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J1. 황지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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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 연못은 학생 때 체험학습으로 와본 곳이다. 크진 않지만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신비로운 초록 물결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었다.
'저 엄청난 물은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황지 연못의 느낌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 하나만 빼고
정체불명의 괴생명체가 수면으로 몸통 일부만 드러낸 채 꿀렁거리고 있었다.
"저게 대체 뭐야?"
연못 주변에는 이미 꽤 많은 꺽다리가 모여있었다. 그런데 놈들은 일정 거리 이상은 연못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연못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놈들도 여럿이다.
그 모습이 마치 물에 닿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 같아 보였다.
그때 수많은 희미한 그림자가 연못과 주변에서 아른거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엄청난 수의 날괴물이 공중에서 활공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뀌이이이이
갑자기 연못 주변에 있던 꺽다리들이 동시에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너무 큰 소음에 난 급히 액정의 [소음 차단]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마치 마법같이 노이즈 캔슬링이 작동했다.
"휴! 이제 좀 살 것 같네!"
밖의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마치 음소거를 한 영상을 보는 것 같았다. 사방이 고요해지자 괴성을 지르는 꺽다리들의 움직임이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흉측한 얼굴에 달린 괴기스러운 입은 조금만 벌어져 있었다. 그 속 깊은 곳에서 출발한 소리는 입 안에서 공명하듯 울리는 것 같다. 들리진 않았지만 마치 아직도 귀에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입 근처 부분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 진동은 괴기스러운 얼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왜 단체로 괴성을 지를까?"
성희가 놈들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때 하늘에서 활공하던 날괴물들이 동시에 연못 쪽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연못에 비치던 햇빛이 놈들에게 완전히 가려지자 물속에 있던 괴생명체가 심하게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호오"
우리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괴생명체는 점점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형체의 절반이 물 위로 떠 올랐다.
붉은색과 탁한 초록색이 섞인 반투명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원형의 그 생명체는 무슨 진화 중인 번데기 같은 느낌이었다.
꿀럭 첨벙!
심한 꿀렁거림에 연못의 물이 주변으로 튀자 놀란 꺽다리 몇 마리가 뒤로 더 물러섰다.
꿀럭 꿀럭 첨벙!
괴생명체는 더욱 심하게 꿀렁거렸고 날괴물들은 아래로 조금 더 내려와서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꺽다리들도 날카로운 칼날 발톱을 세우며 잔뜩 긴장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던 그 순간
푸아아아악!
괴생명체의 몸체가 순식간에 터져나가며 녹색의 찐득한 점액질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그 액체와 함께 선홍색의 고기 살점 같은 물체가 버스의 창문까지 튀었다.
"윽! 역겨워"
성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찐득한 액체가 버스의 유리창을 다 덮어 잠시 밖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이내 그 점액질은 점점 버스 아래로 흘러 내려갔다.
난 [소음 차단] 버튼을 눌러 끄고 다시 외부 소음이 들어오게 했다. 소리도 일종의 정보라 되도록 놓치고 싶지 않았다.
파직 파직 파직
그러자 연이어 뭔가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버스의 포탄이나 접촉파괴에 죽는 괴물의 소리가 아니다. 자동 포탑과 접촉파괴는 아직 꺼놓은 상태다.
창문의 이물질이 거의 흘러내리자 밖이 다시 보이며 그 소리의 진원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터져나간 괴생명체는 일종의 알집 같은 거였나 보다. 껍질과 그 안을 채우고 있던 액체는 모두 터져나갔고 그 안에는 수박 정도 크기의 알 같은 게 수십 개, 아니 백 개는 넘게 꾸물거리고 있었다.
그 알들이 하나씩 터지며 나는 소리였다. 알을 터트리고 꾸물거리며 나오는 건 작은 생명체였다. 마치 둥근 머리에 길고 작은 몸뚱이를 가지고 있었다.
삐이이이이이
그 작은 새끼 괴물이 질러대는 괴성은 이전의 다른 괴물들과 조금 달랐다.
하지만 꺽다리의 그것처럼 청각 세포를 후벼파며 마음속 깊은 곳의 공포심을 깨우는 듯한 느낌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소리에 반응하듯 꺽다리도 다시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난 다시 [소음 차단] 버튼을 누르려다 이상한 느낌에 멈췄다.
묘하게 다른 두 가지 괴성은 희한하게 서로의 소리를 상쇄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까 꺽다리의 괴성만 들릴 때와 다르게 견딜만했다.
"참을 만하면 들어봐야지, 소리도 일종의 정보니까"
내가 중얼거리자 성희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처음 보는 괴물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 보는 놈들이네, 귀여워서 무섭다."
알을 터트리며 작은 괴물이 기어 나오자 날괴물 한 마리가 순식간에 아래로 내려오며 새끼 괴물을 낚아채고는 공중으로 솟구쳤다.
"죽이려는 건 아닌가?"
날괴물들은 갓 부화한 새끼 괴물들을 연이어 낚아채고는 멀리 날아갔다.
그런데 타이밍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덩치가 있는 날괴물이 연이어 좁은 공간으로 몰려드니 효율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부화하자마자 바로 낚아채지 못한 새끼 괴물들은 전부 연못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무슨 괴물의 왕국 보는 거 같아"
내가 중얼거리자 성희가 슬쩍 웃는다.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싸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 너머 조수석 창밖에서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언뜻 본 거 같다.
"할아버지가 건물에서 나왔나?"
내가 옆을 보며 말하자 성희도 창밖을 살폈다. 그때 버스 바닥에서 지긋지긋한 음성이 들려왔다.
"강릉 가자"
"하아"
난 버스를 앞뒤로 조금씩 움직였다. 그러자 노인은 버스 옆으로 슬그머니 나오더니 옆 건물 입구로 빠르게 이동했다.
아마도 날괴물의 사각지대를 찾아서 들어간 것 같은데 날괴물들은 이미 모두 바쁘다.
노인은 날 향해 뭐라고 계속 중얼거렸다. 괴물의 괴성 때문에 잘 들리진 않았지만 마치 생생히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강릉 단어만 들어도 이젠 현기증이 나"
"나도"
그렇게 중얼거리는 와중에 갑자기 물속에서 수십 마리의 도마뱀같이 생긴 괴물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아니 도마뱀보다는 도롱뇽의 모습에 더 가까워 보인다.
아까 부화하고 물속으로 뛰어 들어갔던 놈들인 것 같다.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리도 자라 있었고 몸집도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삐이이이!!!
괴성은 여전히 거슬렀지만 조금 더 성숙해진 느낌이다.
연못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꺽다리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멀리서도 괴물의 표정과 생각이 보인다. 놈들은 물 쪽으로 달려들지도 못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활공하던 날괴물이 조금 성장한 도롱뇽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귀엽게 생긴 괴물의 머리를 잡으려는 순간 그 귀여운 커다란 눈망울이 순식간에 붉게 변하더니 작은 입을 벌렸다. 그때 그 입에서 가느다란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혀?"
시커멓고 가는 실 같은 혀가 순식간에 길게 튀어나오더니 날괴물의 발목을 휘감았다.
뀌이이익!
날괴물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리더니 놈의 발목이 그대로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오! 저건 생각 못 했는데!"
우리는 마치 괴물 사파리 투어를 하듯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주변의 괴물 때문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멀리서 애처롭게 우리를 바라보는 노인의 시선도 잊은 채 우리는 도롱뇽 괴물과 날괴물의 싸움을 구경했다. 싸움이 아니라 학살인가?
알에서 갓 부화한 새끼들 일부는 여전히 날괴물이 낚아채서 어디론가 날아갔다. 아마도 더 진화하지 못하게 막은 거 같다. 어디선가 뜯어먹었거나
발목이 잘린 날괴물들이 전부 공중으로 높이 날아오르자 도롱뇽 괴물들은 다시 깊은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물 위로 잘린 날괴물의 발이 마치 닭발처럼 둥둥 떠다녔다.
"매운 닭발···."
내가 중얼거리자 성희가 싸늘한 시선으로 날 째려보며 말했다.
"그만해"
"알았어"
난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생각에 잠겼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던데 다음 버스 진화 때 혹시 생기지 않을까?
뀨우우우우우
"이건 또 무슨 소리?"
이건 물속에서부터 시작된 소리 같다. 연못의 물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발목이 잘린 날괴물들은 그대로 어디론가 날아갔는지 하늘에서도 보이지 않았고 멀쩡한 날괴물 두 마리만 허공에서 활공하고 있었다. 마치 감시하는 것처럼
수십 마리의 꺽다리들은 조금씩 주춤주춤 연못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꺽다리가 저렇게 긴장하고 있는 건 처음 본다.
뀌이이이이이
그때 꺽다리 한 마리가 공중의 날괴물을 향해 괴성을 질렀다. 그러자 날괴물 하나가 마치 알아들은 듯 급히 어디론가 날아갔다.
"아무래도 지능은 있는 거 같단 말이지"
이제 하늘에는 한 마리의 날괴물이 있다. 그리고 그 날괴물은 연못에만 정신이 팔려있다.
"강릉"
내 싸한 기분은 틀리지 않았다. 기회를 엿보던 강릉 노인이 버스 옆에 다시 나타났다.
"가자고"
운전석 창문으로 연못을 구경하던 나는 내 시야를 막고 있는 노인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할아버지를 어떻게 믿죠?"
"강···. 뭐?"
노인은 갑작스러운 내 말에 계속 조르려던 말을 멈추고 날 바라봤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입을 열지 않았다. 난 그를 다그쳤다.
"왜 각성을 숨기셨어요? 간밤에 그 난리가 났을 때 돕지도 않고"
난 그가 정말 버스나 우리를 노리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그런 의도가 있었다면 기회나 방법은 이전에도 많았다.
"나도 몰랐어."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 나와 성희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오늘 아침에 몸이 이상해서···."
"네?"
"내가 죽을 때가 된 줄 알았어."
그는 허망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새벽부터 갑자기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가더라고, 활기가 넘치고···. 그래서 죽기 직전에 기운이 갑자기 솟는 줄 알았어, 왜 그런 거 있잖아. 회광반조"
회광반조가 뭐더라, 들어본 거 같은데···. 무협지에서 봤었나?
그의 말을 들으니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괴물과의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갑자기 오늘 아침에 강릉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던 일까지
"아까 정말 죽는 줄 알았어, 도끼 놈한테"
그러면 그는 오늘 새벽에 각성한 건가? 그리고 그 능력을 처음 사용한 게 뱃살 도끼 놈에게 죽을 뻔했을 때였고?
그때 노인의 뒤로 길고 시커먼 무언가가 마치 뱀처럼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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