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J1. 괴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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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갑자기 문을 열자 붙어있던 놈들이 문을 타고 올라와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방어막에 가로막혀 미끄러져 내려갔다. 난 놈들이 떨어지기 전에 바로 검을 휘둘렀다.
카악!
한 놈의 머리가 잘려 나갔다. 초록의 피가 다른 놈의 하얀 털을 초록으로 물들였다.
놈들은 우리의 방향을 읽고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버스로 달려들었다.
카악! 서겅!
또 한 놈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하지만 이 속도로 잡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다.
서너 마리의 목을 더 베어버리자 열린 문 근처로는 놈들이 접근하지 않았다.
'젠장 눈치 한번 빠르네!'
난 좌·우측 창문을 모두 열었다. 버스의 투명은 이미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다. 가능한 사방에서 달려드는 놈들을 제거해야 한다. 열린 창문의 크기는 작았지만, 놈들에게 검을 찔러넣기에는 충분했다.
"사거리 도착하면 넓은 곳에서 빠르게 돌아!"
버스로 바닥에 있는 놈들을 짓밟고 열려있는 문과 창문에 보이는 놈들을 베고 찌르는 단순한 전략이다.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성희에게 대시보드에서 남은 쉴드와 코르카를 봐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지금은 모르는 게 약일 거 같았다.
얼마 후 마침내 사거리에 도착했다. 성희는 마치 미리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능숙하게 버스를 빠르게 회전시키며 몰았다. 급격한 움직임에 아이들이 짧은 비명을 질렀으나 안전띠 덕분에 바닥으로 넘어지진 않았다.
슬쩍 남매의 얼굴을 봤는데 상황에 비해 표정이 아주 평온해 보였다. 오히려 작은 성희는 뭔가에 배신당한 표정이었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카악! 파직! 카악!
놈들은 끊임없이 버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깔려 터지고 검에 목이 계속 날아가고 있었으나 그 수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어?"
갑자기 운전석에서 성희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왜?"
"버스 속도가 더 나질 않아!"
"뭐?"
"계기판에 못 보던 경고등이 켜졌어!"
난 점점 버스의 속도가 느려지는 걸 느끼며 운전석으로 다가가 경고등을 확인했다.
[OVERHEAT]
"어? 엔진 버스도 아니고 뭐가 과열된 거지?"
과하게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구동계 쪽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이 거대한 덩치를 마치 스포츠카처럼 몰았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우리 버스가 보통 버스는 아니지 않나?
이 신기한 버스도 지구 물리법칙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나 보다.
버스는 속력이 더 줄어들더니 이내 멈췄다. 뭔진 몰라도 다시 식을 때까지는 움직일 수 없는 것 같다.
이제 버스로 놈들을 뭉갤 수 없다. 그리고 놈들은 열린 창과 문 쪽으로는 오지 않을 것이다.
놈들을 제거할 방법이 사라졌다.
어디선가 계속 합류하는지 놈들은 계속해서 버스에 달려들었고 쉴드와 코르카는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대시보드의 코르카 수치가 눈에 들어왔다.
[19/1000]
"젠장"
성희가 갑자기 운전석 창문을 열더니 그쪽으로 달려드는 놈들의 머리를 틀어쥐고 뜯어냈다.
나도 조수석 창문으로 스치는 놈들을 계속해서 검으로 찔렀다.
하지만 우리 둘만으로 상대하기에는 놈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난 다시 거실 쪽으로 움직여 옆문과 거실 창에 나타난 놈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계속되는 반복 동작으로 인해 팔과 어깨에 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왜 이런 버스가 있는데도 툭하면 위험에 빠질까?
요 며칠 너무 안심했나?
고작 덩굴을 대하는 괴물의 반응 정도를 알아보려 내려온 건데 이렇게 일이 커질 줄이야.
"코르카 10개 남았어!"
성희의 음성이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버스의 코르카가 다 떨어지고 나면 어떻게 될까?
아까 악마쥐에게 처참하게 찢겨나갔던 못난이와 꺽다리가 떠올랐다.
"으···. 으의"
그때 작은 성희가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옆에 앉아있던 성운이가 깜짝 놀라 동생의 팔을 잡았지만, 그 떨림은 멈추지 않고 더 심해졌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푹 숙였다.
"서···. 성희야?"
내가 놀라 작은 성희를 불러봤지만 움직임이 없었다.
성운이가 놀라 동생을 흔들었다.
"성희야! 일어나"
갑자기 아이가 고개를 확 쳐들었다.
"엇!"
작은 얼굴이 낯설었다. 안색은 창백했으며 눈에서는 흰자위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입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간 모습이 섬뜩했다.
그 순간 내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마치 그날처럼 그리고 버스가 진화할 때처럼 그렇게 갑자기 눈에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악!"
큰 성희와 성운이의 고통스러운 비명도 들렸다. 내 입에서는 비명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작은 성희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그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에너지에 눌려 난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정신이 몽롱했다. 그런데 아직 의식은 남아 있었다. 버스 진화 때처럼 그렇게 쉽게 기절하지는 않았다.
심하게 회전하는 놀이기구 안에서 눈을 감고 있는 것 같다. 엄청난 어지럼증에 토할 것 같았다.
작은 성희의 각성 능력인가? 대체 어떤?
어지럽고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궁금증은 더 크게 피어났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번쩍하고 번개가 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정신은 멀쩡했다. 그저 쓰러지면서 어딘가에 머리를 부딪혔는지 엄청난 통증이 이마에서 느껴졌다.
그러고는 캄캄했던 시야가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난 거실 바닥에 볼을 대고 쓰러져 있었다. 내 바로 앞에 성운이가 넘어져 있었다. 경련을 일으키던 동생을 살피느라 안전띠를 잠깐 풀었던 거 같다.
"괜찮아?"
"네"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바로 일어나지는 못했다. 나도 일어나려 근육에 힘을 줬지만, 온몸의 에너지가 다 소모된 듯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성희야?"
크고 작은 성희를 한 번에 동시에 불렀다.
"어···. 나는 괜찮아···."
운전석 쪽에서 큰 성희의 음성이 들려왔다. 성희도 아직 움직이지는 못하는 것 같다.
내가 눈을 돌리자 테이블 아래에 작은 성희의 다리가 보였다. 발을 꼼지락거리는 게 이질적으로 평온하게 보였다.
"코르카 게이지 보여?"
잠시 침묵이 흐르다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3"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물었다.
"아직도?"
침묵이 흘렀다. 그 짧은 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내 운전석에서 성희의 음성이 들렸다.
"어, 아직도 3"
휴! 정말 다행이다.
"아저씨 일어나요"
테이블 위에서 작은 성희가 날 불렀다. 성운이는 가까스로 일어서고 있었다.
아이의 작은 손이 내 머리에 닿자 갑자기 온몸에서 전기가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고통이 아니라 회복의 느낌이다.
다시 근육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시야도 더 또렷해졌다. 그리고 이내 난 내 힘으로 벌떡 일어섰다.
'또 다른 능력인가?'
치유? 기력 회복?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보다 우선 버스 주변의 악마쥐들이 어떻게 됐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어?"
주변에 있던 건물들이 보이지 않았다.
사거리에 있던 문구점도, 떡볶이집도, 또 다른 가게들도 전부 사라졌다.
마치 예전에 읍사무소 부근에서 본 것 같은 광경이다.
게다가 괴물의 움직임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징그럽게 끊임없이 모여들던 악마쥐들이 모두 시야에서 사라졌다.
난 운전석 쪽으로 가서 대시보드를 살폈다. 탐지 램프는 아예 꺼져있다.
운전석의 큰 성희는 아직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몸에 힘이 안 들어가"
그때 작은 성희가 운전석으로 다가와 큰 성희의 뺨에 앙증맞은 작은 손을 가져다 댔다.
"으···. 어···?"
큰 성희가 희한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일어났다.
"어···. 어떻게?"
"얘 각성 능력인가 봐."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선 성희는 밖의 풍경을 보고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도 저 광경을 기억할 것이다. 읍내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그녀 부모님의 가게가 있던 곳, 그 장소의 상태와 거의 같았다.
그녀는 버스 옆문을 열고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나도 검집을 둘러맨 후 방패를 챙겨 들고 따라나섰다.
그때보다 범위는 작아 보였다. 하지만 똑같은 원형이다.
떡볶이 가게는 반 정도가 칼로 깔끔하게 베어낸 것처럼 사라진 상태였다.
우리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뭔가 다른 시공간으로 흐르는 것 같은 절단면의 괴이한 모습은 예전에 봤던 것과 똑같았다.
"그···. 그럼"
성희가 말을 더듬었다. 왜 그러는지는 나도 점차 깨닫고 있었다.
우리가 읍사무소 방향으로 가기 전날 밤, 멀리서 엄청나게 많은 거미 괴물을 봤었다. 그런데 동트기 전에 놈들은 모두 사라졌다.
난 고개를 돌려 버스 안의 아이들을 살폈다. 거실에 앉아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작은 성희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성운이의 모습도 보였다.
저 남매의 능력을 몇 번 보긴 했지만 모두 둘이 함께 손을 맞잡고 보여준 능력이었다.
빛의 바늘로 날괴물을 몰살시켰고 거대 촉수 거미 때문에 하늘에서 떨어지던 나를 살려준 염동력 같은 힘도 있었다.
그런데 각자의 각성 능력은 아직 보여준 적이 없었다. 이번의 처음이다. 그런데 문득 더 무시무시한 뭔가가 있을 것 같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가 있던 버스를 중심으로 우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졌다. 괴물과 건물 전부
여기 있던 것들이 어떻게 된 건지는 알 방도가 없었다.
우리는 다시 버스로 걸어갔다.
버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작은 성희의 모습이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난 거실로 돌아와 아이에게 물었다.
"네가 무슨 일을 한 건지는 알아?"
작은 성희는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평소의 모습이다.
"뭘···. 해요?"
질문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닐 테고 아마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난 옆의 어두운 표정의 성운이에게 물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
성운이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고 보니 아무도 없던 자기네 집을 확인한 이후부터 성운이의 표정과 말투가 조금 변화된 것 같다. 표정이 없고 말이 길지 않았다.
이전에도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른스러운 태도를 보여서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그때와는 좀 달라진 느낌이다.
"너네 할아버지 댁 근처에서 비슷한 걸 봤어."
성운이는 잠시 날 빤히 바라보며 한동안 말이 없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날 밤에 자다 깼는데 성희가 안보였어요. 할아버지와 저는 성희 찾으러 나갔다가···."
"할아버지는 그때 다치신 거?"
"네···."
그때 작은 성희가 소리를 질렀다.
"분명히 엄마가 날 불렀단 말이야!"
성운이는 동생을 무거운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감정 없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아니라 괴물만 잔뜩 있었어."
난 놀라 물었다.
"그런데 괴물이 동생을 가만히 내버려 뒀다고?"
성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가 놀라셔서 성희에게 뛰어가셨는데···. 저는 무서워서 숨어있었어요."
성운이는 본인이 두려움에 떨며 동생에게 접근하지 못한 걸 내내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거 같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니다.
"그러다 동생이 좀 전처럼?"
성운이에게 물었지만 작은 성희가 끼어들며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왜요?"
작은 성희는 본인이 뭘 했는지 기억을 못 한다. 성운이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경험만 있을 뿐이다.
"알았다."
작은 성희는 정말 영문을 모르는 듯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귀여운 애들 다 어디 갔어요?"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난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슴에 담으며 버스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건물이 잘려져 사라진 부분의 경계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너머에서 하얀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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