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J1. 집으로
그 작은 불덩어리는 그렇게 빠르지 않은 속도로 마트 외벽 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니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그날 하늘에서 수없이 떨어졌던 거대한 불덩어리, 그것과 형태가 거의 비슷했다. 단지 이번엔 초록과 푸른색도 섞여 있어 좀 더 색이 풍부해 보였다.
그때는 그게 지면에 닿기도 전에 버스로 피신해서 제대로 눈여겨보지 못했었다. 자세히 볼 만큼의 상황도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때처럼 공포에 질려 도망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버스가 있다는 든든함 외에도 저 작은 크기 때문인지 공포감보다는 호기심이 더 강하게 일었다.
사람 머리만 한 불덩어리 정도로 놀라기엔 난 이미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난 다시 버스 안으로 들어가 지붕 문을 단단히 닫았다. 거실로 내려오니 성희도 그 불덩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적당히 부를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불덩어리라고 칭하고 있는데 뜨거운 불덩어리와는 좀 거리가 있다. 도깨비불이 이런 모습일까?
좀 더 자세히 보니 어떤 에너지의 흐름이 뭉쳐서 흐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성운이는 테이블 자리에 앉아 말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 빛의 덩어리를 바라보고 있다.
"저게 대체 뭘까?"
성희의 차분한 음성이다.
마트 안의 사람들은 멀리에서 다가오는 저 정체불명의 빛 덩어리를 보지 못하는 것 같다.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그들에게 말을 해줘야 할까?
말한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 마트 밖도 위험한데 어디로 도망이라도 가야 한다고 해야 하나?
이미 마트 가까이 다가왔는데 지금 도망치라고 한들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까?
지금은 오히려 마트 안의 사람들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모르고 있는 게 나을 수 있었다.
버스 안의 식구들도 나와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은 듯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마음이 쓰였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느리게 다가오던 그 작은 빛의 덩어리는 마침내 거의 마트 벽 근처까지 다다랐다.
그날 밤, 하늘에서 수천 배는 더 컸던 저 형체가 헤아릴 수도 없이 떨어진 그날에도 버스와 나는 멀쩡했다.
저 정체불명의 덩어리가 어떤 현상을 발생시키던 적어도 나와 우리 식구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빛의 덩어리가 마트 벽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엄청난 빛이 마트 벽에서 뿜어져 나왔다.
"윽!"
비명은 버스 안에서만 들려왔다. 마트 쪽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처럼 그렇게 심한 눈의 통증을 느끼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 *
"아저씨"
작은 손이 내 몸을 흔들고 있다.
"아저씨 일어나요"
여전히 내가 움직이지 않자 더 거세게 날 흔든다.
"사람들이 없어요."
'뭐라고?'
난 놀라 벌떡 일어났다. 테이블에 엎어져 기절한 것 같다. 아까 성희가 옆에 있었는데 안 보인다.
"언니랑 오빠는?"
작은 성희에게 묻자 손으로 운전석과 밖을 가리킨다.
운전석에는 성운이가 앉아 대시보드를 지키고 있었다.
난 버스 옆문으로 나와 마트 안을 살폈다. 내부의 모습은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단 한 가지만 제외하고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
"어떻게 된 거야?"
먼저 일어나 살피던 성희에게 물었다.
"몰라 나도 방금 일어났어."
난 사람들이 앉아있었던 자리를 살폈다. 좀 전까지 무언가를 하고 있던 자취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먹던 과자봉지며 참치 통조림이며 물병 따위
그리고 내가 태형이에게 건넸던 맥주캔이 쏟아진 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맥주를 마시다 그대로 사람만 사라진 것처럼
"이거 대체 뭐지?"
그날 이후의 거리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곤충도 전혀 안 보였다. 그런데 건물이나 길, 산, 초목 등은 부서지고 폐허가 된 것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 그대로였다.
크기와 상관없이 빛의 덩어리가 터지면 특정 생물만 사라지는 건가?
그날 이후 일부 사라지지 않은 사람이나 동물은 이후에 괴물에게 잡아 먹혔거나 아니면 여전히 처절하게 생존의 몸부림을 치고 있을 것이다.
일부는 감염되어 인간형 괴물이 되었을 테고
그러면 또 다른 생존자들은 아까 그 정체불명의 불빛 덩어리에 의해 사라지는 건가?
그러면 그들은 소멸한 건가? 아니면 어디로 이동?
상상이 나래가 끝없이 펼쳐진다. 다시 생각을 다잡고 눈앞의 상황에만 집중하려 애썼다.
빛의 덩어리가 터지면 인간과 동물 등이 사라진다. 이건 두 번 겪고 나타난 현상으로 내린 결론이다.
어찌 되었든 버스 안에 있는 우리는 안전하다. 단, 정신은 잃는다. 기절하는 시간은 두어 시간 정도? 일정하진 않은 거 같다.
그런데, 아플 정도로 눈이 시린 빛과 기절 현상은 버스의 진화 때도 거의 같은 느낌이었다. 이건 또 어떤 연관이 있을까?
마트 내부와 뒤쪽 창고까지 모두 뒤져봤으나 정말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가자"
길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아참 그 전에"
마트 안에 아직 물품이 많았다. 게다가 이제 쓸 사람이 없다. 전부 다 실을 수는 없지만, 가능한 한 많이 챙겨야 한다.
버스 탐지 램프는 성운이가 계속 보고 있고 우리는 50리터 봉투를 잔뜩 가지고 와서 각자 필요한 물품을 챙겼다.
'태형이와 더 할 이야기가 있었을 텐데'
난 무표정하게 물건들을 챙기면서도 그 친구 생각이 났다.
하지만 여기서 시간을 아깝게 흘려보낼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판단해야 했다. 물건 챙기고 우리는 떠난다.
작은 성희까지 내려와 가벼운 물건들을 옮겼다. 우리 식구들의 손발이 점점 착착 잘 맞아가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이들의 부모가 살아있고 무사히 만난다면 헤어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전까지는 우리는 식구다.
"준비됐나?"
"네!"
어린이들의 힘찬 대답이다. 성운이도 많이 밝아진 것 같다. 이제 정말 아이들의 집으로 간다.
그곳에 어떤 게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어떤 거라도 우리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성운이도, 작은 성희도 이젠 그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난 버스의 악셀을 밟았다. 창밖은 아직도 밝다. 늦은 오후 정도 되는 것 같다. 제대로 동작하는 시계가 없으니 시간을 알 수 없다. 태양의 위치로 대충 추정할 뿐이다.
버스에 없는 게 오디오만이 아니었다. 정말 그러고 보니 흔한 시계도 없다. 이 신기한 버스에 시계가 없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우리는 마트 주차장을 나와 기다랗게 넘어진 트럭을 피해 옆의 이면도로로 진입했다.
저 트럭을 넘어오던 무수히 많은 괴물이 떠올랐다. 놈들은 배부른 식사를 하고 푹 자더니 깨어나 마트를 풍비박산 내고 마트 뒤쪽 산으로 몰려갔다. 마트 박살 이후의 이야기는 태형에게 들었다.
사이드미러로 행복 마트의 간판이 멀어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낮은 건물이 양쪽이 길게 늘어선 왕복 2차선 도로로 우리 버스는 천천히 달렸다. 이따금 부서진 승용차와 트럭들이 널브러져 있었으나 우리에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난 계기판을 살폈다.
[61/1000]
하나 줄어 있다. 마지막으로 62였나 그랬을 거다.
우리는 문득 갑작스러운 침묵에 시달렸다. 아까는 오히려 마트에서 떠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 같다.
바쁘게 물건 챙기고 출발하느라 미처 못했던 그 생각들이 이제서야 다시 머릿속으로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죽은 건 아닐 거야"
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생각의 고리를 끊어야 했다.
"어디론가 잡혀갔거나 이동한 거겠지"
진실이 뭔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건 우리다. 상자를 열기 전에 고양이는 존재할 수도 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생각보다 진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건 내 마음이다.
멘탈이 무너지면 곧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상황 해석을 마음이 편해지는 쪽으로 하려고 노력해야 했다. 그래야 버틸 수 있다.
가끔 못난이 몇 마리가 뛰어다닌다. 놈들은 버스를 보지 못하니 우리도 굳이 놈을 잡으러 내릴 필요는 없었다.
버스 가까이 멈춰있었다면 코르카 용으로 찔러버렸겠지만, 건물 벽에 달라붙으며 이동하고 있어서 잡으려면 좀 까다로울 것 같았다. 괜히 코르카 몇 개 벌겠다고 내렸다가 위험해질 수 있다.
"아 씨 또"
나도 모르게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참았다. 아이들이 타고 있다.
전방에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길을 아예 막고 있었다. 버스로 밀어버리기에도 애매하다.
난 옆의 골목으로 버스를 돌렸다. 이렇게 계속 돌아서 가면 어둡기 전에 도착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성운아, 집이 어디 근처니?"
뒤에서 창밖을 두리번거리던 성운이가 입을 열었다.
"교회 옆이에요. 사랑 교회"
교회 이름이 동네 교회 같다. 대형 건물은 아닐 듯싶다.
"교회 크니?"
"네, 우리 동네에서 제일 커요"
작은 성희의 말이다.
"보이면 말해줘"
교회라, 지금도 눈에 보이는 크고 작은 교회를 몇 개는 지나쳤다. 지방의 작은 소도시라고 해도 교회는 정말 많았다.
교회를 이정표로 잡고 움직이기에는 탐색 범위가 너무 넓다. 좀 더 좁혀야 한다.
지도책도 없고 내가 도로명을 외우는 것도 아니다. 내비게이션이 없으니 정말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서도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운아, 주소가 뭐랬지?"
"강원도 태백시 운주로 17번길 1"
마치 엄청나게 연습한 거처럼 주소만 물어보면 빠르게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운주로···."
난 사거리에 가끔 등장하는 표지판과 건물들에 붙어있는 도로명을 확인하며 버스를 몰았다.
"헐"
방금 내가 유심히 보던 도로명 표지판이 못난이의 앞발에 걸려 뜯어졌다. 그리고 잠시 덜렁거리더니 아래로 떨어진다.
표지판을 떨어트린 못난이는 어디 모임에 늦었는지 부산스럽게 네 발로 뛰어가더니 녹색의 건물 뒤로 사라졌다.
난 떨어진 표지판을 슬쩍 봤다.
[운주로 12번 길]
어? 그러면 거의 근처에 온 거 아닌가? 난 핸들을 돌려 옆 블록으로 이동해서 주소를 살폈다.
[운주로 5번 길]
"젠장 뭐 이렇게 일관성이 없어! 도로 번호가 이딴 식이면 어떻게 찾으라고!"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나도 마트에서부터 멘탈이 흔들리기 시작했는지 어느새 예민해져 있었다.
'진정하자'
그때 내 앞으로 멧돼지 괴물 한 마리가 총총거리며 지나간다. 크기가 작은 게 새끼 같다. 어처구니없게 괴물도 새끼는 귀여웠다.
'괴새끼···.'
가끔 버스 앞을 뛰어 지나가는 멧돼지 괴물도 이젠 귀엽게 보일 지경이다. 저놈들은 왜 저렇게 뛰어다닐까?
대규모는 아니라서 다행이다 싶다가도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냥 마구 뛰어노는 강아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벌써 이런 세상에 적응해 가는 건가? 멧돼지 괴물이 강아지 같다니, 젠장
그때 작은 성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교회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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