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J1. 도계 1터널
오른쪽 길 너머의 마을은 대부분 물에 잠겨 지붕 일부만 보였다.
난 학생이 바라보는 곳을 유심히 관찰했다.
범람한 흙탕물 수면 위로 뭔가의 꼬리 같은 게 나왔다가 사라졌다.
"본 적 있어?"
나라에게 물었으나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게 뭔지 전혀 모르는 눈치다.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구의 생명체는 분명 아니다. 저런 거대한 게 물속에 있다면 보트 상태의 버스가 뒤집힐 수도 있다.
"터널로 갈게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진주씨는 바로 테이블의 우산을 폈다. 괴물의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겠지만 심리적으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긴 했다. 마치 이불만 뒤집어쓰면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처럼
"지붕 잘 부탁드려요."
"부탁 필요 없다."
할아버지는 터널 입구를 노려보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난 지붕 출입구로 걸어가다 갑자기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내 뒤통수에 대고 뭐라고 말하려던 할아버지가 멈칫하더니 내 시선을 피했다.
버스 안으로 내려가니 성희도 예상했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터널이지?"
난 고개를 끄덕이며 운전석에 앉았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버스를 바로 출발시킬 수 없었다.
"왜?"
성희가 묻는다.
"점심 먹고 가자"
저기 들어가서 어떤 일을 겪을지 모른다. 그 전에 밥이라도 든든하게 먹으면 좋을 것 같다.
"먹을 수 있을 때"
내 말에 성희가 잠시 날 바라보더니 일어서며 말했다.
"밥으로 먹자"
그녀는 주방으로 가서 즉석밥을 돌리고 반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도 프라이팬을 인덕션에 올리고 소시지와 당근 양파를 볶았다.
"뭐해?"
버스가 움직이지 않자 지붕에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환풍기를 깜박했네!"
환풍기를 트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붕에서 더는 질문이 들려오지 않았다.
쟁반에 음식을 잔뜩 담은 후 우리는 지붕으로 올라갔다.
"식사하고 가시죠"
테이블에 밥과 반찬이 놓였다. 제일 인기 있는 건 소시지 채소볶음이다. 편의점에서 챙긴 즉석 국까지 데울까 했지만, 지붕으로 옮기기도 불편했고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할 듯싶었다.
"너무 맛있어요!"
대단한 반찬은 없더라도 따뜻한 흰 쌀밥에 이런 반찬은 멸망 이전의 내 자취 생활과 비교해도 나쁘지 않은 점심이다.
일상 같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다 같이 테이블을 정리하는데 진주씨가 나에게 물었다.
"아까 커피 챙기시는 거 같던데"
"아! 카페 하셨었죠?"
"네, 뜨거운 물만 좀 준비해주시면 제가 내릴게요."
난 버스로 내려가 마트에서 챙겨놨던 스테인리스 주전자에 생수를 붓고 인덕션 위에 올리고 원두와 그라인더 그리고 드리퍼와 필터를 모두 챙겨 지붕으로 올려줬다.
"물은 데우고 있어요."
난 다시 아래로 내려가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버스에 커피포트도 있으면 좋을 텐데···. 세탁기, 건조기, 커피 머신, 커피포트···.'
기다리는 동안 계속해서 주문을 외웠다.
'어?'
갑자기 버스에서 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착각인가?'
아니면 이제 그만 좀 하라는 경고일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해도 좀 지나치긴 한 것 같다.
물이 끓기 시작해서 조심스럽게 주전자를 들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준호씨가 그라인더로 원두를 다 갈아 놓았다. 저 정도 양으로는 두 잔 정도밖에 나오지 않겠지만 뭐 또 갈면 되니까
"드립 커피도 같이 하셨나 봐요."
내가 주전자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에쏘보다 드립을 위주로 했어요. 로스팅한 지 좀 된 원두라 향이 거의 날아가긴 했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고요. 아참 그라인더 굵기도 제가 맞춰놨는데 취향에 맞을지는 모르겠네요."
그녀가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신선한 원두는 아니지만 뜨거운 물이 커피로 조금씩 쏟아지자 특유의 커피 향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얼마 만이야!"
나라가 드리퍼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버스 아래에 있던 성희까지 지붕으로 올라왔다.
"저는 원두 더 갈게요"
준호씨가 빈 그라인더에 원두를 채우더니 다시 갈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와 중학생을 제외한 모두는 드립커피 한 잔씩을 손에 들고 지붕 어딘가에 앉아 잠시 휴식을 즐겼다.
카페에서 챙겨놓은 병 주스를 들고 할아버지와 학생에게 다가갔다.
주스 병을 드리는데 할아버지는 별말씀이 없다. 언뜻 보니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다.
"어디 안 좋으세요?"
할아버지는 힐끗 날 바라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감기 기운이 좀 있네"
"침대에서 좀 쉬실래요?"
할아버지는 손을 내 저으며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니야."
"터널만 지나면 좀 쉬세요."
난 학생에게도 주스 병을 건네며 물었다.
"너 이름이 뭐였더라?"
"아···. 저···. 은결이요. 김은결"
"그래 반갑다."
그때 옆에 있던 은결이 엄마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주은혜에요. 결이 엄마라고 다들 불렀지만"
"아···. 네···. 전 한진우라고 합니다. 아 얘기했었죠."
얼떨결에 통성명이다. 그날 밤 다들 소개할 때 아주머니와 학생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사실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거 같다. 이름을 알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더 신경이 쓰인다. 편의점에 내려드리면 다시 못 볼 사이라고 생각했었다.
커피가 식고 더는 향이 느껴지지 않을 때쯤 남은 커피를 쭉 들이켜고 일어섰다. 하늘의 해는 아직 중천이다.
"이제 가볼까요?"
편안하면서도 불안했던 커피 타임은 끝났다. 이제 다시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다들 대답은 없었지만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마음의 준비를 하는 듯 보였다. 그들의 눈빛이 그랬다.
난 할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뒷걸음질로 지붕 문으로 향했다.
"넘어질라"
할아버지의 비웃음을 바라보며 대답 없이 버스 아래로 내려갔다. 연신 작은 기침을 하는 그의 모습이 조금 신경 쓰였다.
운전석에 앉아 어두운 터널 안쪽을 바라보니 최면에 걸리는 기분이다.
얼른 들어오라고, 들어오고 싶은 거 이미 다 알고 있다고, 괴물의 목과 몸통과 팔과 다리를 검으로 베어버리는 손맛을 또 느끼고 싶은 거 다 안다고
마치 그렇게 날 유혹하고 있는 것 같다.
'정말 그런 건가?'
어차피 터널로 가게 될 걸 알고 있었다. 난 입술에서 묘한 떨림을 느끼며 악셀을 밟았다.
그때 문득 액정의 [투명] 버튼이 눈에 들어왔다.
투명 상태는 지붕의 사람들 때문에 소용이 없다. 게다가 인간형이라면 더더욱 투명이 의미 없다.
'각성자와 인간형에도 안 보이는 투명은 안 될까?'
버스에 소원을 빌려다 생각을 접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터널의 입구에 다다르자 터널까지 물에 잠겼던 흔적이 보였다.
'어디까지 잠겼던 걸까? 엄청난 홍수가 지나갔는데도 여전히 안에 괴물이 있을까?'
그건 곧 알게 될 거다.
터널 입구를 지나 조금 더 들어가자 바로 어두워졌다. 사이드미러에 뒤쪽 터널 입구에서 들어오는 빛이 보였다.
조금 전에는 터널의 어둠이 날 유혹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저 뒤편의 밝은 빛이 날 조롱하고 있는 것 같다.
아직은 다시 돌아갈 수 있어! 그저 조금 후진만 하면 된다고, 아직 늦지 않았어!
사이드미러를 바라보며 드는 잡생각에 나도 모르게 버스를 거의 멈춘 것 같다.
"가자고! 콜록~"
할아버지의 걸걸한 목소리가 지붕에서 들려왔다. 지붕과 소통하려고 운전석 창문을 열어놓은 상태였다. 어차피 괴물은 방어막을 지날 수 없다.
할아버지는 버스의 어색한 움직임만으로도 내 심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괜찮으세요?"
"왜 자꾸 물어봐!"
버럭 하는 걸 보니 괜찮으신 것 같다. 툴툴거려도 지금은 이상하게 밉지 않았다. 처음에는 배신감에 정말 믿을 수 없는 노인이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묘하게 사라진 우리 할아버지와 비슷한 어떤 느낌이 있었다.
난 속력을 조금 더 높였다. 터널은 캄캄했고 미리 켜 놓은 버스의 사방 조명과 전조등의 불빛은 한정된 영역만을 밝히고 있었다.
조명의 사각지대, 특히 천정은 거의 안 보였다.
터널 내부는 살짝 오르막이었다. 조금 달리다 보니 도로 상태가 이전과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터널 전체가 물에 잠기지는 않았던 거 같다.
탐지 숫자는 아직 조용하다.
"이상한 냄새가 나"
지붕에서 나라의 음성이 스산하게 들려왔다. 나도 열린 창문으로 이미 느끼던 중이었다.
카페에서도 맡았던 그 냄새다. 그런데 조금 다른 느낌이 있다.
사체 썩는 냄새에 피 냄새가 섞여 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본데"
난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조심스럽게 버스를 몰았다.
"뭐가 있는데?"
지붕에 있던 나라가 말했다. 나도 전조등에 비친 형체를 바로 발견했다. 차량이다.
난 버스의 속도를 늦추며 천천히 접근했다.
"한 대가 아닌데?"
유리창이 깨지고 차체가 찌그러진 여러 대의 차량이 널브러져 터널의 길을 막고 있었다.
누군가가 일부러 길을 막은 모습은 아니었다. 터널 입구 쪽에 버려졌던 차량이 홍수 물살에 여기까지 떠밀려 온 거로 보였다.
경차와 1톤 트럭 그리고 SUV와 세단으로 종류도 다양했다.
"단단히 잡으세요."
난 제일 앞에 있던 1톤 트럭의 짐칸을 향해 전진했다.
쿵!
살짝 부딪히려 했으나 힘 조절이 잘되지 않았다.
위이이잉
트럭의 짐칸이 옆으로 밀리더니 그 앞에 있던 SUV와 부딪혔다. 그리고 두 대의 차량이 옆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위이잉
잘 밀려나던 차량은 옆으로 쓰러져있는 기다란 세단 차량에 막혀 멈췄다. 버스의 바퀴가 헛돌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잉
바퀴에서 타는 냄새가 올라왔다.
"좀 치워볼까?"
나라의 음성이다. 그때 할아버지가 버스에서 뛰어내리는 게 보였다.
"같이 가요"
나라도 할아버지 옆으로 뛰어내렸다.
세단과 그 사이 끼어있는 경차만 조금 옆으로 빼내면 될 것 같았다.
나라가 어깨로 세단을 밀기 시작했다.
우두두둑!
뭔가 걸려있는 게 있는지 묵직한 것이 구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나라는 마치 몸이 강철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계속 차량을 밀어붙였다.
'침대에서 치료하고 더 강해진 건가?'
그때 할아버지가 사이에 끼어있던 경차를 앞으로 잡아끌었다.
바닥에 철이 끌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더니 이내 길이 조금 열렸다.
"콜록콜록, 이제 더 밀어 봐"
할아버지와 나라는 옆으로 비키며 나에게 손짓했고 나는 천천히 버스를 움직였다.
끼이이익
귀에 거슬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더니 이내 차량은 양쪽으로 완전히 밀려났다.
그러자 부서진 차량에 가려져 있던 터널 너머가 버스의 전조등에 비쳐 그 모습이 드러났다.
할아버지와 나라도 전조등이 비치는 터널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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