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서늘한 길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초록 방벽이군."
터널에서, 그리고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본 초록 방벽이다. 크기만 거대할 뿐 분명 같은 거다.
"뭐? 너도 아는 거야?"
그리고 이내 태형은 내 생각을 읽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초록 방벽에 레드홀이 생기면 넘어갈 수 있는 거 같다. 태형이 넌 그때 역으로 넘어왔었고"
그러자 성운이 입을 열었다.
"저도 그 모습이 자주 떠올라요. 그게 뭔지 그동안 이해할 수 없었는데···."
둘의 공통점은 마시울의 기억을 자의든 타의든 받아들였다는 거다.
마시울의 난해하고 고통스러운 그 기억 중에서 그들이 공통으로 자주 떠올렸다는 건 그 기억의 원래 주인에게도 같은 상황이지 않았을까?
마시울이 가장 많이 생각했다는 건 놈이 감추고 싶어 했거나 혹은 지키고 싶어 했다는 거
놈에게 가장 중요한 거다.
난 근처에 여전히 널브러져 있는 마시울의 사체 반쪽을 바라봤다.
'저 허망한 새끼는 뭘 지키고 싶었던 걸까?'
그가 원하는 건 이 멸망한 세계가 그대로 유지되는 거다. 그걸 바꾸어 생각하면 그곳에 그가 원하지 않는 사태를 만들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곳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태형의 말이 배경처럼 어지럽게 흘렀다.
"잠수복이나 산소통이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깊어, 게다가 득실대는 거대 생명체들이 우리를 내버려 둘리 없고"
그가 말하는 문제들은 우리 버스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거다. 게다가 난 이미 그 깊은 호수에 다녀온 적이 있다. 물론 위험하긴 했지만
"호수 바닥은 갔다 왔는데"
내 한마디에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폭포수 소리와 약하게 불어오는 바람 소리만이 어색하게 흘렀다.
"무슨 말씀이세요? 거길 다녀오셨다고요?"
중년의 성운이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난 잠시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한 후 내가 이곳에 떨어지고 겪은 이야기들을 짧게 간추려 설명했다.
"우와! 버스가 잠수까지 돼요? 이전에 물에 뜨는 것도 정말 놀랐는데!"
중년의 사내가 아이처럼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저도 같이···."
그때 태형이 흥분한 성운이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녀석은 바로 현실을 자각한 듯 말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잠시 그의 얼굴에 스쳤던 소년의 모습도 사라졌다.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나는 이미 결심을 한 상태다. 그곳에 마시울이 원하지 않는 일이 있다. 그건 또한 내가 원하는 일이다.
"언제 적의 기억인지 알 수 없으니 그게 아직도 있을지는 확실치 않아"
태형의 걱정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
"가보고 별거 없으면 돌아오지, 뭐, 여기서 딱히 바쁜 일은 없어서"
어색한 농담에 그들은 쓰게 웃었다. 나도 어색하게 웃었다. 그곳에 짐작과 달리 절망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너희들은 이제 어쩔 거야?"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태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너도 마시울의 진짜 모습을 봤으니 알 거야.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또 언제 널 죽이려 들지 몰라"
그러자 성운이도 입을 열었다.
"걱정마세요. 우리는 여기서 살면 돼요. 아참 그리고 그 병신같은 것들이 오염물질이 이미 지구로 넘어가고 있는데 거기로 도시를 옮겼어요. 이게 마시울의 원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병신 새끼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성운이 갑자기 속에서 뭔가 북받치는지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멈췄다. 지난 세월 동안 그는 고통을 버티는 그만의 방법을 터득한 것 같다. 마음이 짠했다.
버스 지붕에 태워서 호수 근처까지라도 같이 가자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만뒀다. 잘못하다가 버스의 접촉 파괴라도 일어나면 그들은 정말 영원히 사라질 거다.
그들의 상태를 조금이라도 되돌릴 방법이 있는지도 묻고 싶었으나 그것도 그만뒀다. 가능한 방법이 있었다면 그들이 시도해 보지 않았을 리 없었다.
난 둘을 바라보며 계속하고 싶었던 질문을 꺼낼지 고민했다.
우리 할아버지와 희성이 소식을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태형이도 내 이런 생각을 알고 있을 거다. 대화하면서 계속 눈이 마주쳤으니까, 생각을 읽은 녀석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녀석이 말하지 않는 건 정말 모르거나 혹은 말하고 싶지 않은 내용일 거다.
내가 말없이 잠시 그를 바라보자, 그도 어렵게 입을 열었다.
"희성이 소식은 나도 성운이도 몰라, 마시울이 여기로 다시 오고 내가 레드홀로 넘어간 그날 사라진 거 말고는···."
그도 몰랐던 거다. 이제 하나 남았다.
"그리고 너희 할아버지는···."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마시울의 기억이 해석이 전혀 되질 않아"
그의 말에 실망보다는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충격적인 이야기보다는 나으니까
난 일어나며 그들에게 말했다.
"다녀올게, 천천히 먹어"
쟁반에는 아직 음식이 반 이상 남아있다. 버스에서 식량을 잔뜩 꺼내와서 그들에게 안겨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그러면 뭔가 끝나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
여기서도 내가 다시 돌아올 곳이 있었으면 했다. 정말 그럴 수 있을지 확신은 없다. 그저 그런 느낌이 필요했을 뿐
그들이 따라서 일어나려 하자 내가 말렸다.
"다 먹기 전에 올게."
난 터벅터벅 다시 버스로 들어갔다. 창밖으로 시선은 옮기지 않았다.
"그게 가능하다면···."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액정을 확인했다.
코르카 [5745] [2.17/H]
보트 모드도 그렇지만 잠수 모드는 정말 코르카 소모량이 많다.
호수의 깊은 곳 어디를 찾아봐야 할지도 단서가 전혀 없다. 중요한 건 코르카가 바닥나기 전에 찾아야 한다는 것, 게다가 물속에서 불청객이라도 만나면 그 제한 시간은 훨씬 더 줄어들 거다.
그런데도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이미 이 길은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창밖의 두 사내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들도 딱히 더 뭐라고 입을 열지는 않았다.
내가 그들을 알고 지낸 시간보다 저 둘이 보낸 시간이 더 많을 거다.
난 핸들을 돌리고 악셀을 밟았다. 폭포는 여전히 저 높은 어둠 속에서 무심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동굴로 향하는 경사로를 잠시 바라보며 그녀의 마지막 뒷모습을 떠올렸다.
버스는 서서히 속도를 높이며 흐르는 강물을 따라 하류로 향하기 시작했다.
"하아"
문득 내 입에서 하얀 김이 나오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창문에 서리가 끼여 안 그래도 어두운 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서리 제거 기능이 작동되는지 바람 소리가 앞 유리 근처에서 들려왔다.
핸들에서도 냉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난 운전석 옆 창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마치 얼음을 만지는 것 같은 차가움이다. 그때 창문 너머로 밖의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게 보였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류로 더 내려가자, 숲에는 이미 눈이 꽤 많이 쌓여있었다.
'폭설이라니'
식충 식물도 추운지 전부 입을 다물고 있었고 움직이는 생명체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강물의 흐름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버스는 어느새 우리가 처음 물에 들어왔던 지점까지 도착했다. 이제 육로로 이동해야 한다.
버스가 땅에 닿자, 보트 모드가 해제되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우우웅
버스는 다시 초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여럿이 같이 지나왔던 길을 혼자 되짚어가고 있으니, 기분이 착잡했다.
딱히 외롭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마음 한쪽이 서늘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를 볼 수 없는 상실감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이 행성에 혼자 남겨진 그런 기분
좀 전에 같이 있었던 태형과 성운이조차 이젠 인간과 괴물의 경계에 있었고 지금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나뿐인 것 같은 느낌
버스가 완만한 언덕의 정상을 넘어서자 멀리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덮어버릴 듯 내리고 있었다.
시커먼 재만 남았던 악마 숲도 이미 새하얀 눈으로 완전히 뒤덮여 있었고 호수 위로 내리는 함박눈의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달빛이 구름에 가렸지만, 하얀 눈으로 덮인 세상은 마치 대낮 같았다.
"거의 다 왔군."
혼자 있으니, 혼잣말이 늘고 있다. 생각하는 건지 말하는 건지도 이젠 구분이 되지 않았다. 딱히 구분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난 잠시 버스를 세우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순간 엄청난 추위에 온몸이 그대로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바람에 노출된 피부가 따가웠다.
눈은 버스 지붕에도 이미 많이 쌓여있었고 여전히 하늘에서는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눈송이가 내 얼굴과 손에 닿아 녹았다. 이 느낌은 내가 살던 지구와 다르지 않았다.
난 멀리 호수와 그 부근을 바라봤다. 이 세상에서 움직이는 건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뿐이었다.
앙상해진 악마 숲 너머로 보이는 호수는 수평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처음 저기서 빠져나올 때는 짙은 안개 때문에 규모를 알 수 없었다.
'바다 같네'
우리의 지구에도 마치 바다 같은 거대한 호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여기는 강원도와 지형이 거의 비슷하다고 했다. 강원도에 수평선이 보이는 호수는 없다.
난 굳이 이해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세상이 멸망하고 나서 생긴 습관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심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다.
나는 다시 버스 아래로 내려가 운전석에 앉았다.
"가보자"
나는 핸들을 꼭 틀어쥐고 악셀을 살짝 밟았다. 이제 내리막이다. 그리고 땅도 울퉁불퉁하다. 난 최대한 핸들을 세밀하게 움직이며 버스가 뒤집히지 않도록 운전했다.
유리창 너머에는 괴물도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꺽다리의 거대 도시가 넘어갔으니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돌아가던 그쪽 세상도 난리가 났을 거다.
오염 벌레와 괴물, 그리고 지구의 생명체 중에서 누가 살아남았을까?
생각보다 지구의 생명력은 강하다. 비루한 몸으로 똥만 싸대는 인간 말고도 지구에는 세균과 바이러스부터 거대 동물과 식물들까지 다양한 생명체가 살고 있다.
오염 벌레와 꺽다리의 도시 따위가 넘어갔다고 해서 정말 모두 멸종하고 멸망했을까?
가서 눈으로 확인하지 않은 한 내가 알 방법은 없다.
그리고 혹여 완전히 멸망하진 않았더라도 예전의 지구 또한 아닐 거다.
내가 지금 향하고 있는 저 호수 깊은 곳에 있다는 그곳, 거기가 만약 나의 지구로 돌아가는 길이라면 그래서 내가 다시 버스와 함께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거다.
할아버지도 친구들도 모두 곁에 없지만 버스만 건재하다면 그리고 내가 살아만 있다면 다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거다.
혹여 지구가 정말 완전히 멸망해 버렸다면, 괴물이나 혹은 오염 벌레가 다 지배하는 세상으로 변해버렸다고 한다면
놈들의 대장 목이라도 따버릴 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다시 호숫가에 도착했다. 난 잠시 버스를 멈추고 거실로 걸어가 수납장 문을 열었다.
'역시'
그 자리엔 아까 마시울이 호수로 던져버린 화살통과 내 검집이 그대로 깨끗하게 돌아와 있었다. 게다가 아까 마시울의 면상에 던져버린 내 활, 각궁까지 그대로 깨끗하게 세워져 있었다.
난 검집을 꺼내 등에 메고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가 악셀을 밟았다.
우웅
버스는 호수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