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J1. 할 수 있는 만큼만
'자동 포격을 누를까?'
그러면 포탑의 사정거리 안에 있는 저 주 건물은 어떻게 될까? 물리적인 포탄이 아니라서 건물은 괜찮을까?
근접의 숫자는 한동안 3에 고정되어 있더니 다시 숫자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 17 < 176 < 0 ]
[ 31 < 162 < 0 ]
'뭐지?'
그때 작은 성희가 고개를 아래로 숙이며 말했다.
"바닥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요"
난 순간 엎드려 바닥에 귀를 대고 온 신경을 집중했다.
짜···. 직···. 짜직···. 쩍
바닥 어딘가에서 미세하게 찐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하에 뭐가 있는데?"
내 말에 성희도 바닥에 엎드렸다.
"하수구?"
난 운전석으로 가서 버스를 조금씩 움직이며 바닥에 있을지도 모를 맨홀 뚜껑을 찾았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맨홀은 보이지 않았다.
건물 구석 쪽에 일렬로 있는 배수구 옆으로 버스를 대고 안을 살폈지만, 우수관이 작아 뭔가가 드나들긴 어려워 보였다.
어쨌든 건물로 들어간 놈들은 대부분 지하에 모여있는 것 같다. 여기 지하가 하수구인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공간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걸 알아내려면 괴물이 이동했던 경로를 따라 주 건물로 들어갈 수밖에 없어 보였다.
지금은 계기판의 근접 숫자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 같다. 하지만 놈들이 언제 갑자기 튀어나올지 모르니 빨리 움직여야 했다.
난 다시 버스를 유민이가 있는 작은 건물 쪽으로 이동시키고 성희에게 거실의 작은 액정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동 접촉 파괴 ON]
"네가 꺼볼래?"
성희가 액정의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어? 나만 되나? 다시 눌러봐"
성희가 아무리 다시 터치를 해봐도 역시나 반응은 없었다. 조명이나 다른 버튼들은 다른 식구들이 눌러도 잘 되는데 이런 특수한 버튼은 그 위험성 때문에 안되는 것 같다.
내가 아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와중에 성운이가 액정을 만지며 말한다.
"형, 이거 조금 튀어나왔어요."
"뭐?"
그러고 보니 액정 테두리 부분의 왼편이 밖으로 조금 튀어나와 있었다. 마치 비행기 리모컨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우측에 조금 들어간 부분을 누르자 왼쪽이 더 튀어나왔다.
"이거 분리형인데?"
튀어나온 부분을 잡고 액정을 빼니, 마치 휴대용 게임기같이 생겼다. 이걸 이제야 발견하다니
"형 안 보이던 부분에도 버튼이 있어요."
아이들의 관찰력은 어른보다 좋다. 특히나 이런 게임기 같은 기기는 더더욱 그런 것 같다. 옆 부분의 버튼을 누르니 앞쪽에 조명이 켜진다.
"오! 플래시!"
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동안 어두운 곳을 들어갈 땐 정말 불편했는데 이런 휴대 기기가 떡하니 거실에 있을 줄이야!
액정 상단에 벽에 붙어있을 땐 보이지 않던 표시가 하나 들어와 있었다.
[99/100] [1 Kc]
딱 봐도 휴대 기기의 배터리다. 우리가 알던 그 전기 에너지와는 다르겠지만 코르카 1개로 100을 채울 수 있는 것 같다. 얼마나 갈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정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거다.
각종 게이지를 이제 버스 밖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터치로 조작까지 가능하다.
"버튼이 하나 더 있는데요?"
"어? 그러네?"
플래시 조명 버튼이 있던 반대편 옆쪽에도 버튼이 하나 있었다. 난 바로 눌러봤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아저씨 전화 왔어요."
작은 성희가 귀여운 목소리로 나에게 말한다. 버스 안에서 벨 소리가 들렸다. 주변을 살피니 액정이 꽂혀있던 부분 안쪽에 파란 버튼 하나가 점멸하는 게 보였다.
"성운아, 눌러봐"
아이가 작은 손으로 그 버튼을 누르자 버스 안에서 살짝 뭔가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점 커졌다. 하울링이다.
"통신인 거 같은데?"
휴대 액정을 들고 있던 내가 중얼거리자 내 음성이 버스 안에서 하울링 소리와 함께 크게 들렸다.
"오!"
계속 반복되는 소리가 커지는 바람에 난 서둘러 휴대기기의 버튼을 눌렀다. 바로 통신은 종료되었다.
"버스 진화되고 생겼을 텐데 이걸 이제서야 알았네"
성희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잠시 그 휴대기기를 살피고 있는데 뒤쪽에 팔에 고정할 수 있는 벨트 같은 게 있었다. 방패를 왼팔에 끼고도 추가로 고정할 수 있었다.
팔에 고정하니 플래시와 통신 버튼도 딱 좋은 곳에 있었다. 두 손이 자유로우니 너무 편했다. 마치 신기한 장난감이 생긴 것 같은 아이의 설렘을 느꼈다.
"유민이한테 다녀올게."
난 버스에서 나와 작은 부속 건물 쪽으로 뛰어갔다. 모퉁이를 돌자 아까 우리가 드나들었던 지하로 향하는 깨진 유리창이 보였다.
난 플래시가 켜진 상태로 지하로 내려갔다. 약하게 코르카의 빛으로만 볼 수 있었던 지하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형 밖에 무슨 일이에요?"
유민이가 반장이라는 아이 옆에서 앉아 있다가 날 보더니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반장의 어머니는 다시 세워진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 어머니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반장은 날 발견하고는 어색하게 인사를 한다.
"어? 어떻게?"
반장 어머니가 눈을 뜨고 있었다. 내가 놀란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유민이가 입을 열었다.
"박카스 병에 있는 약물 덕분이에요"
"뭐?"
"놈들이 반장이 죽은 줄 알고 폐기장에 버렸데요. 이상한 괴물들이 와서 쌓인 시체를 뜯어먹는 곳이라던데"
그때 반장이 입을 열었다.
"거기서 약병이 하나 손에 잡혀 무작정 마셨어요."
"창고에는 어떻게?"
"폐기장에서 괴물 한 놈 죽이고 발버둥 치다가 작은 통로를 발견했어요. 한참을 기어 올라왔는데 쇠창살로 막혀있어서"
"뜯어버렸구나!"
반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선을 다시 그녀의 어머니에게로 돌렸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아직 말은 제대로 못 하는 상태였다.
내가 다른 침대의 사람들을 살피며 걷자 유민이가 입을 열었다.
"형"
"말해"
유민이는 나의 팔을 잡더니 구석 쪽에 있는 한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나와 비슷한 연배의 여성이 누워있었다. 아까 내가 얇은 천을 덮어줬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누군데?"
아까 어두운 초록의 코르카 빛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밝은 플래시의 빛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자 누군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성운이 엄마예요."
작은 성희가 엄마를 많이 닮았다.
"의식은?"
"아직요. 약물을 입으로 조금 넣어드리긴 했는데"
"수액은 뺀 거야?"
"네, 저거 영양제 말고도 수면제 성분까지 들어있데요."
수액 주삿바늘 빼면 다 죽는다고 했었던 수다쟁이의 말이 떠올랐다. 죽는다는 건 혹시 수다쟁이와 괴물 같은 인간들 이야긴 아니었을까? 수면마취제를 계속 꼽아놔야 하니까?
고개를 돌려 반장 쪽을 살피자 유민이가 말했다.
"아까 침대에서 떨어질 때 수액 바늘이 뽑혔나 봐요. 팔에 상처가 좀 생기긴 했지만 괜찮으세요."
난 반장에게 다가가 물었다.
"지영이라고 했지?"
"네"
"폐기장에 시체가 많았어?"
그녀의 눈빛이 탁해졌다.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상황이 연상되는 느낌이었다.
"괴물이 있었다고?"
"네, 시체를 뜯어먹고 있었어요."
"어떻게 생겼지?"
"깜깜해서 소리만 들었는데, 저를 먹는 건 아니었으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고요. 생김새는 모르겠는데···. 소리가 좀 그랬어요."
"소리가 어땠는데?"
"그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귀에 그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짜···. 직 짜···. 악 쩍 쩍
"아 맞아요. 이 소리"
너무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가던 반장도 분위기를 인지하고는 눈이 동그래지며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확 돌렸다.
그 소리는 창고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쇠창살을 뜯고 들어왔다고?"
내 음성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백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유민이도 긴장한 눈빛으로 창고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난 팔의 액정을 살폈다.
[ 11 < 182 < 0 ]
이건 버스의 기준으로 괴물의 위치를 표시하는 건가? 아니면 분리하고 나면 착용자의 기준일까?
난 액정을 보면서 통신 버튼을 눌렀다. 잠시 대기음이 들리더니 이내 성희의 음성이 들렸다.
- 왜?
"근거리 숫자 몇이야?"
- 잠시만 대시보드에서 확인할게.
잠시 후 그녀의 대답이 들려왔다.
- 네 마리
"알았어, 옆문 좀 열어놔 줘"
잠시 성희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다가 이내 짧은 대답이 들려왔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면서도 굳이 묻지 않는 느낌이다.
- 열어놨어
"고마워"
버스와 내 휴대 액정의 표시가 다르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이게 더 유용할 듯싶었다. 어쨌든 지금 내 가까이에 11마리···. 아니 13마리가 있다는 뜻이다.
[ 15 < 178 < 0 ]
젠장 계속 늘어난다. 난 판단을 빨리해야 했다.
"형, 무전기에요?"
난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버스에 추가로 태울 수 있는 사람은 두 명이다. 탈출만 시켜주고 다시 추방하면 되니 그리 위험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유민이와 아이들의 엄마 정도면 잠깐 태우는 건 괜찮을듯싶었다.
문제는 반장과 그의 엄마다. 이들까지 태울 공간은 없다.
'아니면···. 아! 그러면 되겠군!'
그때 수많은 침대에 여전히 누워있는 의식불명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 길게 하지 말고 움직이자
"따라와! 반장 너도!"
난 창고 안으로 뛰었다. 플래시로 비추니 반장이 말한 구멍이 구석 쪽에 있었다. 사람 한 명이 충분히 통과할 수 있는 크기였다. 그리고 도저히 장비 없이는 자를 수 없을 것 같은 두꺼운 쇠창살이 엿가락처럼 휘어져 뜯겨 있었다.
"약병 최대한 챙겨!"
구멍에서는 찝찝한 찐득이의 소리가 터널 안을 울리며 조금씩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우리는 최대한 약병을 챙겼다. 난 바닥에 굴러다니는 쇠창살 한 개도 주웠다.
"나가자!"
우리 모두 창고를 나오자 난 바로 철문을 닫았다. 그리고 자물쇠를 채우는 구멍에 쇠창살을 밀어 넣었다. 두꺼워서 안 들어가면 어쩌나 했는데 딱 맞게 끼워졌다.
"반장! 구부려!"
내 말의 의미를 잠시 고민하는 듯한 반장은 이내 눈을 반짝이더니 뛰어와 문이 열리지 않도록 쇠창살을 구부렸다.
쾅!
그 순간 철문에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 충격에 철문에 미세한 자국이 생겼다.
"침대 사람들 수액 바늘 다 빼고 약물 먹이자!"
우리만 나가서 편하게 버스에 탑승하고 나머지 두 명은 지붕을 지키며 포탑으로 괴물을 모두 몰살시키는 방법도 있었다.
그건 편하고 안전한 길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살릴 가능성이 있는 수많은 사람을, 비록 그들이 각성자라 할지라도 이대로 내버려 두고 나갈 수는 없었다.
저 철문이 얼마나 버틸지도 모르고 우리가 이들을 전부 들고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이제는 이들이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쾅! 쾅!
철문이 오래 버티진 못할 것 같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