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J1.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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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치 거대한 바다에 떠 있는 것 같았다.
고요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비가 갑자기 그치자 귀가 멍한 느낌이다.
이질적인 느낌 때문인지 모두 잠시 말을 잃은 듯 보였다.
"하아···."
사람들의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침 삼키는 소리와 기침 소리도 들린다.
청각은 어느새 고요함에 적응하고 있었다.
먼 곳에서 들리는 거친 강물 소리도 이제서야 귀에 들어왔다. 그런데 버스가 떠 있는 이곳은 이상하리만치 잔잔하다. 어디론가 조금씩 흐르고는 있지만 거센 물살은 아니었다.
버스 외벽에서 찰랑이는 물소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롭게 번지고 있었다.
문득 시냇물이 흐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근처 정상 쪽에서 흙탕물이 흘러 내려오는 소리였다.
'청소가 필요했나?'
온 세상을 청소한 것 같다. 괴물이든 사람이든 상관없이 다 쓸어버리고 싶었던 걸까?
난 시야가 좁아 답답한 마음에 테이블에 꽂혀있는 우산을 접었다. 굳이 뽑을 필요까지는 없이 앞으로 쭉 여기에 둬야겠다.
그때 나라의 음성이 들려왔다.
"별이다"
시선을 둘 곳 없던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 모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와!"
모두 자신만의 감탄사를 내뱉기 시작했다.
그새 먹구름이 모두 사라졌는지 밤하늘에는 온통 별빛이 가득했고 심지어 은하수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이런 하늘을 본 적이 있어?"
성희가 다가오며 물었다. 나는 숨이 막힐듯한 광경에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별이 쏟아진다는 말을 지금에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인간의 빛 공해가 모두 사라진 덕분에 칠흑 같은 밤을 매번 맞이했지만 이렇게 많은 별을 본 적은 없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빛이 흐리게 수면 위로 비치니 탁한 흙탕물인데도 묘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우주에서 유영하는 거 같아"
"와···."
사람들은 그저 조용히 감탄의 신음만 흘리고 있었고 그런 사람들의 상태가 의아한지 메뚜기는 오히려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저는 자주 보았습니다만"
감성적인 분위기를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는 있기 마련이다. 그 부류의 사람들은 이해만 못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이의 감성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알아"
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굳이 그의 설명을 더 듣지 않아도 전기가 부족했을 법한 녀석의 이북 생활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내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커플의 남자가 바로 앞의 아주머니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주머니도 같은 질문을 눈빛에 담아 시선을 나에게 옮겼다.
그러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쏠렸다.
웅성거림이 멈췄다.
그들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꼬르륵
마침 성희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늦었지만 저녁이나 먹죠"
지붕 위의 손님들은 그대로 내버려 두고 성희와 나는 버스로 내려왔다.
"어디 갔었어?"
할아버지가 침대에 그대로 누운 채 고개만 돌리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어떻게 된 거야?"
"이야기가 길어요."
성희와 나는 냉장고와 식량창고에서 음식을 계속 꺼냈다. 프라이팬에는 소고기와 소시지가 구워졌고 에어프라이어에는 삼겹살이 돌아갔다.
"뭐 도울 건 없어?"
나라가 내려와서 묻는다. 말을 놓고 편하게 이야기하니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것 같다.
"여기 음료들 좀 부탁해"
난 테이블 위의 생수병과 오렌지주스, 캔맥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매···. 맥주다!"
나라는 테이블에 올려진 캔맥주를 보더니 순식간에 테이블 앞까지 이동했다.
"시···. 원···. 해···."
그녀는 캔맥주를 마치 무슨 금덩이를 발견한 것처럼 소중히 들어 올리더니 간절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마셔"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캔을 부수듯 따더니 벌컥벌컥 마셨다.
"캬아~!"
'이거 뭔 맥주 광고도 아니고'
그녀는 쟁반에 음료와 과일을 가득 담아서 다시 지붕으로 올라갔고 난 즉석밥과 참치통조림, 그리고 조미김을 가지고 그녀를 따라 올랐다.
지붕으로 올라가니 의식이 없었던 여성이 일어나 남성에게 기대어 앉아 있었다. 다행이었다.
나라와 내가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데 아무도 먼저 손을 데는 사람이 없었다.
"이거···. 먹어도 돼요?"
아줌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오렌지주스와 바나나 한 개를 집어서 아들에게 건넨다.
"넉넉하니까 다들 많이 드세요."
"가···. 감사합니다."
커플의 남성은 인사를 하자마자 생수병을 집어 들고 따서 여성에게 건넸다. 그리고 본인은 사과를 하나 집어 들고 와작와작 씹어먹었다.
"어떻게 과일이···."
아주머니는 즉석밥과 김을 집어서 아들과 나누어 먹었고 커플은 바나나도 한 개씩 집어 들고 허겁지겁 먹었다.
"고맙습니다."
학생이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먹어, 음식 더 가져올 거야"
사람들은 테이블에 올려진 음식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감격하며 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지붕의 문이 열리더니 성희가 나타났다.
"이거 무슨 냄샙니까?"
즉석밥에 참치를 비벼서 맨손으로 먹고 있던 메뚜기가 행동을 멈추고 말했다. 역시 곤충들의 감각은 대단하다.
그리고 이내 지붕 위의 사람들이 모두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말문이 막힌 듯 모두 침묵에 빠졌다.
성희가 테이블에 내려놓은 큰 쟁반 위에는, 한우구이, 삼겹살, 소시지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잠시 그렇게 시간이 멈춘 듯 적막이 흘렀다. 버스 곁에서 찰랑이는 물소리만이 시간이 여전히 흐른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머···. 먹어도···."
커플의 남성이 침을 흘리며 물었다. 성희는 품에서 나무젓가락을 한 움큼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부족하면 말씀하세요."
사람들의 뜨거운 눈빛은 성희를 마치 하늘에서 음식을 내려주는 풍요의 여신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도 먼저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내가 먼저 나무젓가락을 가르고 소고기 한 점을 집어 들었다. 내 젓가락의 끝에 모두의 시선이 따라왔다.
젓가락에 잘 익은 고기가 집혔다. 나무 표면에 향긋한 기름이 묻었다.
미디움웰던 정도로 구워진 고기는 기름을 한두 방을 떨어트리며 내 입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드디어 내 입속으로 들어오기 직전 나는 보았다.
나에게 쏠린 시선들을
왜 이럴 때 또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을까?
이게 그렇게 진지하게 관찰할 일인가?
우리 한우 광고도 아니고
어쨌든
마침내 잘 익은 한우구이 한 점이 내 입속으로 들어왔다.
아직 식지 않았다. 굳이 씹을 필요도 없이 입속에서 그대로 녹아내렸다.
마치 포탑에 녹아내리던 괴물들처럼 그렇게
군중들은 기다렸다.
나의 한마디를
나는 자연스럽게 목으로 넘어가는 그 느낌까지 즐긴 후 검집에 꽂아놨던 병 하나를 꺼냈다.
병을 보자마자 성희가 품에서 종이컵 작은 버전을 꺼냈다. 저 품 안에는 대체 뭐가 더 들어있을까?
나는 컵에 소주를 조금 따랐다. 그리고 바로 입에 털어 넣었다. 아직 고기 육즙의 향기가 가시지 않았다.
그 타이밍은 적절했다.
이 모든 과정은 고작 10초도 걸리지 않았지만 마치 10분은 지난 거 같았다.
사람들은 아직도 나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
난 그들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 드시죠."
시간이 순식간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치 보트 투어라도 온 것 같은 분위기로 사람들은 밥과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술은 조금만"
내가 입을 열자 잠시 조용해지더니 이내 다시 시끄러워졌다.
고요한 어둠의 물 위에서 그렇게 우리는 고기 파티를 즐겼다.
서로 누구인지도 모른 채
공통점이라고는 멸망한 세상에서 살아남은 인간이라는 것 하나뿐인데도 우리는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그 공간에 같이 앉아 있었다.
그때 커플이 서로 고기를 먹여주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내보낼까?'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성희가 옆구리를 툭 치며 소주를 따라줬다. 그때 앳된 소년의 음성이 들렸다.
"엄마도 좀 드세요."
아들만 챙기고 있는 엄마에게 고기를 집어 그릇에 놓아준다.
나라는 작은 접시에 고기를 가득 담아 일어나더니 구석에서 혼자 맥주랑 같이 즐기고 있다.
메뚜기는 밥에 고기를 섞어서 주먹밥처럼 뭉쳐서 손으로 먹고 있다.
나와 성희도 그들 틈에 섞여 묘한 평온함을 느끼며 그렇게 밥을 먹었다.
"아! 할아버지는?"
내가 묻자 성희가 싱긋 웃는다.
"삼겹살에 소주 차려드렸어."
"그래"
갑자기 동네잔치라도 된 분위기다.
뭐 어떤가? 세상이 멸망하면 잔치 같은 거 열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나?
어차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세상이다. 잠깐의 즐거움도 없이 항상 불안에 떨며 숨어서 지내기만 해야 아포칼립스 세상인가?
사람들은 의외로 잘 적응한다. 지금 막 죽을 것 같은 위험을 간신이 벗어났는데도 웃으며 농담을 지껄일 수 있다.
인간은 만년 넘게 그렇게 살아남았다.
난 소주 한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어둠 속을 응시했다.
별빛 너머 멀리 산들이 보인다. 우리가 피신한 곳은 야산이라 정상 일부분을 제외하고 전부 물에 잠겼지만, 여기보다 높은 산은 그대로 윤곽이 보였다.
'저 산속에는 또 뭐가 있을까? 그리고 그 산 너머에는?'
난 맛있게 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들을 먹이고 잠시 보호하는 거 말고는 내가 뭘 해줄 수 있을까?
사람들이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고 의식주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데 왜 내가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걸까?
고작 내게 특별한 버스가 있다는 거 하나만으로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게 생겼나?
처음엔 단절된 정보를 잇는 전달 수단의 역할을 생각했다. 하지만 닥친 현실에 그때그때 대응하다 보니 계획 따위는 희미해지고 다른 생존자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때론 급박해서
또 때로는 지쳐서
그렇게 목적 따위는 잊은 채 하루하루를 그저 살았다.
그러다 여기까지 왔다.
세상은 그날 한 번 뒤집혔고
오늘 두 번째 뒤집혔다.
내일 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도 버스는 항상 우리를 생존시켰다.
성희는 내 빈 잔에 술을 따라주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도 굳이 내 복잡한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잘 먹었습네다."
메뚜기는 축축한 운동복에 손을 닦으며 기지개를 켰다.
"덕분에 잘 먹었다."
나라도 캔맥주를 든 손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
"근데 이제 이야기 좀 해주지?"
나라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음···. 제가 태백시에 오기 전에···. LA···."
나는 그들에게 몇 가지만 제외하고 그날 이후부터의 경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렇게 가끔 탄성을 지르며 내 이야기를 유심히 들었고 성희는 옆에서 말없이 묵묵히 맥주만 마시고 있었다.
그때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내 귓불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키고 싶다.
저 눈망울들
다 살리고 싶다.
계획 따위는 모르겠다.
단순하게 다시 내 목표를 정리했다.
이어지는 인연들이 이끄는 어딘가로 계속 움직이자
그리고 괴물과 악당들을 정리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자
내 이야기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듣고 있는 생존자들을 바라보며
난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마치 그날처럼
별이 바람에 스치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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