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J1. 몰살
"한 번은 얼마 전 시골집에서"
그녀는 멀리 거대한 괴물의 형체에 시선을 두고 말을 이었다.
"또 한 번은···. 너는 모를 수도 있겠다."
난 도무지 어떤 이야기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음 말이 이어지길 기다리는데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괴물이 아까와 다른 것 같아"
성희의 입에서 나온 말을 난 순간 이해할 수 없었다.
"뭐라고?"
나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언덕 아래를 바라봤다. 어두워서 윤곽만 보였지만 거대한 덩치 괴물들의 모습이 아까와 좀 달라진 것 같긴 했다.
"어?"
저렇게 앙상했나? 그리고 괴성도 작은 움직임도 없는 게 마침내 그대로 죽어버린 것 같았다.
"여기서 잘 안 보이니 내려가 보자"
성희는 바로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도 같이 테이블을 정리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게 뭐야!"
지붕의 작은 액정에 표시된 탐지 숫자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 0 < 6459 < 0 ]
우리는 우측 조명을 끈 후 다급하게 지붕을 정리하고 버스 안으로 내려갔다.
아이들은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우리는 거실 테이블 옆에 있는 보조 액정의 수치를 재차 확인했다.
[ 0 < 6789 < 0 ]
이게 대체 뭔가? 게다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버스를 몰고 언덕 아래로 내려가려 했는데 저 공포스러운 숫자에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창밖을 다시 살펴봤으나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창밖에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저 정도 숫자의 괴물이 나타났다면 수많은 발소리와 괴성이 들려왔어야 한다. 그런데 너무 고요했다.
육천 마리가 넘는 괴물이 저 거대 괴물 근처에 있다고 수치가 나오는데도 멀리서 언뜻 보기에 언덕 아래는 참으로 평화롭게 느껴졌다.
"이상한데?"
멀리 앙상하게 변한 괴물을 자세히 바라보던 성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괴물을 뭐가 덮고 있어, 먼지 같은 게"
나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자세히 살폈다. 거대 괴물을 시커먼 무언가가 잔뜩 달라붙어 있는 게 시야에 조금씩 들어왔다.
"버···. 벌레?"
멀리서 어두운 밤에 맨눈으로 발견하기에는 너무 작은 크기였다. 흔한 바퀴벌레 정도?
"저 벌레가 뜯어 먹고 있는 거 같아"
나도 느끼고 있었지만, 성희의 말에 다시금 눈앞의 광경이 현실로 다가왔다. 이제 괴물 벌레라니
저 벌레들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혹시 괴식물의 몸에 저 벌레의 알이 있었나? 죽은 괴식물의 복수?
그저 내 상상일 뿐이지만 갑자기 나타난 저 벌레들을 설명하려면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거대 괴물도 저렇게 끝나네"
그런데 저 벌레들이 거대 괴수를 다 갉아먹고 나면 어디로 가게 될까?
난 근처의 빌라촌이 눈에 들어왔다.
"젠장"
성희도 내 표정을 읽었는지 묻지 않았다.
"포탑으로 한 번 시도해봐야겠어."
내가 운전석으로 향하자 성희는 침대에서 자는 아이들의 이불을 침대에 단단히 고정했다. 캠핑카 운행 중에 침대에 누워있으면 안 되지만 이 버스의 이불에는 침대에 고정할 수 있는 끈이 있다.
난 룸미러로 뒤쪽 상황을 확인한 후 버스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포탑의 사정거리까지만 갈 거야"
내 의중은 이미 성희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만나고 그리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건 아니지만 우리는 호흡이 무척이나 잘 맞고 있었다.
첫 만남에서 어색하고 불편함을 느끼긴 했지만, 어떤 인간관계도 적응할 시간은 필요하다. 특히나 이런 멸망한 세계에선 더더욱
난 어두운 내리막이 위험해서 전조등을 켤 수밖에 없었다. 저 괴물 벌레들이 빛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얼마 내려오지 않았는데도 교회 주차장이 금세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언덕 위에서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거대 괴물들의 처참한 상태가 전조등에 비쳐 그대로 시야에 들어왔다.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처참하게 뜯어먹혔을까? 피라냐에 뜯어먹힌 동물 사체 같은 모습이 저럴까?
괴물 벌레들은 아직 조금 남아있는 거대 이구아나의 살점을 서로 싸우며 경쟁하듯 여전히 뜯어먹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크기가 사람 손 정도는 되어 보였다.
[ 14 < 7683 < 0 ]
그런데 아직도 알에서 부화가 덜 끝난 걸까? 아니면 어디선가 몰려오고 있는 건가? 계속해서 수치는 늘어나고 있었다.
'어디선가 몰려오는 거면 원거리부터 늘어나야 하는데'
난 대략 삼십 미터쯤 거리에서 버스를 세웠다. 괴물 벌레들은 버스의 전조등에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저놈들 한 마리당 포탄 한 개가 날아가면 우리 코르카는 파산이다. 게다가 크기나 생긴 거로 볼 때 벌레 한 마리가 코르카 한 개를 떨어트릴 것 같지 않았다.
'일단 누르고 상황을 지켜보자'
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고민을 그대로 삼킨 채 바로 [자동 포격]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든든한 기계음이 지붕 쪽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삐이이이이이이
'어?'
조준 소리가 너무 오래 들린다. 역시 괴물 벌레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그런가?
삑! 삑! 삑! 삑!
조준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수천 마리를 전부 조준하고 있나? 저 소리가 언제···.'
하지만 삑 소리는 두어 번 더 나더니 이내 멈췄다. 그리고 잠시 후
텅! 텅! 텅! 텅! 텅! 텅!
총 여섯 개의 포탄이 발사되는 소리가 들렸다. 난 버스 밖으로 날아가는 여섯 개의 붉은 궤적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포탄들은 여섯 마리의 거대 괴물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이미 죽은 괴물들인데? 왜 저기로?'
그런데 자세히 보니 포탄은 거대 괴물의 몸에 붙어있는 괴물 벌레들의 중심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번쩍!
포탄이 그 중심에 닿자 마력이 터지는 것처럼 붉은빛이 사방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뭔가가 마구 터져나가는 소리도 아득하게 들려왔다.
파직 파직 파직
부서지며 터지는 게, 마치 벌레들이 전기 파리채에 닿으며 불타는 소리 같았다.
붉은빛은 그리 오래지 않아 꺼지고 그 자리에는 초록의 찐득한 액체가 사방에 퍼져 있었다. 거대 괴물의 앙상한 몸이 온통 초록 액체로 덮였다.
[ 12 < 37 < 0 ]
대시보드의 숫자가 확연히 줄었다. 단, 여섯 발로 수천 마리의 벌레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거의 다 잡았어."
성희도 벨트를 풀고 조수석으로 와서 거대 괴물들의 앙상한 사체가 있는 쪽을 자세히 관찰했다.
삐이익 삑, 텅! 슈욱
다시 한 발이 더 발사되었다.
파직!
그리고 남은 벌레들의 무리가 동시에 터져나갔다.
[ 14 < 1 < 0 ]
"아직 몇 마리 남았는데"
[ 15 < 0 < 0 ]
대시보드의 숫자는 살아남은 벌레들이 버스를 인지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놈들은 포탄이 발사된 지점을 눈치채고 버스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난 급히 [자동 포격]과 [자동 접촉 파괴] 버튼을 눌러서 껐다.
그리고 이내 버스의 창문에 그 흉측한 벌레들이 달라붙었다. 놈들에게 버스가 보이는지는 모르겠다.
흉측한 벌레의 징그러운 수십 개의 이빨은 그저 본능적으로 촉감이 느껴지는 물체를 무조건 뜯어먹으려 하는 것 같았다. 지능 따위는 없어 보인다.
난 [자동 접촉 파괴] 버튼을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 계기판의 코르카 수치를 확인했다.
[455/3000]
이것도 설마 한 마리당 코르카 한 개를 소모하진 않겠지? 좀 전에 포탄이 한 방에 쓸어버리는 걸 본 이상 비슷하게 동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해볼까?'
잠시 머뭇거리긴 했지만 결국 나는 [자동 접촉 파괴] 버튼을 눌렀다.
지이이이익, 파직!
버스에 들러붙어 있던 벌레 괴물들이 동시에 초록 액체를 퍼트리며 터져나갔다.
[454/3000]
'오호라?'
코르카 한 개가 소모되고 버스에 붙어있던 놈들이 전부 한꺼번에 터져나갔다.
[ 3 < 0 < 0 ]
탐지 숫자는 이제 3만 남았다. 버스에 닿지 않았던 놈들이 살아남은 것 같았다.
난 바로 [자동 접촉 파괴] 버튼을 눌러서 껐다. 세 마리에 코르카 한 개를 날릴 수는 없다.
"내가 살펴볼게."
갑자기 성희가 버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위험해!"
벌레 세 마리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 거대 괴물을 뜯어먹어 버린 놈들이다. 벌레라고 해도 괴물이다.
파직!
하지만 그런 내 걱정은 별 의미가 없었다. 이미 성희는 놈들을 발로 한 마리씩 밟아 으깨고 있었다.
파직! 파직!
그렇게 순식간에 남은 세 마리도 초록색 피떡이 되어 사라졌고 대시보드의 숫자는 다시 깔끔해졌다.
[ 0 < 0 < 0 ]
성희가 다시 버스로 들어오자 그녀의 신발에 붙어있던 초록의 괴물 피는 방어막에 걸러져 버스 아래로 모두 흘러내렸다.
"밟아보니 어때?"
"거대 바퀴벌레 같아"
괜히 물어봤다. 그냥 바퀴벌레도 괴물 같은데 괴물 바퀴벌레라니
난 다시 운전석으로 가서 버스를 출발시켰다. 눈앞에 점점 다가오는 거대 이구아나의 몰골은 참으로 처참했다.
이번 괴물들의 난장판에서 승자는 누구일까? 대부분 죽었고 일부는 싸우지도 않고 도망갔다.
끝까지 목숨을 부지하며 버틸 줄 알았던 거대 이구아나도 어이없게 벌레들에게 뜯어먹혔고 그놈들은 버스의 포탄 몇 발로 아작이 났다.
오후부터 지금 늦은 밤까지 이어진 그 전투는 그렇게 인간의 전쟁과 그리 다를 바 없는 모습과 결과로 끝이 났다.
난 다시 버스를 출발시켰다. 사이드미러로 거대하고 앙상한 괴물의 모습이 보였다. 이번에는 뭔가 덩치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나 했으나 아쉽게 오늘도 그저 누군가의 저녁 식사가 되고 말았다.
유민이네 빌라 건물 앞에 도착해서 주변을 살펴보니 생각보다 큰 피해는 없어 보였다.
버스의 투명 상태가 [ON] 인지 확인한 후 난 욕실로 향했다.
"샤워 좀 하고 나올게."
성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액정과 창밖을 번갈아 살폈다.
정말 긴 하루였다. 마지막 지붕 파티를 끝으로 오늘은 지나가나 싶었는데 최후에 나타난 벌레 괴물들 덕분에 끝까지 스펙터클한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런데 내가 뭘 본 건지는 모르겠다.
개운하게 샤워를 끝내고 나와 맥주 한 캔을 꺼내며 말했다.
"아까 말하다 만 거 말이야."
내가 이야길 꺼내자 성희가 흠칫 놀라며 날 바라본다.
톡! 톡!
그때 버스 옆문을 누가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유민이다. 손에 뭔가가 들려있었다.
"형, 애들 거요"
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유민이의 손에는 바비 인형 하나와 변신 로봇 장난감이 들려있었다.
"애들 일어나면 좋아하겠네. 고마워."
"제가 고맙죠. 애들이 저랑 많이 놀아줬거든요. 다시 만나니 좀 변한 것 같아서 어색하네요."
"세상이 그렇잖아"
"그러게요."
유민이는 버스 창으로 살짝 보이는 이층침대의 애들을 잠시 바라보다 집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형 그럼 주무세요."
"그래"
나도 버스로 돌아왔다. 그때 성희가 테이블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는 반찬 통이 놓여 있었다. 아까 열지 않았던 남은 하나의 반찬통이다.
그녀의 눈빛이 요동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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