그래? 뭔가 기억났어?"
갈색의 큰 눈망울이 공포와 분노에 사로잡혀 떨리고 있었다. 사람에게서 저런 표정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이다.
"기···. 기억나···."
난 그녀의 눈빛만으로도 무슨 사연인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사실 들을 자신이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때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리자 내 눈에 들어온 건 못난이 괴물 무리였다.
다섯 마리 정도가 우리의 뒤쪽으로 조용히 접근하고 있었다.
놈들은 내가 갑자기 돌아보자 아주 잠깐 움찔하더니 귀에 거슬리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뀌이이이이
"이 새끼들 잘 걸렸다."
난 검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
"엇?"
그런데 놈들 뒤쪽 언덕에서 시커먼 형체가 계속해서 올라왔다.
스무 마리는 넘어 보였다.
"젠장"
나 혼자 저놈들을 상대하는 건 무리다. 일단 버스로 돌아가야 한다.
버스까지 거리는 고작 10여 미터
언제든 뛰어 들어갈 수 있도록 마음을 이미 먹고 있었지만, 갑자기 이런 상황에 놓이니 그 10미터가 심리적으로는 100미터는 되어 보였다.
"성희야! 피해!"
그렇게 성희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소리를 치는 데 그녀가 사라졌다.
빡!
공사장에서 건물 부수는 소리가 났다.
빡! 파직 빡! 파직 빡! 파직
공사장이 아니었다.
못난이의 대가리가 터져나가는 굉음이었다.
빡! 파직 빡! 파직
무릎식신이 깨어났다.
스무 마리가 넘는 못난이 괴물은 하나씩 대가리가 박살 나며 읍사무소 주차장 위에 쌓이기 시작했다.
난 검을 든 손을 조용히 내렸다.
괴물이 사라지고 피어난 회색 연기 사이로 그녀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녀는 다시 부모님의 가게가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오른손에서 이름 모를 꽃 한 송이가 보였다.
아직 할 말이 남은 것 같다.
난 검을 그대로 손에 든 채로 읍사무소 앞마당을 돌았다.
못난이 괴물들은 그렇게 타이밍을 잘못 맞추고 들이닥친 덕분에 등장 몇 분 만에 전부 대가리가 박살 났다.
모든 건 타이밍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 타이밍이 운명을 결정한다. 버스가 집어삼키는 코르카를 보며 아까 붉은 눈을 껌벅이던 놈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난 버스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상태로 계속 주변을 경계했다. 못난이 말고 다른 놈이 더 나타날 수 있다. 성희가 또 깡그리 무릎으로 박살 낼 수도 있겠지만 그건 모를 일이다.
핀트가 조금이라도 비틀려 놈들에게 당하면 큰일이다. 게다가 좀 전에 너무 힘을 써서 지금 성희의 상태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검을 쥐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아니 무척이나 설렌다. 뭔가를 계속 베어버리고 싶은 욕구가 고대의 세포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 같다.
'이상하게 중독적이란 말이지'
그렇게 난 은연중에 만만한 놈이라도 나타나길 바라며 주변을 살피다 버스 뒤쪽에 사다리가 있는 걸 발견했다.
"저게 원래 있었나?"
난 다가가서 사다리를 올랐다.
버스 지붕 위에 올라가니, 마치 건물 옥상에 올라온 것 같이 시야가 확 트였다.
그때 어젯밤 여기를 밟고 지나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보였다.
'휴우'
잠시 마음이 가라앉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기분은 금세 사라졌다.
지붕에서는 주변을 관찰하기 더없이 좋았다. 하지만 여기 있다가 괴물이 나타나면 버스로 빨리 돌아가긴 힘들···
'어?'
지붕에 작은 문이 보였다. 이것도 진화 후에 생긴 건가?
난 그 문의 손잡이를 잡고 당겼다. 꿈쩍하지 않았다.
'음?'
손잡이를 잡고 다양하게 힘을 줘보고 있는데 마치 나의 생체를 인식하듯 기계음이 들리더니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난 다시 문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묵직한 소리를 내며 문이 위로 열렸다.
그 출입구는 운전석 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운전석이나 조수석 시트를 밟고 다니면 될 거 같았다.
"오케이"
이러면 지붕으로 드나드는 것도 어렵지 않을 듯싶다.
지붕 문을 열어 놓은 채 난 주변을 관찰했다.
이 부근의 소멸 지역을 자세히 살펴보니 전체가 거의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지름은 대략 백여 미터 정도?
"원형이라"
어떤 이상 현상으로 이 안에 있는 모든 게 어디론가 사라진 것 같다. 그 현상이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여기 있으면 위험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난 아래 운전석으로 내려가 지붕 문을 닫은 후 악셀을 밟았다.
그리고 버스를 조금 움직여 성희 바로 뒤에서 멈추고 그녀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운전석 창문 옆으로 다가왔다.
"고마웠어"
갑자기 힘없는 음성이다. 뭔가 다 체념한 것 같은, 아무래도 좋다는 그런 놓아버림
"뭐? 왜? 어디 가려고?"
난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너 아니었으면 진작 죽었을 거야, 여기까지 태워줘서 고마웠어, 이제 내가 알아서 할게, 조심하고"
내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 데 그녀는 바로 읍내 안쪽으로 뛰어갔다.
"하아···."
난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여기까지인가'
갑자기 또 혼자가 되었다. 30여 년 거의 혼자 살다시피 했는데도 지금 다시 혼자가 되니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난 운전석에서 일어나 거실 테이블 자리에 앉았다.
2층 침대의 아래 칸에서는 그녀가 쓰던 이불이 살짝 구겨진 채 그녀의 자취를 그대로 남겨두고 있었다.
베개는 가운데가 그녀의 머리만큼 움푹 들어가 있었고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그대로 붙어 있다.
"젠장"
그녀는 혼자 아무것도 없이 살벌한 세상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다시 돌아오든 그녀의 길을 가든 그건 그녀의 선택이다.
난 다시 버스 운전석으로 가서 핸들에 손을 올렸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그때 문득 성희가 사라진 방향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젠장 괴물 한두 마리면 오히려 괴물이 걱정인데, 만약 아니면···."
난 버스를 움직여 그쪽으로 향했다. 머릿속에서 온갖 나쁜 상상이 떠올랐다.
분명 그 형체가 성희는 아니었다. 그런데 괴물 같지도 않았다.
'좀 작아 보였는데···.'
버스가 원형의 가장자리를 벗어나자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가 나타났다. 그대 잔해 뒤에서 누군가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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