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J1. 생존 선택
그의 얼굴은 구정물로 엉망이었고 우비는 반쯤 벗겨져 이미 온몸이 흠뻑 젖어있었다.
난 그가 안고 있던 학생을 받아 들고 옆의 벤치 시트에 눕혔다.
"담요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다행히 그들이 누워있는 테이블과 벤치 시트로는 비가 거의 들이치지 않았다. 바람이 약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더 가져올게."
성희가 아래로 다시 내려갔다.
퉁!
그 사이 메뚜기는 다시 튀어 올랐다. 아직 구할 수 있는 생존자가 더 있는 모양이었다.
'녀석 대단한데?'
버스 안에서 그저 안타깝게 지켜보기만 하며 여기까지 올라온 내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 감정 낭비를 하면 힘들어진다. 그건 의미 없는 일이다.
난 녀석이 사라진 어둠 속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아까 비명을 지르던 사람들을 전부 구할 수 있을까?'
나는 내심 그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일단 버스로만 데려오면 나도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번쩍!
꽈르릉!
"엇?"
벼락이 폐 연립 쪽으로 떨어졌다. 지대가 여기보다 낮은데 왜 저기로? 피뢰침 때문인가?
바로 눈앞에서 떨어지는 벼락을 며칠 새 자주 본다. 이런 경험도 처음이다.
번쩍!
"아 또?"
꽈르릉!
이번에는 산 정상 부근에 벼락이 떨어졌다. 그리고 거센 빗물은 아직도 약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벼락이 너무 치네?"
성희가 다시 올라와 학생을 덮어주며 말한다.
"우비 청년은?"
"다시 내려갔어."
"또?"
난 다시 시선을 산 아래쪽으로 옮겼다. 아까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느낌이다.
'괜찮을까?'
시간은 무심하게 계속 흘렀고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버스 조금만 이동해볼게, 여기 부탁해"
성희는 지붕에 누워있는 두 명의 생존자를 보살피며 남아있었고 나는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버스 왼쪽 창문 너머로 분지의 입구를 잠시 바라봤다. 물이 들이치면 그쪽으로 먼저 들어올 거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우측의 정상 쪽 숲으로 옮겼다.
'정 안되면 걸어서라도 올라야 하나'
하지만 그건 버스를 버린다는 이야기다.
난 긴 한숨을 쉬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피신시킬 수 있어도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난 고개를 돌려 뒤쪽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살폈다. 그때 나라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 일어났어?"
난 액정의 [추방] 버튼 근처에 손을 가져다 대고 물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좀 전에···. 어떻게 된 거예요?"
"긴 이야긴 나중에, 너 다쳐서 버스 안으로 데려왔고 홍수가 나서 여기 산 중턱으로 피신한 거야"
그녀는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듯 침대에서 걸어 나와 창밖을 살폈다.
"이미 물에 거의 잠겼어, 그런데 여기도 곧 잠길 거 같아, 여차하면 너는 할아버지 업고 산 위로 뛰어"
그녀는 침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할아버지는 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난 악셀을 밟고 핸들을 좌측으로 조금 돌렸다. 버스는 천천히 분지의 입구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만···.'
선택의 순간이 언제 닥칠지 모르니 미리 마음의 준비는 해둬야 했다.
버스의 조명 빛은 강한 폭우 속을 뚫어내지 못했다. 시야가 너무 좋지 않다. 앞 유리 와이퍼가 부서질 정도로 거칠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저러다 날아가 버릴 것 같다.'
그나마 앞 유리는 와이퍼라도 있지만 측면은 그것마저도 없다. 칠흑 같은 어둠의 빗속에서 밖을 살피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난 입구에 버스를 중간쯤 걸쳐놓고 액정의 투명 버튼을 눌러 끈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괜찮은 거지?"
내가 묻자 나라는 붕대가 감겨있는 배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런 거 같아요···. 어떻게?"
"이야기가 길다. 나중에"
난 지붕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위로 오르려다 잠시 멈추고 그녀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잘 살피고 있어"
다시 지붕에 오르니 벤치 시트에 중년 여성과 학생이 같이 담요를 덮고 앉아 있었다. 아까도 정신을 잃은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마워요! 정말!"
그녀는 옆의 학생을 꼭 껴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들이래, 중학생"
성희의 설명에 난 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그 청년이 구한 겁니다. 버스 안에는 사정이 있어 못 들어오는 거 양해 부탁합니다."
'내 말투가 메뚜기를 닮아 가는 거 같다.'
내가 어색하게 말하자 성희가 끼어든다.
"설명 대충 해드렸어"
"알았어, 아참 나라 깼다."
"그래? 괜찮을까?"
난 팔의 휴대 액정을 흔들어 보였다. 그녀가 딴맘 같은 건 먹지 않을 것 같긴 했지만, 또 모를 일이라 언제든 [추방] 버튼은 누를 수 있어야 한다.
"잠깐 내려갔다 올게."
그녀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인 후 앞쪽의 포탑 위로 올라가 산 아래를 살폈다. 눈에 보이는 건 없었다.
산 아래에서는 빗소리와 함께 시끄러운 물결 소리도 들려왔다. 물이 이렇게 무섭기는 또 처음이다.
메뚜기 청년은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다.
걱정이었다.
생존자가 더 있었는데 구하지 못했을까 봐
그 청년이 거센 물살에 휩쓸렸을까 봐
만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는 곤충···. 아니, 사람을 다 걱정하다니 오늘은 참 이상한 날이다.
그때 입구 근처에서 뭐가 출렁거리는 게 보였다.
'설마?'
흙탕물이다. 어느새 분지 입구까지 물이 차올랐다. 그러면 저 아래 폐 연립 건물은 이미 깊게 잠겼다는 이야기다.
'젠장'
메뚜기의 생사를 알 수 없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도 알 수 없었다.
난 급하게 버스 안으로 내려갔다.
성희가 나라에게 물을 건네주고 있었다. 전자레인지에는 뭔가가 돌아가고 있었다.
"지붕에 사람들 떨고 있어서 찜질팩이라도 데워 주려고"
마트에서 그런 건 또 언제 챙겼나 싶었다.
"아무래도 산 위로 피신해야 할 거 같아"
성희는 당황한 표정으로 잠시 날 바라봤다.
"너는? 그리고···."
성희는 아직 의식이 없는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나라가 업고 뛰고 지붕의 생존자들은 걸을 수 있으니 성희가 부축하고"
내가 설명하는데 둘의 시선이 창밖에 가 있다. 그리고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느···. 늦은 거 같아"
성희의 떨리는 음성에 급하게 나도 창밖을 살폈다.
"어? 벌써?"
이미 버스 옆 창문에 조명에 비친 갈색의 흙탕물이 보였다.
저 정도 수위라면 걸어서 물을 건너긴 힘들 거다. 금세 물살에 휘말릴 수 있다. 게다가 버스의 조명 범위를 벗어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물이 이렇게 순식간에 들이칠 줄은 정말 몰랐다.
난 급히 운전석으로 가서 악셀을 밟았다. 분지도 살짝 경사가 있었고 정상 방향 끄트머리까지 가면 나무에라도 매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악셀을 밟으니 버스 바퀴가 물속에서 허망하게 도는 진동이 느껴졌다. 그런데 버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 역시···.'
그때 버스 계기판이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천천히 깜박이기 시작했다.
'젠장'
어차피 나는 버스에 남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을 미리 피신시키지 못했다. 좀 더 일찍 움직였어야 했다.
"물은 안으로 안 들어와요."
나라가 물을 마시며 물 이야기를 한다. 나도 운전석 옆 창문을 확인했다. 물의 수위는 아까보다 더 올라와 창문의 삼분의 일 정도까지 올라왔다.
그런데도 버스 안에는 물이 한 방울도 흘러들어오지 않았다. 비를 맞은 내 몸에서 떨어진 빗방울뿐이다.
"방수?"
갑자기 작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내 그 안도감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지붕에 있는 사람들은···."
팍!
성희의 걱정스러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버스의 모든 조명이 꺼졌다.
"엇!"
갑자기 찾아온 어둠에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버스의 조명이 꺼지자 안이건 밖이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붕에서 모자의 비명이 다시 들려왔다. 그리고 지겨운 물살과 빗소리가 마치 죽음의 연주처럼 무겁게 머릿속에서 웅얼거렸다.
전자레인지도 멈췄고 액정의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버스의 전원이 전부 차단된 것 같았다.
"진우야 너 팔에···."
성희의 말에 정신을 차리니 팔에 부착한 휴대 액정에서 작은 버튼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생존 선택]
"이게 뭐지?"
하지만 그게 뭐든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 버튼을 누르는 것뿐이다.
<공격 장비를 소모하고 생존 선택 진화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생존 선택이 뭐지? 그리고 공격 장비라면?'
포탑이다.
난 잠시 멈칫했다.
그런데 버스 망가지고 다 죽으면 포탑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난 바로 [예]를 눌렀다.
파지지직!
갑자기 버스 전체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개 같은 환한 불빛이 심하게 번쩍거렸다.
버스 진화 때보다는 덜 밝은 빛이었고 지속 시간이 짧은 대신 심하게 번쩍거렸다.
우우우우웅!
버스 전체에서 엄청난 초저음의 진동이 느껴졌다.
그 진동에 우리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버스가 좌우로 심하게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윽!"
버스가 너무 심하게 흔들려 우리는 모두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난 간신히 테이블을 부여잡고 벤치 시트에 앉아 창밖을 살폈다.
파팍!
그때 버스의 조명이 들어왔다.
윙~~
동시에 익숙한 기계음이 잠시 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그러자 다시 거친 물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수위가 낮아졌어!"
성희와 나라가 자리에 앉으며 소리치자 내가 말했다.
"아니, 버스가 떠오른 거야"
난 창밖을 살피며 운전석으로 걸어가 앉았다. 대시보드와 계기판은 이전과 그다지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어?"
대시보드의 계기판 옆에 작은 레이더 같은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용도를 알 수 없는 여러 숫자가 표시되고 있었다.
'뭐지?'
물 위에 떠 있는 버스는 강한 물결에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수위는 여전히 조금씩 오르고 있었고 그 때문에 버스에서 보이는 시선도 계속 높아지고 있었다.
아무리 동네 야산이라고 하지만 여기까지 물이 이렇게 들이차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속이 울렁거리는 걸 애써 참으며 창밖을 살폈다. 버스가 생존 선택으로 옆그레이드를 했다고 해도 밖의 상황이 바뀐 건 아니다. 그때 나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산 위에 뭐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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