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J1. 생존자
난 버스로 천천히 접근했다. 하지만 잔해가 복잡하게 쌓여있어 눈에 쉽게 보이지 않았다.
난 버스를 멈추고 계속 잔해 방향을 지켜봤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식신도 배고플 텐데'
읍내 중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난 거실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배가 고픈데 입맛이 없었다. 난 바나나 하나를 꺼내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엇?'
그때 잔해 틈 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소년이었다.
버스를 못 보는 것 같은 움직임이다. 소년은 주변을 경계하며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난 천천히 버스를 움직여 소년을 따라갔다.
아이들 나이는 어림으로 짐작하기가 참 어려웠지만 많아 봐야 초등학교 저학년이다.
저 어린아이가 왜 이렇게 위험한 거리를 혼자 다니는 걸까? 먹을 걸 구하려고?
우두둑
그때 버스에 밟힌 잔해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소년은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연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속도가 그리 빠르진 않았다. 며칠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힘이 없어 보였다.
소년은 사거리 오른쪽으로 돌아 사라졌다. 나도 버스를 우회전해서 따라갔다.
그런데 소년이 보이지 않았다.
난 버스를 세우고 주변을 천천히 살폈다. 그때 버스 오른편에서 거의 무너지지 않은 단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 셔터 아래가 약간 열려있었다.
난 고민에 빠졌다.
저 소년은 저대로 두면 얼마 버티지 못할 거다. 그런데 버스를 보지 못하는 걸 봐서는 각성자도 아니어서 버스에 태워줄 수도 없었다.
'오지랖인가'
난 거실로 가서 생수와 바나나 그리고 즉석밥과 통조림 등을 비닐에 담았다. 그거라도 해주고 싶었다. 어린이가 굶는 건 마음 아픈 일이다.
난 버스를 건물 옆 가까이 주차해놓고 주변을 살핀 후 비닐봉지와 검을 꼭 쥐고 버스에서 내렸다.
언제든 다시 버스로 들어올 수 있게 옆문도 그대로 열어두고는 건물로 다가가 셔터 아래로 기어서 들어갔다.
안은 어두웠다. 그리고 조용했다.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소년의 숨소리가 아니다.
갑자기 라이터 켜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내가 본건 하얀 수염이다.
라이터가 꺼졌다.
'젠장'
다시 라이터가 켜졌다. 하얀 수염의 노인이다. 그가 무엇을 들고 있는지 그때 알아챌 수 있었다.
그건 장총이었다. 종류는 모르겠다. 다시 불이 꺼졌다.
"누구냐!"
노인의 걸걸한 음성이다. 그의 뒤로 아직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아이의 존재가 느껴졌다.
"아이가 보여서 걱정됐어요. 총은 치우시죠"
노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당장 여기서 나가!"
그래 내가 무슨 오지랖인가, 걱정돼서 따라왔다가 위협이나 당하고, 젠장
"알겠어요. 총 치우세요. 나갈 테니"
난 짜증이 밀려와 다시 나가려고 엎드렸다. 그런데 그때 노인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헛구역질 소리도 들린다.
"할아버지!"
어린 여자아이의 외침도 들렸다.
난 셔터 아래를 잡고 위로 더 들어 올렸다. 반쯤 열린 셔터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그러자 어두웠던 실내가 한층 밝아졌다.
노인이 주저앉아서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아까 그 소년이 있었고 소년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가 할아버지의 팔을 꼭 붙잡고 있었다.
노인이 아직도 손에서 놓지 않는 총은 오래된 공기총처럼 보였다. 심하게 낡은 그 총은 아마 발사 따위는 되지 않았을 거 같다.
난 다가가서 노인의 상태를 살폈다. 입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괴물에 물리고 베인 거로 보이는 상처가 몸 곳곳에 보였다. 처절하게 손주들을 지키려고 발버둥 친 거 같았다.
노인은 가쁜 숨을 힘겹게 쉬면서도 날 노려보는 눈빛만은 여전히 살벌했다.
"저 한씨 카센터 손자예요."
내가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자 노인은 살벌한 눈빛에서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조금씩 바뀌었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 생각이 난 것처럼 물었다.
"아···. 카센터 손주?"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내 얼굴이 조금은 기억나는 듯했다.
그는 내가 들고 있는 검을 보면서 의아한 눈빛이었으나 물어볼 기력이 남아있지 않아 보였다.
"내···. 손주들···. 오늘···. 아들네가 오는 날인데···. 어떻게···."
대략 상황은 이해가 됐다. 평일에 일 때문에 어린아이들을 본가에 맡겨놓는 젊은 부부를 가끔 봤다. 주말에 와서 아이들과 지내고 주중에는 도시로 돈 벌러 나가는 사람들
"왜 혼자서 돌아다녔어? 위험하게"
난 소년에게 물었다. 아이는 꾸물거리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할아버지 약···. 구하러···."
난 더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오늘 엄마 오는 날인데···."
옆의 어린 여자아이의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상태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
'버스에만 탈 수 있으면 침대 치료가 가능한데'
난 고민하며 할아버지의 상태를 살폈다. 그때 그의 목에서 익숙한 게 보였다.
초록의 액체였다.
'아 젠장'
그 액체는 조금씩 할아버지의 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크윽"
갑자기 할아버지 눈이 뒤집혔다. 그리고 눈에는 흰자만 보이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 좁은 공간에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소음은 위험하다.
"쉿! 조용히!"
하지만 소용없었다. 할아버지의 경련은 더욱더 심해졌고 초록의 액체는 더 많이 흘러나와 할아버지의 온몸을 덮기 시작했다.
"시끄러워!"
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소년은 마침내 울음을 간신히 멈추더니 옆 여동생의 입도 막았다.
반쯤 열린 셔터 아래에 누군가의 다리가 보였다.
꺽다리다.
한 마리다.
난 바로 검을 그 다리에 휘둘렀다. 하지만 그 순간 다리는 사라졌다. 난 힘의 대상이 사라져 헛스윙을 세게 한 것처럼 팔에 통증이 일었다. 하지만 아픔을 느낄 틈은 없었다. 꺽다리는 어느새 건물 안에 들어와 있었다.
큰 키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허리와 목을 꺾고 있으니 정말 무슨 악령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바닥에서 경련을 일으키던 할아버지는 어느새 온몸이 초록 젤리로 뒤덮였다. 그리고 바로 경련은 사그라들었다.
'감염자군,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렸던가?'
난 눈앞 꺽다리의 움직임에 집중하며 검을 겨눴다. 그리고 갑자기 아이들 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등으로 아이들을 벽 쪽으로 밀었다. 놈이 나타날 공간 자체를 주지 않아야 시공간 왜곡 이동이 안 될 거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놈의 움직임 패턴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놈이 나타날 위치에 검을 먼저 들이밀었다.
꿰에에엑!
이놈의 비명은 좀 달랐다. 하지만 죽는 모습과 황당한 표정은 예전 그놈과 비슷했다.
놈은 그렇게 두 동강이 났다. 난 잠시 기다렸다.
회색의 연기 사이로 코르카 두 개가 반짝였다. 그러자 바로 문밖에 있던 버스가 흡수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어. 일단 여기서 나가자"
하지만 벽 쪽에 붙어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아이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괴물이 오면 다 죽어! 아빠 엄마 보고 싶지 않아?"
아이들은 마지못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아이들은 그의 곁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
와장창!
그때 안쪽에 검은 천으로 가려놓았던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천이 들썩였다. 움직임과 윤곽으로 볼 때 못난이다. 그런데 한둘이 아니다.
나 혼자 못난이 몇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어린아이가 둘이다.
"뛰어!"
난 셔터 밖으로 아이들의 손을 잡고 허리를 숙여 나왔다.
"버스가 보이니?"
소년은 이미 보이지 않는 걸 알고 있다. 난 여동생이라도 제발 보이길 바랐다.
'버···. 버스요?'
둘 다 비슷하게 중얼거렸다.
"젠장"
잠깐 뒤를 돌아보니 못난이 괴물의 움직임이 건물 안에서 엄청나게 보였다. 그리고 건물 옆과 위쪽에서도 못난이들이 나타났다.
나 혼자 잡기엔 너무 많다. 성희가 각성한다고 해도 저놈들을 전부 잡기 전에 깔려 죽을 것 같다.
난 아이들을 던지듯이 버스의 지붕 위에 올려놓았다.
"무···. 무서워"
여자아이가 울먹인다. 녀석들은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일 것이다. 남자아이는 이상한 현상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울진 않고 있었다.
난 버스 뒤쪽 사다리를 올라 아이들의 손을 지붕의 모서리 난간 쪽을 잡을 수 있게 옮겨주며 말했다
"꽉 잡고 가만히 엎드리고 있어 움직이면 떨어진다. 손 절대 놓지 말고"
난 버스의 지붕 출입구를 열고 운전석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지붕 문은 그대로 열어두고 악셀을 힘껏 밟았다.
와장창!
그때 옆 건물의 셔터가 부서지며 엄청나게 많은 못난이 괴물이 동시에 뛰쳐나왔다. 마치 거대한 바퀴벌레 떼가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버스가 움직이고 있었지만, 아직 속도가 높지 않았다. 지붕 위의 아이들을 발견한 못난이들은 바로 버스를 향해 뛰어들었다.
분명 놈들에게 버스는 보이지 않을 거고 아이들은 공중에 떠 있는 거처럼 보일 텐데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는 것 같았다. 못난이의 지능이 그 정도는 아닌가 보다.
뀌이이
그리고 버스에 매달린 못난이 몇 마리가 지붕 위로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젠장!"
난 버스를 거칠게 좌우로 움직였다. 아이들이 떨어질 위험이 더 컸지만,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사실 괴물이 버스 지붕으로 기어 올라갈 때쯤에 이미 내 마음은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버스를 세우고 지붕에 오르면 저 몇 마리 정도는 내가 해치울 수 있겠지만 그러면 지금 사이드미러로 보이는 엄청난 수의 못난이들이 바로 들이닥칠 거다.
그럼 나도 죽은 목숨이다.
어차피 구할 수 없었나?
내 오지랖의 결과가 결국 이거였나?
난 자괴감에 빠졌다. 이런 버스가 있는데도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아···."
퉁!
그때 지붕에서 둔탁한 충격음이 들렸다.
빡! 파직 빡! 파직
그리고 익숙한 소리가 열려있는 지붕 문을 통해 들려오기 시작했다.
'설마 돌아온 건가?'
내가 귀를 의심하며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녀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밟아!"
그녀가 맞았다. 난 악셀을 더욱 힘껏 밟았다. 버스의 사이드미러 너머로 시커먼 무리가 엄청나게 몰려오고 있는 게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안도감이 들었다.
속도가 올라가자 지붕 위에서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간만 부여잡고 버티고 있는 아이들은 정말 힘들 거다. 안타까웠지만 속도를 줄일 수는 없었다.
그나마 성희가 아이들을 살피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니 그녀가 다시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었다.
'잘 버텨야 할 텐데'
버스의 속도가 오르자 놈들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읍사무소의 원형 지역을 벗어나자 다시 무너진 잔해와 망가진 차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읍내만 좀 벗어나 국도로 접어들면 그나마 나을 것 같은데 읍내를 벗어나기도 쉽지 않았다.
다시 놈들이 버스 바로 뒤까지 바짝 따라붙었고 몇 마리는 다시 지붕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내 성희에 걸려 피떡이 되었다.
버스는 길 위의 각종 잔해들을 마구 밀고 부수며 전진했다. 그 때문에 버스의 쉴드도 계속 줄어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따금 달려드는 못난이 덕분에 코르카는 계속 충전되고 있다는 거였다.
그렇게 간신히 잔해들을 뚫고 읍내를 벗어나 국도로 접어들었다. 버스의 속도가 점점 높아지자 놈들은 우리를 따라오지 못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사이드미러로 놈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난 속도를 줄이지 않고 완전히 읍내 권역을 벗어났다. 국도에는 간간이 길가에 부서진 자동차들이 있을 뿐 속도를 내기에 어렵지 않았다.
이 근처는 내가 잘 아는 지역이다. 난 마을이 잘 보이는 높은 곳을 알고 있었다.
조금 더 달리자 등산로 입구 주차장이 보였다. 경치가 좋아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난 버스를 세워놓고 멀리 읍내를 살폈다. 검은 형체가 바퀴벌레처럼 바글바글했다.
'갑자기 저 많은 놈들이 어디서 나타난 거지?'
그런데 희한하게 놈들은 읍내 밖으로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읍사무소 주차장을 중심으로 한 원형의 안쪽에만 몰려있었다. 원형의 밖에 있던 놈들까지 그쪽으로 계속 몰려들고 있었다.
난 놈들이 더 이상 쫓아오지 않는 걸 확인한 후 버스 지붕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아이들은 모두 무사했다. 하지만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아직도 지붕의 작은 난간을 꼭 잡은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릴 힘도 남아있지 않은 듯 보였다.
난 아이들을 꼭 안고 있던 성희를 향해 말했다.
"고마워"
"발견해서 다행이야."
그녀는 잠시 날 바라보더니 아직도 난간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아이들의 손을 잡아줬다. 아직도 아이들은 손의 힘을 풀지 않고 있었다.
난 다가가서 아이들의 등을 토닥이며 물었다.
"저기 열린 문이 보이니?"
둘은 내가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 방법이 없나?'
그때 하늘에서 바람이 일었다. 그리고 지독한 냄새가 내 코를 스치고 지나갔다. 버스 지붕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한번 맡아본 냄새다. 동네의 언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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