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J1. 오지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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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슬쩍 고개를 내밀고 건물 외벽을 살폈다. 어두워서 높은 외벽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일 층 입구 쪽에 작게 페인트로 칠한 부분이 보였다.
우리가 있는 곳은 101동이다. 105동으로 가려면 지상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야 한다.
"부모님은?"
소년은 경계의 눈빛으로 날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난 더 묻지 않고 그를 살폈다. 어쨌거나 부모가 있었다면 소년의 상태가 이렇게까지 처참하진 않았을 거다.
"넌 어느 쪽이야?"
어린 나이가 신뢰의 기준은 될 수 없었다.
소년은 내 말의 의미를 이미 이해하고 있는 듯 되묻지 않았다.
"천반장은 단지 사람 맞아요. 배신자"
난 녀석에게서 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탕!
그런데 이번에는 총탄이 우리 쪽으로 날아왔다. 녀석과 나의 위치가 노출된 모양이다.
'나라와 할아버지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난 화살을 하나 걸고 총성이 울렸던 쪽을 노려봤다. 하지만 이미 숨어 버려서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너무 어두웠다.
난 놈이 다시 총을 쏘길 기다리며 시위를 잡은 힘을 유지했다.
그런데 놈은 잠잠했다. 내가 활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난 105동 건물을 바라봤다. 저기로 가려면 지상 주차장을 가로질러야 한다. 그런데 엄폐물이 없다. 대놓고 뛰어가는 건 자살행위다.
시간이 다시 느리게 흘러주면 좋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괴물도, 도검류도 아니고 총알이다. 아까처럼 버스가 옆에 있어 바로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소년을 데리고 가야 한다. 녀석이 다시 숨어 버리면 소중한 정보원을 놓치게 된다.
내 고민을 알고 있는 듯 녀석이 입을 열었다.
"여기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가면 돼요."
하지만 여기 공동 현관도 지상 주차장을 지나야 갈 수 있다. 105동 저격수의 시야 범위 안에 있다.
"따라와라."
난 아파트 뒤편으로 향하는 외부 계단 담을 뛰어넘었다. 날 따라 소년도 뛰었다. 그 순간 다시 총성이 울렸지만, 벽을 맞고 튕겨 나갔다. 놈도 어두워서 제대로 조준하긴 힘들 거다.
마침 그 덕분에 총을 쏜 베란다를 제대로 목격했다. 11층 왼쪽에서 두 번째, 1102호다.
우리는 아파트 뒤편으로 가서 진입하기 좋은 창문을 찾았다. 마침 방범창이 없는 곳이 보였다.
"다 빈집이에요"
난 바로 검으로 창문을 깨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녀석의 손을 잡고 끌어올렸다.
집 안은 엉망이었다. 괴물의 흔적은 아니다. 약탈자가 제대로 물품을 털어간 느낌이다.
우리는 현관을 열고 몸을 숙여 중앙 계단 쪽으로 향했다.
"지하 주차장 상태는 어때?"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계단만 내려가면 바로 알게 될 일이다.
난 등에 활을 다시 메고 검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등 뒤에서 따라오는 녀석의 동태까지 살피며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어두웠다. 녀석이 길을 알려주지 않으면 내가 105동까지 접근하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앞장서라"
이미 녀석은 여기에 익숙해 보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이동했다. 녀석은 이미 만들어 놓은 표지가 있는 듯 뭔가를 계속 터치하며 걷고 있었다.
'윽!'
내 콧속으로 썩는 냄새가 훅하고 들어왔다. 아는 냄새다. 그때 터널에서 맡았던 그 냄새
난 숨을 애써 참으며 녀석의 발소리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그때 내 팔의 액정에서 불빛이 흘러나왔다.
'음?'
버튼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조명]
"오?"
내가 갑자기 소매를 걷고 팔을 보고 있자 소년은 걸음을 멈추고 놀란 표정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와! 그게 뭐예요?"
이제야 나이에 어울리는 표정과 말투가 나왔다.
"어, 내 장난감"
난 바로 [조명]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정말 아이들의 장난감처럼 내 팔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왔다. 마치 자동차의 전조등처럼 밝은 빛이다.
"가자"
감탄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난 녀석을 재촉하며 앞을 비췄다. 그런데 그때 내 시야에 냄새의 원인이 들어왔다.
시체의 산이었다.
난 온몸이 그대로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처참한 광경을 수도 없이 겪었지만 이건 또 스케일이 달랐다.
그러고 보니 소년에게서도 이 냄새가 났었다. 난 녀석이 제대로 씻지도 못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녀석은 그동안 여기에 숨어있었나 보다.
"이···. 이게···."
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서 있자 녀석이 다가오며 말했다.
"단지 분들이에요."
"아까 우리를 공격했던 사람들은?"
조명에 흐릿하게 비친 녀석의 눈에서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외지인요. 전부"
"뭐?"
녀석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대부분 다 죽였어요. 단지 사람들···. 거의 다"
내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다. 나는 아파트에 살던 사람 중에 일부가 강도단으로 돌변해 찾아오는 생존자들을 죽이고 털어먹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들은 전부 피해자였다.
"저는 여기 숨어서 살았어요. 그때 단지 사람들이 여기서 처형당하는 걸 봤어요."
이야기를 듣는 거만으로도 너무 힘이 들었다. 인간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가자"
녀석은 잠시 그렇게 불빛에 비친 시쳇더미를 바라보다 다시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우리는 105동 앞에 다다랐다.
"1102호에 저격수가 있어, 저놈 말고 더 있을까?"
녀석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강도들이 처음 단지에 왔을 때 총을 든 사람은 네 명이었어요."
한 명은 처음 블루건에 맞아 총을 떨어트리고 외벽에서 구조되어 숨었다.
나머지 한 명은 블루건에 맞아 죽고 거미가 잡아갔다.
1102호 저격수 말고 총을 가진 사람이 어딘가에 하나 더 숨어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처음 외벽에 매달렸던 놈을 구한 동료들도 어딘가로 숨어들었을 거다.
"생존자는 너뿐이야?"
녀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줌마와 아이들이 좀 있어요."
완전히 다 몰살시킨 건 아닌 모양이다.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
"그건 잘 몰라요. 102동이랑 104동 쪽에서 아이 우는 소리를 가끔 듣긴 했어요. 그리고 건너편 단지에도 있는 거 같아요."
우선 1102호부터 제거하고 차근차근 알아봐야겠다.
"내가 먼저 올라갈게."
난 팔의 조명을 끄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복도식 아파트에서 조명으로 내 위치를 까면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우리는 1층을 지나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3층에 도착했을 때 녀석에게 말했다.
"너희 집에 가서 기다려"
소년은 잠시 날 빤히 바라봤다.
"제가 뒤를 봐 드릴게요."
녀석은 집으로 가지 않았다. 난 완전히 소년을 믿을 순 없었지만 내 뒤에서 날 습격하는 건 녀석에게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난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11층에 다다르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난 애써 숨소리를 죽이며 계단에서 고개만 내밀고 복도를 살폈다.
당연히 현관문은 모두 닫혀 있었고 아마도 잠겨있을 거다.
"넌 여기 있어"
난 그를 계단에 남겨두고 천천히 1102호의 현관문으로 접근했다.
현관문 옆으로 작은방의 창문이 보였고 방범창이 있었다.
난 현관문에 귀를 바짝 대고 안의 소리에 집중했다.
- 그 새끼 어디로 간 거지?
- 101동 뒤로 가던데 도망간 건가?
- 놈들 버스 쪽에는 안 보이는데?
- 우리도 다시 이동해야 하는 거 아냐?
한 명이 아니다. 그런데 그때 건너편 다른 단지 쪽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악!"
그리고 잠시 후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놈들 다 잡았어! 쿨럭!"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위치는 아까 첫 포격 지점이다.
탕!
그때 총성이 울렸다. 그런데 지금 이 집이 아니라 반대편 단지다.
"난 괜찮다. 쿨럭!"
그러면 이제 여기 1102호 놈들을 잡으면 총잡이는 한 명 남는다.
그때 집 안에서 놈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시발! 다 죽었어! 우리 밖에 안 남았다고!
놈들이 잔당의 정보를 알아서 불고 있다. 난 진입 방법을 고민하다 그냥 문 앞에서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시간은 우리 편이다. 그리고 여기 놈들은 도망쳐야 한다는 걸 느꼈을 거다.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난 벽에 붙어 기다리고 있다가 뛰쳐나오는 놈의 손목부터 베었다. 손과 함께 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으아악!"
손이 잘린 채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은 놈 뒤로 따라 나오던 놈은 다시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난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놈의 발목도 반쯤 잘라냈다. 이제 놈은 위협이 되지 않을 거다.
바닥에서 총을 집어 들고 집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도망친 놈은 방으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나오면 살고 아니면 죽는다."
어디 영화에서 봤던 대사였었나? 왜 이렇게 유치한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지?
탕!
그때 집 안에서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내 가슴팍을 향해 날아오는 총알이 순간적으로 보였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나는 검으로 총알을 쳐냈다. 그리고 바로 총을 쏜 놈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놈의 팔은 그대로 잘려 붉은 선혈을 공중으로 흩뿌리며 날아갔다. 그리고 놈이 들고 있던 총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쩌면 다행이었다. 나머지 총잡이를 굳이 찾으러 가지 않아도 되니까
일타쌍피? 병살타?
두 놈이 한집에 있었다. 이런 비효율을 봤나!
아 원래 따로 있다가 한 놈이 여기로 합류했나 보다.
팔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나왔다. 굳이 내가 더 손을 댈 필요도 없었다. 나는 피 분수를 피해 바닥에서 총을 주워 든 후 현관으로 향했다.
복도에서 손목과 발목이 잘린 놈이 기어서 도망가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놈의 뒤를 따라 걸었다.
놈이 당도하는 곳에는 아마도 판결과 처형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걸 녀석에게 맡겨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폭력적인 복수로 마음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아이가 그걸 겪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녀석이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바로 앞에 닥칠 미래도 전혀 알지 못하고 안간힘을 쓰며 기어가고 있는 놈의 꿈틀거림을 바라보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상황은 어차피 흘러갈 거고 거기에 될 수 있으면 내가 개입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들의 인생이다.
소년의 인생이다.
멸망한 세상에서 줄여야 하는 건 매일 먹는 식량도 아니고 감정 소모도 아니다.
그건 오지랖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아파트 단지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계단 쪽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귀를 닫았다. 달빛에 비친 고요한 단지에 누군가의 분노가 조용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때 건너편 106동 옥상에 붉은 거미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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