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J1. 고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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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다가 따가운 햇살이 느껴져 다시 감았다. 강한 햇빛에 눈이 너무 부셨다.
다시 천천히 실눈을 뜨니 버스 지붕 바닥에 쓰러져있는 성희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지만 조금씩 몸을 움직이는 걸 보니 상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았다.
얼마나 정신을 잃은 건가?
해가 아직 중천이다. 다행히 그리 오래 기절한 건 아닌 듯하다.
난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켜 앉았다. 머릿속이 아직도 초저음으로 떨리는 기분이다.
나라와 할아버지도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난 그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숨은 쉬고 있다.
난 천천히 난간을 잡고 일어서 주변을 살폈다.
놈이 보이지 않는다.
엄청난 에너지의 초저음을 뿌려대던 그 괴물 같은 놈이 사라졌다.
'아니 괴물 같은 놈이 아니라 괴물이지'
정말 기괴했던 놈의 모습이 아직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떠올랐다. 마치 지구의 여러 동물을 분해해서 합쳐놓은 듯한 느낌이랄까
그리고 눈이 아주 검었다.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괴물의 눈이다.
"괜찮아?"
성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그녀는 이마를 만지며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
"쿨럭 이게 뭐여"
"그 새x 어디 갔어."
할아버지와 나라도 정신을 차렸는지 머리를 감싸 쥐며 일어났다. 모두 엄청난 두통에 시달린 듯했다.
"사라졌어"
내 말에 다들 버스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버스에 덤비다 터졌나?"
그럴 수도 있다. 난 지붕 테이블 옆에 있는 작은 액정을 살폈다.
[2926/3000]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50 정도 늘었다. 그런데 이 숫자는 막판에 목격한 세 마리의 중형급 수룡 괴물에게서 나온 코르카일 가능성이 크다.
"검은 눈 괴물이 터진 건 아닌 거 같다."
내가 중얼거리자 성희가 입을 열었다.
"그놈은 우리 말을 알아듣는 것 같이 행동했어, 섣불리 버스로 덤비지도 않았고"
난 버스 밖을 좀 살피다가 모두에게 말했다.
"일단 안으로 내려가시죠. 출발합시다."
우리는 모두 버스 안으로 들어왔다. 난 운전석에 앉아 액정을 다시 확인했다.
탐지는 0이다.
코르카는 2,926개, 이제 조금만 더 모으면 진화할 수 있다.
진화로 버스가 얼마나 변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보다 좀 더 다양한 보급품과 추가적인 기능은 분명 생길 거다.
지금은 탐지 숫자가 0인 게 오히려 아쉽게 느껴졌다. 조금만 더 모으면 되는데
"갈게요."
난 천천히 악셀을 밟았다. 하천의 물은 아까보다도 더 줄어 있었다.
하천 옆 도로를 따라 조금 달리니 다시 왼쪽에 왕복 6차선 다리가 나타났다. 국도로 계속 가려면 건너야 한다.
다리 위에는 진흙과 나뭇가지들이 각종 쓰레기와 함께 엉켜있었지만, 버스가 지나가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다리의 우측으로 큰 주차장이 보였는데 홍수에 떠밀린 차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그중에는 캠퍼 밴과 카라반도 있었다.
"화장실이 있는 주차장이네 차박러들이야"
나라의 말이다. 난 주차장을 살피다 다리를 건너 우측의 왕복 2차선 국도로 접어들었다.
도로는 진행하기에 나쁘지 않았다. 읍내를 조금 벗어나니 쓰레기들이 줄어들어 국도의 상태는 점점 양호해졌다.
도로 우측에는 계속 하천이 보였다. 그런데 수중 괴물들은 근처에 한 마리도 없는지 탐지는 계속 0이었다.
하천을 따라 국도가 계속 이어져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우리가 원래 가던 국도가 나타났다. 도계 2터널이 막히지 않았다면 어제 바로 진입했을 도로다.
난 진입로 오르막을 바로 올라갔다. 가다가 또 장애물이 나올 수도 있었지만 그건 시골길 우회로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큰 길이 나았다. 2터널만 뚫려있었더라면 이미 지나갔을 길이다.
"저 앞에"
눈이 좋은 나라의 말에 버스의 속도를 늦췄다.
"뭐지?"
도로 바닥에 시커먼 형체들이 수십 마리 널브러져 있었다.
"못난이?"
"멧돼지 괴물도 있는 거 같아"
좀 더 가까이 다가간 후 버스를 세우고 앞을 살폈다. 액정의 탐지 숫자는 0이다.
"전부 머리가 터져있어"
성희가 말했다. 기괴한 모습이다.
"대체 누가? 콜록"
또 다른 각성자일까? 하지만 각성자에게 죽으면 놈들은 연기로 사라지는데?
"다른 괴물에게 당한 거 같아, 사체가 남아있는 걸 보면"
그때 나라가 말릴 틈도 없이 버스 옆문으로 내려 주변 바닥을 살피기 시작했다.
"뭐가 보여?"
내가 옆 창문을 열고 묻자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진흙 발자국이 있어, 모양이 둥그런"
나도 궁금한 마음에 액정을 다시 확인한 후 버스에서 내려 쪼그리고 앉아있는 나라에게 다가갔다.
발이 둥근 생명체의 발자국이다.
그놈이다.
"여길 지나간 모양인데?"
나라가 우리가 가야 할 도로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쪽으로 간 거 같아"
우리는 일어서서 발자국이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놈이 괴물을 죽이고 있어"
내가 말하자 나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놈이 다른 괴물과 아주 다르더니···. 특히나 눈 색깔"
"너무 까맸지"
우리가 다시 버스로 들어오자 성희가 물었다.
"그놈 맞아?"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실해, 아까 다리에서도 수룡들 잡으려고 한 거 같기도 하고"
내 말에 성희가 잠깐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번에 기숙사 건물 기어 올라가던 못난이들 말이야."
그녀의 말에 나도 그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아 맞다! 그때 거대 수룡이 못난이들 잡아먹었었지?"
"수룡도 못난이 쪽을 싫어하나 본데"
"먹이로 좋아하는지도 모르지!"
괴물들도 전부 같은 편이 아니다. 지구 정글과 그리 다르지 않을 거다.
예전에 거대 이구아나와 악마쥐, 그리고 꺽다리 파의 난장판 싸움이 떠올랐다. 이분법적으로 딱 누구 편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혼돈 대잔치였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우리를 발견하고도 먼저 공격하지 않은 건 좀 전의 검은 눈 괴물뿐이었다.
거대 이구아나도 우리를 공격한 적은 없지만 그건 우리 존재를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다.
아까 검은 눈이 버스 위로 점프해서 지나갈 때 우리와 스쳤던 건 놈의 목적이 우리가 아니라 먼저 점프한 수룡 괴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난 버스를 천천히 출발시키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아깝네. 코르카"
난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는 괴물들의 시체를 버스로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버스가 흔들렸다. 괴물 시체의 물컹거림이 그대로 느껴져 찝찝한 기분이다.
조금 더 달리니 탁 트인 국도가 나타났다. 아까 중심 도로에서 다리를 하나 지나더니 지금은 하천이 도로 왼편에 있었다.
하천 너머 멀리 야산 위로 몇 마리의 날괴물이 보였다. 너무 멀어서 버스의 탐지에도 걸리지 않았다.
난 룸미러로 테이블 자리에 앉아있는 나라를 살폈다. 저 정도 거리의 날괴물은 괜찮은 거 같다.
국도변에 이따금 등장하는 식당이나 공장, 창고 건물들은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홍수의 거센 물살에 뜯겨 나간 게 대부분이었고 가끔 어떤 무거운 존재에 밟힌 것 같은 흔적도 보였다.
산 중턱에 있는 민가 건물들도 홍수의 물살을 피할 수 없었는지 뿌리째 뽑힌 나무가 창문을 뚫고 들어가 있었고 지붕은 떠내려갔는지 보이지 않는 집도 있었다.
"사람은커녕 괴물도 안 보이네"
한동안 달리면서도 아까 널브러진 괴물의 사체와 아주 멀리 날괴물 몇 마리를 본 거 말고는 생명체의 움직임을 발견할 수 없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꼬르륵
이건 내 배에서 난 소리인가? 아니면 성희?
내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전방주시"
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주 드물게 도로에 뒤집히거나 옆으로 누워있는 차량이 있을 수 있었다. 조심해야 한다.
옆으로 보이는 하천의 폭이 아까보다 훨씬 넓어졌다. 하류로 많이 내려온 모양이다.
그런데 도로가 조금씩 하천에서 멀어지더니 앞에 터널이 나타났다.
"또 터널이 있었나?"
이전에 몇 번 다닌 길인데 내비게이션에만 의지하고 별생각 없이 다녀서 그런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터널 입구를 막고 있는 차량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난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괜찮을까?"
성희의 말이다.
"지붕에 일반인도 없고, 중간에 막히면 다시 나오지 뭐"
난 테이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조용해서 뒤를 돌아봤다.
"음?"
할아버지는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고 나라도 테이블 자리에 엎드려서 자고 있다.
드르렁
이건 나라인가 할아버지인가?
앞에선 꼬르륵 뒤에서 드르렁이다. 허기와 졸음은 역시 피할 수 없는 건가?
난 다시 버스의 속도를 높였다.
"고사 1터널? 여기가 고사리였네"
내 말에 성희가 물었다.
"아는 곳이야?"
"아니,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던 거"
"고사리"
우리 버스는 바로 터널로 진입했다. 난 버스의 사방 조명을 모두 켰다.
"괴물 좀 나타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터널 안에서는 버스의 묵직한 소음만 울려 퍼질 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출구가 바로 나타났다.
"짧다. 아쉽네!"
"2터널도 있어"
출구를 나가자 약간의 외부 도로를 지난 후 바로 또다시 터널로 접어들었다.
"625미터라"
"평범해"
우리는 그렇게 다시 터널로 진입했다. 좀 전에 별일 없어서 그다지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는데 항상 그렇듯 기대나 걱정이 조금 사그라들 때면 마치 뻔하게 짜놓은 것 같은 상황이 나타난다. 바로 지금처럼
전방에 거대한 검은 형체가 보였다.
그런데 오히려 반가웠다. 코르카 기회다.
난 경적을 울리며 검은 형체에 접근했다. 그 소리에 테이블에서 졸던 나라가 깼는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터널인데, 뭐가 있어"
나라가 일어서더니 운전석 방향으로 다가와서 앞을 살폈다.
"저건···?"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우리는 놈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검은 눈이다.
그리고 놈의 곁에는 몇 마리의 못난이와 멧돼지 괴물이 널브러져 있었다. 놈들은 모두 움직임이 없었다.
내가 버스를 세우자 나라가 입을 열었다.
"숨을 쉬고 있어"
기괴하게 생긴 검은 눈의 배가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아직 살아있는 거 같아"
버스로 조금 더 다가가자 놈은 놀란 듯 조금씩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명에 비친 놈의 몸통을 보니 날카로운 칼에 베인 것 같은 상처가 많았다.
"못난이 발톱에 당한 건가?"
성희의 말에 난 조금 더 자세히 살폈다. 이전에 봤던 상처의 모습이다.
"꺽다리한테 당한 거 같은데?"
그런데 액정의 탐지 숫자는 여전히 0이다. 주변에 괴물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검은 눈은 탐지가 안 되지?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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