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J1. 다른 종
언제 잠이 들었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 보니 커튼 틈 사이로 빛이 보인다. 실내가 어두워 늦잠을 잔 것 같다. 이런 세상에서 늦잠이라는 게 의미가 있나 싶긴 하지만
우리는 어젯밤에 버스의 커튼을 모두 치고서야 마음 편히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창밖에서 언제 또 붉은 두 개의 눈이 나타날지 몰라 신경이 너무 쓰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격하지 않는다고 해도 괴물이 계속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건 정말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인간형도 버스 안은 못 보도록 어떻게 안 되나?
"형 아직 자요?"
난 침대에서 내려가 옆문을 열었다.
유민이가 얼굴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었다.
"밖에 비와?"
난 문밖을 살폈으나 강한 햇살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침 조깅요. 순찰도 할 겸 동네 한 바퀴 돌고 약수터 다녀오는 길이에요."
"부지런하네"
난 밖을 다시 살폈다. 밤새 우리를 지켜보던 인간형 괴물은 보이지 않았다.
"너의 형은?"
"낮에는 지하실로 들어가요."
인간형이 빚을 싫어하는 건 확실한 것 같다.
유민이가 버스 안을 신기한 눈으로 구경하고 있었으나 안으로 들이고 싶진 않았다. 아직 다른 식구들이 깨지 않기도 했고
난 검을 손에 들고 나가려다 검집의 가죽끈을 사선으로 해서 등에 멨다. 손에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니 너무 편했다.
"약수터 가자"
"막 거기서 오는 길인데···."
"한 바퀴 더 돌아, 나랑"
난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버스 문을 닫았다. 그리고 문이 잠기는 소리를 확인한 후 유민이의 등을 떠밀었다. 그의 등은 축축했다.
"가자고"
마지못해 유민이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가을 아침의 찬 바람이 느껴졌다. 밤새 비가 오는 거 같더니 지금은 구름 한 점 없다.
"저기 교회에는 아무도 없어?"
유민이는 교회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대답했다.
"저기 지붕에 구멍 보이세요?"
자세히 보니 지붕에 사람 크기만 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마치 큰 돌덩이가 하늘에서 떨어져 뚫고 들어간 것 같은 모습이다.
"그날 저기로 주먹만 한 돌이 떨어졌데요. 저는 못 봤지만"
난 교회 앞에서 잠시 서서 그쪽을 관찰했다.
"구멍은 주먹보다 훨씬 큰데"
"그러게요. 충격이 컸나 보죠. 하여튼 그러고 저기 교회 바닥에서 뭐가 자라기 시작했데요."
"뭐?"
그의 덤덤한 태도에는 익숙해졌지만 난 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도 얼마 전에 문만 열어봤어요. 괴물은 안 보였고 파란색 덩굴 같은 게 교회 안에 잔뜩 자랐더라고요. 냄새가 고약해서 얼른 문을 닫아버렸지만···."
"덩굴?"
"네, 파란색이라 좀 괴상한데 교회 기둥을 타고 위로 자라던데요."
"위험한가?"
"글쎄요. 문 열어본 저는 아직 괜찮네요."
난 잠시 교회를 바라보다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보시게요? 냄새 지독한데"
난 확인하고 싶었다. 위험한 일이 있더라도 옆에 무덤덤 민머리가 있다.
난 교회 문 앞에 서서 잠시 틈을 살폈다. 나무로 된 큰 여닫이문이었다. 문의 아래쪽 틈 사이로 희미하게 푸른 연기 같은 게 흘러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어라? 이런 건 없었는데?
유민이도 놀란 표정이다. 난 쪼그리고 앉아서 냄새를 맡아봤다.
"윽!"
마치 플라스틱이 타는 냄새와 비슷한데 강도는 훨씬 강했다. 조금 맡았는데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문 열면 안 될 거 같다."
내가 안을 살피려던 걸 포기하고 돌아서려는데 유민이가 아직 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열면 안···."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는 한쪽 문을 밀고 있었다.
"악!"
퍼런 연기가 그의 얼굴을 덮쳤다. 그 연기는 순식간에 유민이의 온몸을 푸른색으로 뒤덮었다. 그는 문을 거칠게 닫고 뒤로 물러섰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시 놀란 듯했지만,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으아! 냄새가 너무 지독해요. 얼른 약수터로 가요"
그는 빠른 걸음으로 교회의 주차장을 벗어났다. 그의 속도를 맞추기 힘들었지만 애써 그를 놓치지 않으려 뛰다시피 걸었다. 그는 뒷산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졸 졸 졸
약수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이 지붕으로 되어있는 흔한 동네 약수터였다. 빨간 바가지도 여러 개 돌벽에 걸려있었다. 유민이는 바가지로 잔뜩 고여있는 약수통의 물을 떠서 민머리에 부었다. 그러자 물이 푸른색으로 물들며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괜찮아?"
지독한 냄새와 더불어 색상도 무슨 독극물 같은 느낌이다.
그는 연신 물로 몸을 씻어내며 대답했다.
"냄새 말고는 괜찮아요. 그래도 물에는 잘 씻기네"
좀 더 상태를 지켜봐야겠지만 아직은 괜찮은 듯 보인다.
"약수 마셔도 돼?"
마실 생각은 없었다. 이런 세상에서 오염 여부를 확인도 하기 힘든 걸 함부로 먹거나 마실 수는 없다. 난 그저 마을 사람들의 식수 사용 여부를 알고 싶었다.
"그럼요. 생수가 귀하니까요. 이 물 없으면 큰일 나죠. 사실 이거 때문에 동네를 안 떠나는 거 같기도 해요."
"물은 별 이상이 없나 보네?"
"우리 엄마도 드셨는데 괜찮아요. 형도 드셔보세요."
난 고개만 끄덕이고는 옆의 바위에 걸터앉아 산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밤에는 몰랐는데 날이 밝으니 태백시가 한눈에 보였다.
멀리 시커먼 형체들이 어디론가 몰려갔다가 또 몰려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수가 많진 않았지만, 여전히 괴물들은 시내를 활보하고 있었다.
"군대는 못 봤어? 난 시골에 있을 때 읍내 쪽에서 폭탄 터지는 소리 같은 거는 들었거든."
그는 물을 연신 몸에 부으며 씻다가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는 대답했다.
"군인은 한 명도 본 적 없어요."
무덤덤한 대답이었으나 살짝 분노가 느껴졌다.
"경찰은?"
그는 물기를 털며 내 옆에 앉았다.
"경찰복 차림의 변이한 괴물은 봤어요."
그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난 교회의 지붕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뚫린 구멍까지 덩굴이 자라서 올라온 거 같았다.
"저거 이제 밖으로 나오겠는데?"
내가 손으로 지붕을 가리키자 유민이도 유심히 그쪽을 바라봤다.
"교회를 태워야 하나?"
그의 덤덤함에 익숙해지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저런 말을 어떻게 저렇게 태연하게 하지?
아니, 그런데 그의 판단이 옳을지도 모른다. 저 푸른 식물도 위험 여부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생명체다.
어떻게 보면 저건 식물형 괴물일 수 있다.
주먹만 한 크기로 떨어졌다는 데 며칠 만에 저렇게 교회 기둥을 타고 올라와 뚫린 지붕까지 자랄 정도로 빠른 성장을 보였다. 한국의 칡넝쿨이 미국에 퍼져서 골치라는 뉴스가 떠올랐다.
저건 어떻게 보면 움직이는 괴물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추측일 뿐
저 식물의 기운 때문에 이 언덕 위로는 괴물이 잘 나타나지 않는 거일 수도 있다. 아무리 유민이와 그의 형이 괴물들을 청소한다고 하더라도 둘이 할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
유민이 형이 언덕 아래 괴물들을 막고 있다는 건 그들의 착각일 수 있다. 오히려 이 식물의 지독한 기운이 괴물들이 접근을 막는 거라면?
그러면 또 다른 괴물 종인가? 괴물들끼리의 싸움을 난 또렷이 기억한다. 괴물이라고 다 같은 편이 아니었다. 거기에 또 다른 식물형의 등장이라면?
단서가 더 필요했다.
"저 덩굴 조금만 잘라야겠어."
"네? 저걸 뭐 하시려고"
유민이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저거 때문에 괴물이 이 동네에 잘 오지 않나 싶어서"
그는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다시 교회 쪽으로 옮겼다. 그도 뭔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보였다.
"해봐요. 그럼, 뭐 또 씻으러 와야겠네"
우리는 다시 교회의 정문으로 내려갔다. 여전히 문틈으로 파란색의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난 등의 검집에서 검을 빼 들고는 숨을 참은 채 유민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문을 활짝 열자마자 우리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빨리 끝내야 했다.
푸른 연기가 가득해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그 때문에 눈이 엄청나게 따가웠다. 난 덩굴로 추정되는 부분을 향해 검을 여러 번 휘둘렀다. 유민이는 내 옆에서 손에 잡히는 덩굴을 힘으로 뜯어냈다.
"나가자!"
얼마 채취하지 못했지만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문밖으로 뛰어나와 거칠게 문을 닫은 뒤 약수터로 뛰었다.
"휴!"
교회와 약수터가 그리 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우리는 채취한 덩굴을 벤치에 내려놓고 약수를 몸에 들이붓기 시작했다.
"그냥 물통 하나 가지고 갈 걸 그랬어요."
"그러게, 말이다. 무식한 고딩 같았어 우리."
"형 저 고딩이에요"
유민이가 물을 연신 뒤집어쓰며 웃었다. 민머리 민눈썹이 웃으니 좀 무서웠다.
난 씻으며 그 팔뚝만 한두 개의 덩굴 조각을 바라봤다. 은은하게 연기 같은 게 흘러나오고 있었고 뜯기고 잘린 부위에서는 끈적한 푸른색의 액체가 고여있었다.
"가까운 곳에 괴물 자주 나오는 곳이 있나?"
"네. 어제 사거리 뒷골목요. 거기 먹자골목인데 괴물들이 자주 와요. 뭐 먹을 게 있나?"
대충 어딘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난 근처에 나뒹굴던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주워 덩굴을 담고 유민이와 다시 산에서 내려갔다.
우리가 버스로 돌아오니 성희가 창을 열며 말했다.
"뭐 사와?"
"어 나물"
괜한 농담이다. 검은 비닐봉지 들고 집으로 오니 시장에서 뭘 사서 오는 것 같다. 잠시 일상 같은 대화를 해보고 싶어 던진 농담에 괜스레 마음이 무겁다.
"형 저는 일이 있어서 같이 못가요"
"괜찮아."
유민이는 집으로 들어가고 난 버스 좌우 측 외벽에 있는 다용도 손잡이에 덩굴을 하나씩 묶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성희에게 설명하는데 그녀는 코를 잡고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샤워부터"
아이들이 침대에서 뒤척이고 있다. 아이들도 피곤했는지 아직 못 일어나고 있었다. 난 안 좋은 냄새를 제대로 씻으러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개운하게 샤워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테이블에는 간단한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
"아저씨 얼른 드세요."
언제 일어났는지 성운이와 작은 성희가 동시에 인사한다.
테이블 위에는 계란밥과 김이 놓여있었다.
난 아침을 먹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오늘은 햇살이 참 눈부셨다.
"이제 어떻게 할까?"
성희가 캔 커피를 마시며 내게 물었다. 나도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동네에서 계속 머무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할아버지를 찾고 싶고 아이들은 엄마 아빠를 찾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단서는 없었다.
괴물이 잘 오지 않는 이 동네도 안전해 보이진 않는다. 언제 또 인간형이나 변이가 나올지 모르고 유민이네 가족도 사실 조금 꺼림칙했다.
게다가 정체불명의 식물이 급속도로 자라고 있다. 어쩌면 여기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는 다시 어디론가 가야 한다. 목적지는 모르겠다. 그저 하루하루 느낌대로 움직이다 보면 그게 운명이 되고 어떤 종착지에 도착하지 않을까? 그래서 할아버지는 이런 캠핑카를 나에게 남겨주신 거 아닐까?
지금 내가 얻은 새로운 단서는 저 이상한 식물이다. 저걸로 괴물들의 반응을 한번 보고 싶었다.
아침을 다 먹은 나는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56/1000]
오늘은 왼쪽보다 오른쪽 숫자에 자꾸 눈이 갔다. 코르카 천 개라
"형! 잠시만요!"
그때 버스 밖에서 유민이의 음성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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