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흰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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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소리가 섞여 있는 노인의 음성이다. 낯설었지만 그 느낌이 묘하게 익숙했다. 섬뜩한 기운, 내 심연에 묵혀있던 공포와 분노를 깨우는 기분
난 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틀어쥐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시커먼 안개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최대한 다른 감각에 집중했다.
"여전하군."
다시 저 음성을 들으니 낯선 느낌은 어느새 사라지고 문득 한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목소리의 진원이 어디인지 파악하는 건 쉽지 않았다.
"마시울이냐?"
내가 묻자, 그의 쉰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어지럽게 들려왔다.
"허허허"
목소리가 변했어도 귀에 거슬리는 건 여전했다.
"닥쳐라! 짜증 나니까"
내 말에 그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그리고 내 주변으로 차가운 냉기가 모이는 게 느껴졌다.
놈의 살기다.
난 눈을 감고 그 흐름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서늘한 살기가 내 몸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으로 넘어오고 나서 내 몸의 변화를 엄청나게 느끼고 있다. 그중에 가장 큰 건 이 변화를 이질적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거다.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나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를 도발하는 듯한 그 살기의 흐름은 내 몸을 한 바퀴 휘감은 후 내 팔을 지나 내 손 근처에까지 다다랐다.
그러다 마침내 그 살기가 검의 손잡이에 닿았다. 순간 내 검에서 묵직한 진동이 일더니 검면에서 푸른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놈의 살기를 순식간에 휘감고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날아갔다.
지척이다. 난 바로 검을 휘둘렀다.
휙!
검에 무언가가 닿았다.
깡!
마치 단단한 바위나 금속을 때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소리는 동굴 안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고 그 반동에 아까 부러졌던 팔목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시발 놀래라"
순간 바로 이동한 듯 놈의 목소리가 전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동굴 안쪽이다.
"성희는?"
난 차분한 목소리로 물은 뒤 놈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내달렸다.
쉬이이익!
그때 묵직한 에너지가 빠르게 다가오는 게 느껴져 간신히 몸을 피했다.
내 바로 옆으로 놈이 스치고 지나갔고 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검을 내질렀다.
"끅"
이번엔 검에서 물컹한 살이 베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놈의 움직임이 흐트러지는 게 확연히 보였다.
난 균형을 잃은 놈을 향해 다시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놈은 간신히 내 검을 피하며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러더니 다시 동굴을 울리는 놈의 역겨운 음성이 어지럽게 들려왔다.
"그 영감탱이 이유가 있었군."
놈이 말하는 그가 누구인지 안다. 하지만 놈에게 애원하며 할아버지에 관해 묻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할아버지에게 원대한 계획과 이유가 있을 거라 믿고 싶었다.
저 짜증 나는 마시울 같은 놈에게 이 모든 사태와 나의 인생에 결정적인 단서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혹여 그 모든 실마리가 저놈에게 있다고 한들 나는 차라리 무지를 택할 거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난 놈의 기운과 살기와 숨소리를 느끼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때 갑자기 날카로운 주파수가 내 청각세포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이이
마치 괴물의 괴성 같은 소리다.
"괴물 새끼 맞네"
난 태연한 척 차분한 목소리로 놈을 도발했지만 내 청각세포를 타고 들어오는 놈의 날카로운 괴성은 이미 내 온몸의 신경을 뒤흔들고 있었다.
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은 두통에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온몸에서 강한 전류가 흐르는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끄윽"
난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내 마음속은 오직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으로만 가득 찼다.
"끄아아아아 끄억"
순간 갑자기 거짓말처럼 고통이 사라졌다. 참기 힘들었던 엄청난 고통이 급격히 사라지자, 그 역치로 갑자기 속이 끓어오르며 심한 메스꺼움이 느껴졌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놈의 무심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끄윽"
바닥을 보며 연신 헛구역질하는 와중에 놈은 짜증 나게 평온한 발걸음으로 걸어오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 시간으로 백 년쯤인가?"
난 온몸의 신경에 아직도 남아있는 찌릿한 느낌을 애써 참으며 간신히 고개를 들고 놈을 노려봤다.
"백 년이라고?"
좀 전에 성운이에게 십 년이 넘은 세월을 들었을 때도 충격이었는데 놈은 마치 농담 같은 어이없는 세월을 말하고 있다.
순간 흐렸던 시야가 돌아오며 놈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놈은 이제 파란 머리가 아니었다. 오래도록 자르지 않은 듯한 긴 머리칼은 새하얀 백발이 되어있었다.
드문드문 파란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는 건 아니지만 놈은 완연한 백발이었다. 눈썹까지 새하얗게 변해 있으니, 마치 깊은 산 속에서 튀어나온 신선의 모습이다. 미치광이 신선이랄까
"그놈 때문에 내가 버린 시간이···. 어디 있나? 네 친구 놈"
태형을 말하는 것 같다. 나도 어디 있는지 정말 알고 싶다.
"근처에서 너 잡으려고 대기 중이다."
내 비아냥에 놈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긴 수염이 바람에 흩날리자 정말 산속에서 튀어나온 산신령 같은 느낌이다.
"내가 왜 널 살려둔 줄 아나?"
난 몸의 상태가 조금씩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힘든 척 바닥에 앉은 채로 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못 죽이니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난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놈의 강한 살기가 내 숨통으로 집중된 기분이다.
"끄윽"
숨이 턱 끝까지 막히고 시야가 시커멓게 변할 때쯤 다시 놈의 살기가 사라졌다.
"커헉, 콜록콜록"
난 실눈을 뜨고 기침하면서도 놈의 움직임과 음성의 파동을 기억했다. 놈은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내 눈앞에 보이는 저놈은 그저 형상이다.
놈의 형상과 음성은 특정 장소에 있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사방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파동에는 반드시 중심이 있다. 아직 그게 어디인지 알아내진 못했지만 적어도 놈의 변화 패턴은 점점 나에게 읽혀 기억되고 있었다.
단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 태연한 척 놈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성희는?"
그러자 놈은 고개를 돌려 동굴 벽면의 움푹 파인 부분을 바라봤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운이 없었지"
"뭐?"
놈의 움직임이 또 변했다. 내가 바라보던 그 장소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움푹 파인 벽면 옆으로 이동했다. 아니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발 이거 여는 데 백 년 걸렸다니까"
"뭔 소리야?"
"그런데 하필 그때 문 앞에 있더라고"
"뭐?"
마시울은 내가 이제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는지 주변을 휘저어 놓은 에너지의 흐름을 늦추기 시작했다.
아까는 동굴 안에 놈의 위치가 수천 개였다면 지금은 수십 개 정도의 느낌만 들었다. 놈이 긴장을 푸는 건지 아니면 너무 늙어 예전만 못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설마, 성희가 네가 있던 곳으로?"
난 놈의 패턴을 읽는 데 집중하며 놈의 말을 귓등으로 듣다가 문득 머리에 번개가 치는 느낌이 들었다.
"어"
마시울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난 순간 말문이 막혔다.
'성희가···?'
난 잠시 지금 내가 마주한 현실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나는 살면서 큰 상실감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다.
할아버지가 사라졌을 때는 그저 어딘가에 계실 거라 믿었다. 그래서 그때 느꼈던 건 상실감보다는 배신감 같은 거였다.
그러고 보면 나의 첫 상실감도 그녀였다.
어렸을 때 갑자기 그녀가 이사 가버린 것
그리고 나머지 단짝 친구인 희성이도 떠나버린 것
나에겐 아무도 없었다.
세상이 멸망하고 나서야 다시 나에게 식구가 생겼다.
그런데 오늘 또 사라졌다.
식구였다고 생각했던 성운이와 작은 성희도
나와 생사를 같이했던 나의 첫 상실감의 그녀도
순간 검의 손잡이를 부숴버릴 듯한 힘이 내 손에 모이기 시작했다.
"끄으으으으"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긍정적인 징조가 아니다.
난 눈을 감았다.
그녀는 죽은 게 아니다. 단지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공간으로 이동한 것일 뿐
그곳이 어디인지는 저놈에게 묻고 싶지 않다. 단지 저놈이 백 년을 무사히 살았다면 그녀도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차라리 거기가 나을 수도 있다.
분노를 식혀야 한다. 저놈이 원하는 진창으로 알아서 내가 걸어 들어가면 안 된다.
어차피 멸망한 세상, 그녀가 그곳에서 또 다른 삶을 잘 살았으면 좋겠다.
아까 인사라도 할걸, 악수라도, 아니 작은 이별의 포옹이라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어이없이 헤어질 줄 알았다면
밥이라도 한 번 더 같이 먹을걸
내 상념이 우스웠는지 마시울의 역겨운 비웃음의 숨결이 내 정수리에서 느껴졌다.
놈은 완전히 날 무시한 채 내 코앞까지 다가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고개를 들지 않고 놈의 숨소리와 음성의 파동 패턴만 계속 기억했다.
그러다 문득 왜 이러고 있는지 허탈감이 몰려왔다.
동굴에 올라온 건 성희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녀는 이제 여기 없다.
날 기다리고 있는 건 여태 날 왜 살려둔 건지 알 수 없는 저 역겨운 놈뿐이다.
이제 정말 궁금했다.
"왜 날 살려둔 거지?"
놈의 콧김이 거북했지만 그런 역겨움 따위는 지금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놈은 시뻘건 눈으로 날 내려다보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버스를 회수하려면 네가 살아있어야 하거든."
난 무심하게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지금도 날 죽일 수 없다는 거네"
놈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는 순간 난 그대로 온 힘을 다해 일어섰다.
콰직!
내 정수리에 쇠공이 부딪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대로 내 머리가 박살 나는 느낌이었지만 정말 그렇게 되진 않았다.
"뭐야 고딩도 아니고!"
놈은 순간적으로 번쩍이며 동굴 입구 쪽으로 이동하더니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두 손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아까 그 괴이한 괴성을 지를 때의 동작이다.
그 순간 갑자기 역겨운 파동의 시작 지점이 느껴졌다. 저놈의 진짜 위치는 완전 반대편 어두운 동굴 안쪽이다.
난 등에서 활과 화살을 동시에 빼서 시위에 걸고 바로 놈에게 쐈다. 이 동작은 놈의 기이한 괴성이 들려오기 직전에 이미 끝났다.
휙
끼이이이이이
날아가는 화살촉에 두 가지를 담았다. 하나는 놈의 미간, 또 하나는 파란 불꽃
쉬이익
멀지 않은 곳에 놈이 있었지만, 화살은 아주 느리게 날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느낌이 아니다.
놈이 다시 시간을 비틀기 시작한 거다.
그 순간 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놈의 비틀어진 흐름을 파고들었다. 그 속으로 내 흐름의 줄기를 만들었다.
꽈지직!
그런 소리가 났다. 두 흐름이 비틀리며 충돌해 만들어 낸 충격파가 주변을 뒤흔들었다.
쾅!
근처의 동굴 벽과 바닥이 비틀리며 깨져나갔다. 그런데 그사이를 화살은 흔들림 없이 묵묵히 뚫고 끝까지 날아갔다.
화살이 놈의 미간 사이에 거의 다다랐을 때 마침내 파란 불꽃이 일었다. 그리고 놈의 시뻘건 눈이 순간 가운데로 모였다.
놈의 눈에 파란 불꽃이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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