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J1. 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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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보를 비롯한 사람들 몇 명이 계단 쪽으로 다급하게 뛰어갔다. 뒤를 따르던 마른 청년은 잠시 멈추고 나에게 말했다.
"형도 잠깐 보실래요? 저쪽 인간들?"
난 옥상의 상황이 궁금하기도 했고 또 다른 변수인 본관 인간들의 면상을 잠깐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유민이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가보자"
옥상에 오르니 아까 머리꼭지만 보였던 사람들의 실체를 볼 수 있었다. 모두 그저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평범한 일반인들이었다. 손에는 무대 소품처럼 보이는 허술한 병장기를 들고 있었다.
난 그들의 시선이 몰려있는 시청 주차장 쪽을 내려다봤다.
그곳에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일렬로 서서 옥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중 가운데 있는 중년의 사내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훤칠한 키에 멀리서 봐도 그 아우라가 느껴질 정도로 눈에 띄는 사내였다.
"저자가 저쪽 대장인가?"
그때 털보가 입을 열었다.
"시장이야"
"네?"
태백시 시장이라고? 관할 시가 이렇게 엉망이 되었는데 시청에 성을 세우고 권력 질을 하고 있다고?
그때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 사장은 어디 가고?"
아까 죽은 그 사기꾼 대장이 김 사장인가? 내가 이런 의문의 눈빛을 마른 청년에게 보내자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용건이 뭐요!"
털보가 그들에게 소리치자 시장은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약병을 흔들어 보였다.
"이게 뭔지 아나?"
뒷북이다. 별관 사람들은 이미 저것이 무엇인지, 김 사장이 어떤 인간인지까지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털보가 관심 없다는 투로 퉁명스럽게 말하자 시장은 살짝 당황한 표정을 비추더니 이내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저번 제안은 아직 유효하네"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싫다면?"
시장은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굶어 죽던가"
난 마른 청년에게 의문의 눈빛을 보냈다. 그도 영문을 모르는 눈치다.
시장과 그 떨거지들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는 본관 건물로 사라졌다.
난 불길한 생각이 문득 들어 반대편 난간으로 뛰어가 아래를 살폈다. 다행히 버스는 그대로였고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본관 사람 중에 능력자는 없지?"
"예, 그래서 대장···. 아니 김 사장이 있을 때 우리를 건드리지 못했어요."
난 김 사장이라는 인간이 왜 본관까지 진출을 못 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본인과 약물 먹은 사람들 정도면 본관까지 접수하는 건 어렵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런 의문들은 나중으로 미뤘다. 이젠 유민이 구하러 가야 한다.
"나 가야겠다."
"예"
난 사람들과 계단을 내려오며 슬쩍 마른 청년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 무대 소품 같은 무기는 뭐야?"
"아 그게요. 여기 별관에 공연장이 있어서···."
"저게 진짜 소품이라고?"
화살은 어떻게 구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우선 일 층으로 내려갔다. 털보와 마른 청년이 나를 배웅해줬다.
"무사하시길"
내가 쪽문을 나오자 버스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식구들이 보였다. 난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오래 걸렸네?"
"가면서 얘기하자, 유민이는 석탄박물관에 잡혀있는 거 같아"
난 바로 버스를 출발시켰다. 벌써 해가 거의 넘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걸어서 거기까지 이동했지? 그것도 약물의 힘인가?"
석탄박물관이 여기서 그리 멀지 않다고 해도 걸어서 가기에는 좀 거리가 있었다. 우리 버스가 시청까지 오는 시간 동안 거기를 다녀왔다는 게 의문이 들 정도의 거리다.
물론 버스가 천천히 움직이기도 했고 중간에 벌레들이 나타나 시간이 지체되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이 걷는 속도라고 보기엔 너무 빨랐다.
가는 도중에 난 성희에게 별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다 얘기해줬다. 성희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듯 별말이 없었다.
버스가 한적한 길로 들어섰을 무렵 노을은 세상을 온통 핏빛 색깔로 물들이고 있었다.
"조용하네"
성희가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시청에서 나온 이후 괴물이나 사람을 보지 못했다. 탐지 숫자도 모두 0이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저녁이다.
"다 왔다."
멀리 석탄박물관의 입구가 보였다. 산기슭에 있어 저녁이 되니 건물은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뿜어내고 있었다.
난 버스를 멈추고 잠시 건물 쪽을 응시했다.
저기 각성자의 피로 약물을 만드는 인간들이 있다. 그런데 그 거머리 같은 인간 중에 만약 각성자가 있으면? 리더거나 혹은 협력자 중에도 있을 수 있었다.
내 표정을 읽은 성희가 입을 열었다.
"그냥 떠날까?"
우리의 안전을 좀 더 생각한다면 다 잊고 그냥 여기서 훌쩍 떠나버리는 게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었다.
빌라촌 사람들이나 유민이 가족, 시청의 생존자들, 어떻게 보면 전부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유민이 덕에 버스를 한 번 더 진화시키긴 했지만, 그 고마움만으로 우리 모두의 목숨을 걸 수 있을까?
한동안 말이 없던 성운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유민이 형 저기 있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성운이의 굳은 표정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아이에게서 보면 안 되는 그런 살기
계속 침묵을 지키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작은 성희가 눈에 들어왔다.
남매가 뭔가 저지를 것 같은 분위기다.
"가보자"
생각이 너무 많았다. 지난 시간 동안 많은 위기를 겪다 보니 위험한 행동은 될 수 있으면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한가지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우리 식구들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거다.
위기를 겪으며 우리는 더 강해졌고 우리 버스 또한 더 진화했다. 그런데 왜 마음은 더 조심스럽고 걱정이 많아졌을까?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우리를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이 이상한 느낌 때문인가?
난 다시 악셀을 밟았다. 각성자가 있건 없건 간에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위험은 저기 거머리 소굴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
피하지 말자
난 점점 더 다가오는 건물을 바라봤다. 양옆에 큰 산이 있어 금세 주변이 어두워졌지만, 전조등은 켜지 않았다. 되도록 수상한 행동은 최대한 숨겨야 한다.
가까이 접근하자 마른 청년이 이야기한 건물이 보였다. 건물 입구는 쇠사슬로 단단히 잠겨 있었다. 난 그 옆쪽으로 버스를 천천히 몰았다.
"저건가?"
성희가 건물 옆쪽에 특이한 철문 같은 걸 가리키며 말했다.
철문 앞에 버려진 박카스 병이 여러 개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런 거 같아"
난 버스를 움직여 다른 입구를 찾으려 했으나 건물 뒤편으로 가는 길은 계단으로 막혀있어 버스로 진입할 수가 없었다.
"둘러보고 올게."
내가 검을 챙겨 들고 나가려 하자 성희가 내 팔을 잡았다.
"이번엔 내가"
그녀는 바로 버스에서 내려 건물 뒤편으로 사라졌다. 말릴 틈도 없었다.
난 버스 계기판을 살폈다. 탐지 램프는 여전히 0이다. 여기에 적어도 아직은 괴물이 없다. 괴물보다 더한 거머리만 있을 거라 추정될 뿐
난 성희가 사라진 건물 뒤편을 바라보다 시선을 주변으로 옮겼다. 날은 이미 칠흑같이 어두워졌고 오늘은 구름이 많은지 별이나 달도 보이지 않았다.
오도독
고요함을 깨트리는 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와 돌아보니 작은 성희가 무언가를 먹고 있다. 저런 스낵이 차에 있었나?
그런데 그걸 씹어먹고 있는 작은 성희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배고프니?"
"아니요"
난 운전석 창문을 완전히 내리고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차가운 산바람이 불어왔다. 자연의 냄새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산짐승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가끔 들리던 새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에서 들려오는 스산한 소리가 더 크게 다가왔다.
거머리들은 왜 여기에 터를 잡은 걸까?
각성자의 피를 마시면 특별한 능력이 생기는 건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악!"
그때 건물 안쪽에서 성희의 비명이 들려왔다. 난 검을 챙겨 들고 급하게 버스를 나서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일 생기면 경적 울려"
어차피 진화된 우리 버스에는 내 허가 없이 아무도 못 탄다. 난 급하게 건물 뒤편으로 뛰어갔다.
바닥과 면해있는 건물 벽면에 지하로 통하는 창문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그중 하나가 깨져있었다.
창문은 모두 두꺼운 쇠창살로 막혀있었지만 깨진 창문 앞의 창살은 뜯어져 있었다.
난 유리의 잔해를 검으로 더 쳐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건물 안에 내려서자 시야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난 움직이지 않은 채 가만히 서서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고요했다.
'잘못 들었나?'
난 천천히 앞을 더듬으며 이동했다. 휴대용 조명기기라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버스와 통신까지 가능하면 더 좋고
부스럭
그때 복도 안쪽에서 수상한 소리가 났다. 난 검을 겨누며 천천히 그쪽으로 이동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검은 형체가 어디론가 다급하게 뛰어가는 게 보였다.
난 그쪽으로 뛰었다. 그런데 그때
"윽!"
무언가에 걸려 앞으로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아래를 보니 익숙한 다리가 보였다. 찢어진 청바지의 성희였다.
그녀는 약간 의식이 있었으나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난 그녀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런데 그때 팔에 꽂혀있는 주삿바늘이 보였다. 끝부분에 털 같은 게 달려있었다.
'마취총?'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작은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작은 무언가가 나에게 날아오고 있다. 각성 상태로 진입하면 느리게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어둠 속에서 시야까지 밝아졌다.
내 시선에 잡힌 그 물건은 성희의 팔에서도 봤던 주삿바늘이었다.
난 날아오는 주사기를 검으로 쳐낸 후 마취총을 들고 숨어있는 놈에게 바로 달려들었다.
"끄억!"
검의 손잡이로 놈의 뒤통수를 가격해 쓰러트린 후 넘어진 놈의 등을 한쪽 발로 누른 채 남은 발로 놈의 팔을 그대로 힘껏 밟았다.
우두둑
놈의 팔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어둠 속에서 또 다른 시커먼 형체가 나에게 달려드는 게 느리게 보였다.
놈의 손에는 긴 식칼 같은 게 들려있었다. 사시미 칼이다.
난 검 면으로 놈의 손을 쳐낸 후 발목 뒤편을 검으로 그었다.
"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놈의 머리를 방패로 후려친 후 넘어진 놈의 팔을 그대로 밟았다.
우둑!
두 놈은 이제 제대로 공격하지 못할 거다. 발목과 팔을 쓰지 못하면 남은 건 입뿐이다. 이제 들을 일만 남았다.
난 주변을 더 살폈다. 아직 각성 상태가 풀리지 않아 주변이 훤히 다 보였다. 그런데 그제야 내 시야에 충격적인 모습이 들어왔다.
"이···.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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