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강 하류
난 다시 일어나 창밖을 살폈다. 그곳에는 멧돼지 한 마리가 바닥에 쓰러져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왜 안 터지지?"
성희도 창밖을 살피며 말했다. 그때 태형이 소리쳤다.
"멧돼지가 엄청 많아!"
산 쪽에서 수십 마리의 멧돼지들이 몰려 내려오고 있었다. 놈들은 버스를 볼 수 없다. 그런데 하필 놈들이 향하는 경로에 버스가 있어서 몇 놈씩 버스에 그대로 충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꿰에에엑!
충돌에 쓰러져있던 놈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더니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놈의 시야에 버스가 보일 리 없었다.
난 [소음 차단] 버튼을 눌러서 껐다. 갈매기의 소음은 여전히 시끄럽게 들려오고 있었으나 그보다 더 큰 소음이 휴게소 전체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멧돼지의 울음소리와 엄청난 무게감의 발소리다.
꿰에엑!
'정말 돼지 울음소린데?'
앞서 버스와 충돌해 쓰러졌던 놈은 그 충격이 심했는지 멀리까지 튕겨 나가 있었다.
"괴물이 아니야."
자세히 살펴보니 멧돼지 괴물이 아니라 그냥 멧돼지다. 멸망 이전에도 인간에게 위협이 되던 야생동물, 바로 그 멧돼지
거대한 덩치의 멧돼지 수십 마리가 달리는 진동과 소음은 정말 엄청났다. 예전에 멧돼지 괴물들이 달려들던 때와 별반 다른 것 같지 않았다.
순간 몇 놈이 버스 근처를 스치듯 지나갔다.
"휴! 어디로 가는 거지?"
성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북쪽이여, 강릉 방향 쿨럭"
"우리만 늦을 순 없죠"
저 지구의 동물과 우리의 목적지가 다르지 않을 거다. 난 멧돼지 무리가 조금 멀어지자마자 다시 악셀을 밟았다.
버스는 휴게소를 빠져나와 다시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조금만 더 달리면 옥계IC로 빠질 수 있다. 이젠 국도를 타고 바닷가 쪽으로 가야 한다.
난 고속도로를 달리며 멀리 우측을 살폈다. 수많은 붉은 빛기둥에서는 여전히 오염 벌레들이 마치 연기처럼 아래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까 그 빛기둥에서는 더 나오지 않는 것 같아"
성희가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
"블루건 쐈던 곳? 거기선 이미 다 넘어온 거 같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끊임없이 몰려들었으면 정말 감당할 수 없을 거다.
"지금 빠져야 해"
내가 잠시 우측 멀리 빛기둥을 바라보는 사이, 뒤에서 태형이가 말했다. 난 버스의 속도를 줄이며 고속도로 출구로 향했다.
나들목에 들어서자 톨게이트까지 가는 길은 큰 원형이었다. 버스가 계속 둥글게 우측으로 달리자 오른쪽 창밖에 보이던 붉은빛 기둥 무리는 버스 정면에서 보이더니 왼쪽을 지나 뒤편으로 사라졌다.
톨게이트는 서남쪽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멀리 첩첩으로 쌓인 어두운 산이 보였다. 그 너머가 우리가 출발했던 태백시다.
그쪽을 바라보다 문득 언덕 빌라촌이 떠올랐다.
'유민이는 잘 있을까?'
전방에 옥계 톨게이트가 보였다. 요금소 건물도 무너진 곳 없이 멀쩡했고 특별히 막고 있는 차량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아 난 속도만 조금 줄이며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엇! 멈춰!"
성희의 외침에 난 급히 버스를 세웠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얇은 쇠사슬이었다. 톨게이트 너머로 잘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타이어 높이 정도로 낮게 여러 겹으로 깔려있었다.
"저게 뭐지? 왜 저런 게?"
태형이 운전석 쪽으로 걸어와 말했다.
"쿨럭, 또 강도 놈들 있는 거 아니여?"
내가 봐도 사람이 해놓은 모양새다. 그런데 그 의도가 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멸망 후에 이 길로 다니는 차량이 있을 리 없다. 사냥감도 없는데 여기서 죽치고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을 거다. 난 톨게이트 주변을 관찰하며 말했다.
"강도질할 사람이 있어야 말이죠"
이걸 설치한 사람은 다른 목적이 있는 거다.
"그냥 밀고 갑니다."
난 천천히 악셀을 밟고 버스를 다시 출발시켰다. 저 정도의 쇠사슬이라면 버스로 충분히 밀어버릴 수 있다. 버스는 현재 투명 상태다. 그리고 지금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고 해도 그건 우리에게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퉁 퉁 팅!
쇠사슬 여러 개가 끊어지며 튕겨 나갔다. 가까이서 보니 녹이 꽤 슬어있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조금 달리니 사거리다. 난 바로 바다 쪽으로 좌회전했다.
"옥계경제자유구역이라···. 생소하네"
성희가 표지판을 보며 중얼거렸다. 난 곧이어 나온 사거리에서 강릉 방향으로 좌회전했다.
"앞에 저거!"
어두운 전방에 기다란 다리가 여러 개 보였다. 이미 아는 모습, 거대 거미 괴물이다.
오래전 하얀 강아지를 물어갔던 그놈들, 읍내 이후로는 한동안 거의 보지 못했던 놈들이다. 옥계휴게소에서 사체의 흔적이 보이더니 이 근방에 출몰하는 것 같다.
난 버스를 세우고 성희에게 앞의 표지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운전 부탁해, 옥계 해변 방향으로"
"조심해"
성희는 긴말하지 않고 운전대를 넘겨받았다. 내가 일어서서 뒤편 지붕 문으로 걸어가자 태형이 일어서며 묻는다.
"뭐 도울 건 없어?"
난 지붕 문을 열며 대답했다.
"여기서 사주경계"
지붕에 올라 블루건에 앉으니 전방 좌측에서 거대 거미 괴물 십여 마리가 강릉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버스는 놈들에게 보이지 않을 테지만 내가 지붕에 올라온 이상, 주의를 끌면 바로 들킬 거다.
처음 시골집에서 저 거대 거미 괴물을 목격했을 때 사로잡혔던 그 공포가 떠올랐다.
그리고 읍내를 지나 국도에서 놈들을 버스로 들이받아 다리를 부숴버리고 무모하게 버스에서 내렸다가 죽을 뻔했던 추억도 떠올랐다.
열 마리가 넘는 저 거대 괴물을 보면서도 그다지 공포감은 들지 않았다.
단지 블루건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쏘는 게 좋을까? 정도의 작은 고민뿐
난 길게 생각하지 않고 앞서가던 놈들의 다리를 먼저 조준해서 블루건을 발사했다.
퉁 퉁 퉁 퉁 퉁
영롱한 푸른빛의 작은 구체는 포물선을 그리며 빠르게 날아갔다.
뀌이이이이
'거미 괴물의 괴성이 저랬었나? 예전엔 좀 달랐던 거 같은데···.'
맨 앞에서 걸어가던 거미 괴물 두 마리의 다리가 부러지며 바로 쓰러졌다. 그 바람에 뒤쪽에서 따라오던 거미들이 넘어진 괴물에 걸려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난 허우적대는 놈들 위주로 다리를 조준한 후 집중해서 블루건을 발사했다.
퉁 퉁 퉁 퉁 퉁
마침내 놈들 대부분이 쓰러졌다. 그런데 우측 고가 다리 너머로 넘어지는 바람에 놈들의 몸통이 고가에 가려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때 버스가 천천히 그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희가 마치 내 마음을 읽는 것처럼 버스를 몰았다. 그리고 그 방향은 우리가 가려고 했던 길이기도 했다. 바다로 향하는 길, 옥계 해변
버스가 고가 다리 아래를 지나가자 그 너머 길가에서 쓰러져 버둥거리는 거대 거미의 모습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는 내려서 검으로 하나씩 숨통을 끊었는데···.'
난 버스 지붕에서 놈들을 내려다보며 가장 가까운 놈부터 블루건 조준하고 사정없이 버튼을 눌렀다.
퉁 퉁 퉁 퉁 퉁 퉁 퉁 퉁
왜 거대 거미만 보면 분노가 다시 끊는 걸까? 주인 잃은 밥상의 충격을 잊을 만도 한데, 시골 강아지가 삼겹살이라도 다 먹었으면 이 마음이 조금은 덜 했을까?
쉬익!
그때 버스 우측에서 시커먼 다리가 하나 날아들었다.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흘렀고 난 급히 팔에 달린 액정에서 광역 방어막 버튼을 눌렀다.
캉!
날카로운 거미 다리의 끄트머리가 광역 방어막에 닿고 튕겨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높은 둔덕에서 넘어져 있던 거미 괴물 한 마리가 날 발견하고 공격한 거다.
시간은 다시 정상으로 바로 돌아왔고 난 블루건을 돌려 놈을 조준한 후 다시 광역 방어막을 껐다.
퉁 퉁 퉁
블루건 세 발을 연달아 놈의 대가리에 쏟아부었다.
파직!
놈의 초록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바로 방어막을 켜니 버스 지붕 근처까지 튄 초록의 괴물 피는 나에게 닿지 못하고 모두 아래로 흘러내렸다.
뀌이이이
다시 사방에서 거미 괴물의 괴성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방금 대가리가 터진 놈은 연기로 변해 사라졌고 코르카 세 개가 버스로 날아왔다.
난 등의 검집에 있는 검이 자꾸 떠올랐다. 그 손맛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그때처럼 그렇게 저놈들 하나하나의 숨통을 끊어버리고 싶었다.
"쿨럭, 혼자서도 잘혀"
할아버지가 지붕에 오르며 입을 열었다. 난 다시 광역 방어막을 해제하고 나머지 거미 괴물들에게 블루건을 쏟아부었다.
텅 텅 텅 텅 텅
파직 파직!
그렇게 십여 마리의 거대 거미 괴물은 코르카로 변해 사라졌다.
[242/10000]
난 팔의 액정을 확인하며 블루건에서 내려왔다. 버스의 속도가 조금 오르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난 지붕의 테이블에 앉았다.
"쿨럭, 바다 냄새가 나네"
할아버지가 내 맞은편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한밤중처럼 어두운 시골 국도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아직은 보이지 않는 바다의 내음이 실려 왔다.
그 냄새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염 벌레들로 바다가 변하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그런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멀리 보이는 거대 붉은빛 기둥만이 공포스러운 모습으로 그대로 우뚝 서 있었을 뿐
<옥계 해변 1km>
표지판을 지나 버스는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조심스럽게 국도를 달렸고 난 광역 방어막을 켜고 사방을 살폈다.
우측에는 하천이 여전히 높은 수위로 흐르고 있었다. 지금 달리는 강변 국도도 홍수의 여파로 각종 쓰레기와 진흙으로 엉망이었다. 그나마 물이 좀 빠져서 길을 달릴 수는 있어서 다행이었다.
"오?"
그때 하천에서 뭔가가 잔뜩 헤엄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수룡 괴물인가?"
할아버지가 하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거 같아요. 그런데 좀 이상해요."
"뭐가? 쿨럭"
놈들이 헤엄치는 방향이었다.
"바다로 내려가는 놈들과 다시 상류로 가는 놈들이 섞여 있어요."
할아버지도 어두운 하천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네, 내려오는 놈보다 다시 올라가려는 놈들이 더 필사적인데?"
난 멀리 바다 쪽을 바라봤다. 수십 개의 붉은 빛기둥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여전히 오염 벌레들의 움직임도 느껴졌다.
버스는 계속 달렸고 더 하류로 내려갈수록 하천에 보이는 수룡 괴물의 수는 더 늘어났다. 그 수가 너무 많아 거친 물보라가 끊임없이 일어났고 첨벙대는 놈들 때문에 사방으로 하천의 물이 마구 튀어 오르고 있었다.
내려가려는 놈들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것 같았고 거슬러 올라가려는 놈들은 필사적이었다. 그들끼리 의사소통은 전혀 되지 않는 모습이다.
마침 전방에 하천을 건너는 다리가 나타났다. 그리고 다리 위까지 수룡 수십 마리가 뛰어올랐다가 버둥거리며 다시 하천으로 빠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난 버스 아래로 외쳤다.
"성희야! 좀 잡고 가자"
내 말에 버스가 속도를 늦추더니 천천히 전방 우측 다리 입구 가까이 다가갔다.
첨벙! 철퍽!
다리 위는 놈들로 이미 야단법석이었다. 그 아래 하천에는 이미 물보다 더 많은 수룡이 발버둥 치고 있었고 전방 멀리 하천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 너머 가까운 곳에서 붉은 빛기둥 여러 개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오염된 바다를 피해 다시 도망치는 거 같아요. 할아버지는 내려가세요. 여기서 꿀 좀 빨고 가죠."
난 블루건에 앉으며 아래로 소리쳤다.
"성희야 다리 위로!"
난 팔의 액정을 다시 바라봤다.
코르카 [241/10000]
어쩌면 저 만 개의 코르카도 불가능한 수치가 아닐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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