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J1. 혜자 버스
난 버스의 운전석으로 이동해 창고 문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손을 관찰했다.
손은 작았으나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 손은 창고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몸 전체가 드러났다.
작았다. 하지만 징그러웠다.
나의 반 정도 되는 키에 뚱뚱한 몸, 큰 귀와 커다란 붉은 눈, 있으나 마나 한 코, 그리고 아주 작은 입, 하지만 긴 손가락의 끝은 아주 날카로워 보였다.
괴물 중에서도 못생긴 축에 속할 거 같은 놈이다.
난 저 괴 생명체의 움직임을 계속 지켜봤다. 놈은 안으로 들어오더니 어두운 창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버스로는 접근하지 않았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놈에게는 내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아니 버스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아까 얼굴 비춰보던 놈은 뭐지? 그냥 벽으로만 보이나?'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놈이 전조등이 비추는 곳을 벗어나자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창고를 뒤지고 있는 그놈은 가끔 버스 옆에 와서 가만히 서 있기도 한다. 마치 무슨 느낌이 들긴 하지만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난 실내의 모든 등을 다 켰다. 하지만 버스 안의 밝은 빛은 어두운 창고까지 밝게 비추진 못했다. 마치 버스 안에서 막고 있는 것처럼, 오히려 내부가 환하니 어두운 밖이 더 보이지 않았다.
놈도 별다른 반응이 없다.
난 손을 들어 살짝 박수를 한 번 쳤다. 하지만 여전히 놈은 반응이 없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강하게 박수를 여러번 쳤다.
'안들리나 본데?'
난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봤다.
"야! 이 괴물 새x아!"
어이없는 내 외침도 녀석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았다.
난 마지막으로 버스의 경음기를 짧게 눌렀다.
빵!
괴물이 그 소리를 듣더니 몸을 움찔했다. 그리고 소리가 난 곳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건 조심해야겠군.'
버스 안의 빛과 소음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 것 같다. 단, 경음기만 제외하고
'휴우'
갑자기 긴장이 풀렸다. 경직됐던 근육이 조금씩 느슨해지자 잊었던 오감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이내 심한 허기가 몰려왔다.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를 하나 꺼냈다. 그 옆에 소시지도 꺼냈다.
'전자레인지가 있네?'
난 주방 서랍에서 과도를 꺼내 소시지에 칼집을 냈다. 그리고 전자레인지에 넣으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난 인덕션에 프라이팬을 올린 후 식용유를 꺼내 두르고 소시지를 구웠다.
천장의 환풍기를 켜니 연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모터 소리가 컸지만, 밖의 괴물은 반응이 없었다.
'소시지 냄새에 반응하려나?'
지글지글 소시지가 익어가자 갑자기 괴물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무언가를 찾는 느낌이랄까
'아, 버스에서 밖으로 나가는 건 인지하는구나! 아까 경음기만 특이한 건가?'
난 전원 스위치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가서 외부 조명을 찾았다. 우측, 후방, 좌측 버튼이 각각 있었다. 내가 우측 조명 버튼을 누르자 어두웠던 창고가 순식간에 환해졌다.
하지만 괴물은 여전히 그 빛에 반응하지 않은 채 창고만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놈들은 빛에는 큰 반응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어둠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걸로 봐서는 내가 모르는 놈들만의 감각이 있는 모양이다.
난 인덕션과 환풍기를 끄고 소시지를 접시에 옮겨 담아 테이블에 올려놓고 앉았다.
그리고 밖의 괴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맥주를 따서 한 모금 들이켰다.
시원했다. 역시 청량감이 좋은 국산 맥주는 이 맛에 마신다.
난 접시 위에 있는 소시지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오호?'
육즙이 입 안에서 한 바퀴 돌더니 고소하고 짜고 게다가 달콤한 맛까지 느껴졌다. 이제껏 먹어보지 못한 소시지다.
방금까지만 해도 죽음의 공포에 떨던 나는 맥주 한 캔의 취기와 맛있는 음식만으로 그렇게 쉽게 행복감을 느꼈다. 내가 이렇게 단순했나?
그래서인지 창밖 괴물의 모습에 시간이 갈수록 기묘하게 적응이 되는 느낌이다. 처음엔 무서웠지만, 점점 익숙해지니 공포감이 줄어들고 마치 내가 제거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제거라니? 닭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내가? 시골에서 토종닭을 잡을 때 옆에서 보지도 못하는 내가?
그런데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저 괴물의 어느 부분을 찌르고 베면 바로 죽을지도 느껴졌다.
왜지?
왜 알고 있는 것 같지?
난 다 먹은 접시를 싱크대에 넣고 검은 유리 덮개를 닫았다. 그리고 침실 옆의 창고 문을 열었다. 아까 도구가 보였던 기억이 나서였다.
문을 열자 그 안에는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도구들이 몇 개 들어있었다.
중세 유럽에서 썼을 법한 검 하나, 길지도 짧지도 않은 중검이다.
그리고 어설픈 나무 방패 하나, 이건 좀 작다. 약해 보여 큰 도움이 될까 싶다.
그리고 활 하나와 화살통 하나, 그 안에 화살이 다섯 발 정도 들어있다.
캠핑카의 창고에 있기에는 너무 이질적인 물건들이다. 코스프레 마니아라면 모를까, 그런데 그건 할아버지가 즐길만한 취미는 아니다. 아닌가? 아닐걸?
난 검을 꺼내 들었다. 손잡이가 금색으로 되어 있었고 손잡이 끝에는 붉은 보석이 박혀있었다.
검을 들고 날을 살폈다. 양날은 날카롭고 강하게 손질되어 있었으며 검면은 마치 거울 같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 검면 너머로 내 눈빛이 보였다.
멋진데?
검을 두 손으로 잡자 몸에서 이상한 느낌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근거 없는 용기와 힘이랄까
마치 능숙하게 사용했던 어떤 날의 기억이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 기억은 아니다. 세포에 새겨진 그런 본능 같은 느낌
그때 버스의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엇? 내가 실수로 뭘 눌렀나?’
문이 열리자 밖의 괴물이 움찔하더니 열린 문 안쪽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내 눈이 못난이 괴물의 붉은 눈과 마주쳤다. 문이 열리면 안이 보이는 모양이다.
몇 시간 전의 나였다면 바로 문을 닫고 이불을 뒤집어썼겠지만, 이상하게 내 몸은 버스의 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맥주 한 캔에 취한 건가?'
난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노려보고 있던 그 못난이 괴물은 서서히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놈이 버스 안으로도 들어올 수 있을까?'
궁금한 게 생겼다. 만약 들어올 수 있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다. 아무리 내가 날카롭게 날이 선 검을 들고 있을지라도 저 괴물의 소름끼치는 손톱이 내 몸에 닿기라도 하면···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문을 닫을까?
하지만 괴물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아까와는 달리 이상하게 공포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난 검을 든 손에 힘을 줬다. 그리고 서서히 들어 괴물에게 겨눴다. 언제든 저 괴물의 배를 뚫어버릴 수 있도록, 그리고 저 목을 베어버릴 수 있도록
그 괴물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문 앞에 멈췄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괴물의 흉측한 손은 문을 넘어오지 못했다.
그때 난 나도 모르게 검을 힘껏 앞으로 내질렀다. 날카로운 검은 그대로 흉측한 괴물의 목에 꽂혔다.
괴물은 흉측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초록의 액체가 사방으로 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액체는 열려있는 버스의 문 안으로 단 한 방울도 들어오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마력의 방어막이 있는 것처럼
난 놈의 목에 꽂혀있던 검을 다시 힘껏 뺐다. 검날에 묻어있던 초록의 액체는 검이 버스 안으로 다시 들어오면서 깨끗하게 씻겨 나갔다.
'오호, 괜찮은걸?'
난 그렇게 첫 살생을 저질렀다. 비록 상대가 흉측한 괴물일지라도 살생은 살생이다.
하지만 어떤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정신적인 충격도 없다. 이상한 일이다. 어릴 때 목이 잘린 토종닭을 보고 밤마다 악몽을 꾼 적도 있었다. 그 닭은 내가 목을 자른 것도 아니었지만 그때는 보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아직도 뿜어져 나오는 저 초록의 액체를 무표정하게 감상하고 있다.
괴물은 목에 구멍이 나서 그런지 비명은 더 지르지 못했다. 그리고 목을 움켜쥐며 바닥에 쓰러져 몸부림치다 이내 움직임이 사그라들었다.
'죽었나?'
잠시 후 괴물의 형체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먼지로 변해 흩날리는 것처럼 희미해지더니 사방으로 퍼지며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뭔가 생소한 물건이 하나 놓여있었다.
무슨 돌멩이 같기도 하고 외계인의 눈 같아 보이기도 하는 그것은 희미한 초록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왠지 가져와야 할 거 같은데?'
난 열려있는 버스 문을 향해 걸어갔다. 살짝 걱정은 되었지만 내 몸은 이미 버스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바닥에 있는 그 물건을 잠시 눈으로만 관찰했다. 오묘한 초록빛이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빠져들어 갈 것 같다.
'만져도 괜찮겠지?'
방사능이 있거나 혹은 독이나 바이러스 같은 게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런 우려의 마음과는 다르게 이미 내 몸은 그것을 집어 들고 있었다.
그때 버스 옆의 작은 문이 열렸다. 마치 연료 주입구 같이 생긴 곳이다. 자세히 보니 무엇을 넣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갑자기 내 손에 들려져 있던 그 녹색의 돌멩이에서 갑자기 격한 진동이 느껴졌다. 난 놀라 그 돌멩이를 손에서 놓쳤다. 그런데 그때였다.
녹색의 돌멩이는 그대로 공중에 떠 있더니 버스의 연료 주입 구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덮개는 닫혔다.
'뭐···뭐지?'
난 당황했지만 이내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버스의 연료가 이것이었나, 그냥 경유로 가는 버스는 아닐 거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런 전개일 줄은 몰랐다.
난 다시 버스에 올라 문을 닫았다. 그리고 운전석의 계기를 살폈다.
녹색의 바가 보였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까보다 한 칸 늘어난 거 같기도 하다. 총 열 칸 정도의 상태를 표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세 칸이다. 그리고 그 옆에 Khorca라고 적혀있었다.
'코...르카?'
발음이 정확한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코르카 아껴야겠네'
난 다시 테이블로 와서 앉았다.
'그런데 왜 문이 혼자 자동으로 열린 거지? 마치 나에게 뭘 시키는 것처럼?'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문이 열린다면 버스가 의도하는 것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마도 버스가 나에게 알려줄 게 있을 때 이런 식으로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은 못 하지만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아'
난 단 하루 만에 이렇게 이상한 상황에, 그리고 버스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밖의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편안한 느낌이다. 마치 오래전에 내 세포에 새겨진 무언가를 다시 읽는 것처럼
꼬르륵
소시지 한 개로는 어림도 없었다. 난 다시 냉장고를 열었다.
'어라?'
아까 내가 꺼냈던 소시지가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무한 리필?'
아니 뭐 이런 혜자가 있단 말인가, 이 냉장고는 기본 상태의 음식들은 그대로 계속해서 공급되는 것 같다.
난 이번엔 삼겹살을 꺼냈다. 그리고 보충이 되어 있는 맥주도 다시 꺼냈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세상이 멸망했는데 난 오히려 풍족해지고 있었다.
군침을 삼키며 프라이팬에 삼겹살을 올리고 환풍기를 켰다.
그리고 맥주를 마시며 버스 창밖을 바라봤다. 아직 창고 안이다. 밖이 궁금하다. 이젠 밖으로 이동을 해봐야겠다.
그렇게 환풍기 밖으로 고소한 삼겹살 굽는 냄새가 퍼져나갔다.
Comment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