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J1. 거미 지옥
쿵!
엄청난 굉음이 연이어서 들렸다.
버스 창밖으로 거대한 다리가 보였다. 거대 거미 괴물이다.
'저놈이 저렇게 컸었나?'
일전에 버스로 들이받았던 놈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창밖으로 수많은 거대 거미의 발과 다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뒤로 놈들이 지나온 산은 엉망이 되어있었다. 잠시나마 위안이 되었던 숲이다.
놈들은 버스의 존재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렇게 전진만을 계속했다.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거대 거미 수십 마리가 버스를 지나쳐가는 걸 바라보고만 있었다.
버스의 뒤쪽으로는 부서진 도로와 함께 초토화된 산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버스로 그냥 다 들이받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쉴드가 엄청나게 깎일 거다. 그리고 줄어든 쉴드를 채우기 위해 코르카도 많이 소모되겠지
하지만 괴물이 죽으면 코르카는 나올 거고 소모된 거보다 조금이라도 더 벌면 되지 않을까? 손해만 아니면 되지 않나?
생각해보니 버스 막무가내 돌진도 어떻게 보면 방법이 될 수 있었다.
난 멀어지는 거미 무리를 노려보다가 운전석으로 갔다.
"꽉 잡아"
난 악셀을 밟았다. 그리고 가장 뒤처진 거미의 다리를 노렸다.
버스의 앞 유리창에 거미 놈의 다리가 가까워졌다. 난 더욱더 거세게 악셀을 밟았다.
"으아아!"
거대한 다리들은 버스에 그대로 부딪히며 산산이 조각났다.
내 눈앞으로 거미 대가리가 떨어지는 게 보였다. 여러 개의 붉은 눈이 마구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눈빛이었다. 어쩌면 공포에 질린 눈빛이었는지도 몰랐다.
난 연이어 거미 다리만 노리며 닥치는 대로 버스를 몰았다. 뒤쪽에서 수많은 거대 거미의 다리가 부서지는데도 앞에서 달리던 멧돼지 괴물과 못난이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략 삼십 마리 정도의 거미가 쓰러졌다.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피니 어느새 나는 길 아래쪽 주유소 근처까지 와 있었다.
무심한 못난이와 멧돼지는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이미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거미 대가리들은 아직 꿈틀거리고 있다. 부러진 다리 조각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난 다시 핸들을 돌려 다시 놈들에게 향했다. 그리고 사정없이 버스로 깔아뭉갰다. 소리와 진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놈들의 몸통을 짓이기면서 버스가 요동치는 느낌은 들었다.
그런데 버스만으로 완전히 놈들의 숨통을 끊는 건 힘든지 아직 많은 놈들이 끈질기게 목숨을 부여잡고 있었다.
난 놈들의 중앙에 버스를 세우고 창밖을 살폈다. 멀쩡한 괴물은 보이지 않았다.
난 다시 한번 더 버스 주변을 확인한 후 방패와 검을 들고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아직 살아 꿈틀거리는 거미들에게 다가갔다.
수많은 붉은 눈이 동시에 움직여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놈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하나씩 다가가 조용히 머리에 검을 찔러넣었다.
뀌익!
거대한 덩치에 비해 죽을 때의 비명은 소박했다. 난 모든 움직임이 다 사라질 때까지 검을 찔러넣기를 반복했다.
문득 더는 놈들의 붉은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아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봤다.
내 눈앞에 펼쳐져 진 건 거미 지옥이었다.
난 그 지옥 한 가운데에서 눈을 감고 그 느낌을 즐겼다. 거미들이 느꼈을 죽음의 공포가 아직 그곳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나에게 묘한 중독성으로 다가왔다.
내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때 버스 창에서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는 사람들이 보였다.
난 순간 당황했다.
미친 거로 보였을까?
갑자기 저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면 내가···.
어? 날 바라보는 게 아닌데?
버스 안 식구들의 시선은 내 뒤로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 뒤의 높은 어딘가의 허공
그리고 버스 창을 두드리며 나에게 뭐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
난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며 찬 냉기가 내 몸을 덮는 듯한 찌릿함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기가 무서웠다. 돌아보면 바로 죽을 거 같은 공포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 공포감은 다시 나의 고대의 세포를 깨우기 시작하기는 개뿔, 난 버스를 향해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뛰었다.
'언제 이렇게 멀리 왔지?'
나와 버스 사이에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뒤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난 내가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는지 몰랐다.
육상 선수를 할 걸 그랬나?
성희가 버스의 문을 열었다.
이제 한 십 미터 남았을까?
거의 다 왔다.
이제 조금만 더
그때 무언가가 내 팔과 다리를 잡았다.
끈적하고 물컹한 느낌이었다.
'아 시발'
그리고 난 공중으로 떠올랐다.
거의 다 왔는데, 버스에 탈 수 있었는데, 식구들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는데
난, 마치 번지 점프대에서 다시 허공에 올라가는 것처럼 그렇게 정체불명의 물컹한 다리에 잡혀 하늘을 날아다녔다.
멀리 아래로 초토화된 산이 보였다. 지나온 읍내의 모습도 살짝 보이는 것 같다.
버스의 모습도 보인다. 버스 지붕의 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그 안에 있는 식구들의 눈빛까지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지럽다. 속이 울렁거린다.
고개를 들었다. 아까 지나간 멧돼지와 못난이 괴물들의 무리가 멀리 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작은 도시가 하나 있었다.
아
거기는 우리가 가려고 했던 곳이다.
태백시
젠장, 아이들 데려다줘야 하는데
약속했는데
그때 내 손에 검이 그대로 들려있는 게 느껴졌다. 심한 공포감에 안간힘을 쓰며 검을 꼭 잡고 있었나 보다. 왼팔에 끼워놓은 방패도 느껴졌다.
하지만 이렇게 높은 곳에서 놈의 촉수를 잘라내면 난 떨어져 죽을 거다.
날 잡은 놈은 딱히 뭐와 닮았다고 비유하기가 어렵게 생겼다.
거대 거미의 진화 버전 같기도 했다. 하지만 키가 열 배는 더 커 보였다. 산 중턱에 서 있는데도 저 소름끼치는 촉수가 버스 근처까지 다가왔으니 엄청나게 큰 놈이다.
다리의 형태는 거미와 비슷했지만 네 개로 보였다. 아 촉수까지 합치면 여섯 개?
놈은 산의 계곡 사이에 긴 다리를 세워 중심을 잡은 채 긴 촉수로 날 하늘로 날리며 마치 재미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큰 놈을 못 봤지?
너무 어지럽다.
저기 멀리 버스가 보인다.
내가 없어도 잘 살 수 있겠지?
근데 저건 뭐지?
저 앞머리가 길게 내려온 저분은?
무릎식신이다.
"위험해!"
아무리 최강 무릎식신이라고 해도 이 초 거대 촉수 거미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성희 너라도 있어야 애들을 보살필 텐데
이거 왜 매일 목숨이 위험한 걸까?
이렇게 안전한 버스가 있는데도 대체 왜?
그때 아래서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릎 식신이 촉수 거미의 다리를 부수는 소리다.
갑자기 날 잡은 촉수가 바닥 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쪽 다리가 부서진 거미는 옆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덩달아 촉수에 잡힌 나도 아래로 향하고 있다.
젠장 이대로 떨어지면 죽는다.
난 산 중턱 부근에 큰 나무를 발견했다. 그리고 최대한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
난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집중했다. 이제서야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날 휘감은 촉수의 힘은 여전히 강했다. 하지만 중심을 잃은 녀석은 옆으로 쓰러지며 버둥거렸다. 그 덕에 난 더욱 빠른 속도로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큰 나무의 윗부분이 보인다.
지금이다.
난 검을 휘둘렀다. 날 잡은 촉수가 잘려 나갔다. 난 검을 던져버리고 나무의 윗부분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내 손에 작은 나뭇가지가 잡혔다. 하지만 이내 그 힘없는 가지는 부러졌다.
난 허공에 헛손질하며 그대로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 세상에 계획대로 되는 일이 얼마나 있겠어?
그래도 계획은 세웠잖아
누구에게나 원대한 계획은 있잖아?
하지만 처맞고 나서야 깨닫게 되지
말로 맞든, 몽둥이로 맞든, 돈으로 맞든, 닥친 현실로 처맞든
결심만 하면 다 될 거 같지?
근데 그건 시작일 뿐이야.
그다음에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수 있어
바로 내 눈앞에 다가오는 저 딱딱한 땅처럼
이제 곧 난 부서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되겠지?
아씨
내 바로 눈앞에 하필 또 작은 바위가 있어
이건 인형이 아니라 곤죽이 되겠는걸?
그런데 왜 그대로 있지?
왜 저 바위가 더 다가오지 않지?
난 고개를 돌렸다. 멀리 남매의 모습이 보인다. 저들은 빛의 바늘만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난 바닥에 떨어져 닿기 직전에 그렇게 공중에 멈췄다. 피가 거꾸로 급격히 쏠리는 느낌에 머리가 터질 듯 아팠다.
나의 그런 모습을 보고 성희도 놀라 멈췄고
다리가 두 개째 부서져 옆으로 쓰러진 초거대거미도 놀라 잠시 움직임을 멈춘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그 공간에서 괴물과 인간은 모두 잠깐 시간을 잊은 듯 멈췄고 그 어색한 정적을 깨트린 건 다름 아닌 무릎식신이었다.
그녀에게 크기 따윈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남은 다리도 모조리 부수더니 작은 승용차 크기인 놈의 머리를 찢어발기며 그 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초거대거미의 머리가 사방으로 산산이 조각나며 흩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엔 초록무릎식신이 서 있었다.
멋있다. 아니 좀 무섭다.
우리 식구들이 이렇게 무서운 존재였나?
"악!"
갑자기 머리가 번쩍하는 느낌이 들었다.
난 주먹 하나 들어갈 정도의 높이에서 바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이마에 약간의 혹이 난 거 말고는 괜찮았다.
멀리 아이들이 뛰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초록 괴물···. 성희가 서 있었다. 아 씨! 놀랬잖아.
"고···. 고맙다"
난 일어서려다 어지럼증에 휘청거렸다. 성희가 내 팔을 잡았다. 팔에서 끈적한 액체가 느껴졌다.
난 성희의 부축을 받으며 버스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아이들이 나에게 안겼다.
"괜찮으세요?"
성운이가 바닥에 떨어졌던 검을 건네주며 말했다. 작은 성희도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일단 들어가자. 또 뭐가 나올지 모르니"
우리가 버스로 향하는데 뒤쪽에서 엄청나게 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코르카 더미가 반짝이고 있었다. 열 개는 넘어 보였다.
버스가 때를 놓치지 않고 코르카를 전부 빨아들였다. 아까 잡은 서른 마리 정도의 거대 거미 코르카는 이미 다 주워 먹은 모양인지 보이지 않았다.
"중간 보스인가? 보스라기엔 약한데···."
성희가 째려본다.
"약하지 않았다."
그래, 내가 죽을 뻔했으니, 그리고 우리 식신 패밀리 전부가 나서야 했으니 약한 건 아니었다.
내 식구가 날 구했다. 내가 잠시 이상한 감정에 휩싸여 긴장을 늦췄을 때 위기가 닥쳤다.
그런데 아까 내가 느꼈던 감정은 묘한 만족감이었다. 검을 들고 놈들을 제거할 때마다 치솟는 그 중독성 강한 느낌
마치 나의 기억과 상관없이 오래도록 무언가에 이어져 온 그 느낌
우리는 버스로 돌아왔다. 문을 지나자 성희의 온몸을 덮고 있던 초록 액체는 전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초록 액체가 사라지긴 했으나 나와 성희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이미 넝마가 된 옷은 민망할 정도로 헤어져 있었고 이제 곧 바스러져 없어질 것만 같았다.
난 문득 허공에 떠 있을 때 봤던 괴물들의 움직임이 떠올랐다.
태백시
놈들은 모두 그곳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이기도 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좀 전에 죽을 뻔했던 나도 그리고 날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우리 식구들도 모두 동의하는 표정이었다.
"가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난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계기판을 보는데 이제야 코르카 게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145/1000]
많이 모은 것 같은데 아까 쉴드로 많이 까먹은 모양이다.
난 힘껏 악셀을 밟았다.
그때
룸미러 너머로
내 계획이 실패해도
날 지옥으로 떨어지게 두지 않았던 사람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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