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J1. 구경꾼
버스의 조명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마치 심해에서 밝은 빛을 처음 본 물고기 같았다.
셔터와 코팅된 유리문 때문에 모습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버스 조명에 비친 눈동자는 여럿이었다.
대략 십여 명은 넘는 것 같다. 손에는 다들 공구 코너에서 집어 왔을 만한 허접한 무기들이 들려 있었다. 밀대자루나 삽, 그리고 시골 마트라서 그런지 낫과 곡괭이도 보인다.
저들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조명 스위치가 켜진 채로 조명이 갑자기 복구되는 바람에 대놓고 등장하게 된 게 조금 아쉬웠다.
혹시 아까부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을까?
버스가 투명할 때는 몰랐더라도 환풍기로 퍼져나간 삼겹살 굽는 냄새를 수상히 여긴 사람들이 문밖을 살피다 허공에 떠 있는 우리를 봤을 수도 있다.
뭐 어쨌든 이제 조명까지 켜졌으니
아니 조명을 끄고 그냥 여기서 떠나도 된다. 우측 조명이 복구되었으니 전조등도 곧 복구될 가능성이 크다.
난 우측 조명 스위치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그때 마트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한 사람이 눈에 익은 느낌이 들어 다시 자세히 살폈다.
"아저씨?"
"아는 분이야?"
성희가 살짝 놀란 듯 물었다. 난 좀 더 자세히 마트 문 너머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밝은 조명에 유난히 빛나는 머리가 비쳐 보였다. 그때 마침 그는 유리문 가까이 더 다가오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지금보다 머리칼이 더 있었던 거 같은데, 양계장 집 아저씨다.
난 버스 옆문을 열고 소리쳤다.
"양씨 아저씨!"
그런데 그들을 비추고 있는 환한 조명 때문에 내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눈이 부시는지 손으로 가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난 성희에게 말했다.
"탐지 램프 좀 부탁해"
혹시 그사이 괴물이라도 나타나면 미리 알아야 했다. 성희가 운전석에 앉는 걸 확인하고 난 버스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양씨의 눈이 점점 커졌다.
"어? 어디서 봤는데···? 카센타?"
그때 마트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이내 한 청년의 얼굴이 유리문에 나타났다.
"진우?"
며칠 전에 들었던 목소리다. 편의점에서 만났던 그 친구다. 이름이 뭐였더라, 왜 저 친구 이름은 생각이 나질 않을까?
"나 태형이야! 진우야! 살아있었어?"
그래 태형이었지, 기억하기 어려운 이름도 아닌데 특징이 없어서 그런가? 어쨌거나 아는 얼굴을 만나니 반가웠다. 마트에 지인이 이제 둘이다. 조금은 경계를 낮추고 접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태형이가 유리문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어?"
잠시 후 정문 옆의 작은 철문이 천천히 열리는 게 보였다. 그런데 거기서 나타난 건 낫을 든 손이었다.
그때 성희가 버스에서 내 검을 던졌다.
난 검을 받아서 들고 낫을 든 손을 노려보며 외쳤다.
"거기 뭐야!"
낫을 든 손의 주인은 태형이었다.
"아, 혹시 몰라서"
철문에서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나오던 그는 민망한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버스에서 성희의 음성이 들려왔다.
"노란불!"
그 순간 태형의 시선이 내 뒤 어딘가로 이동하며 공포의 눈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근처에 괴물이 나타났다. 하지만 난 우선 그의 각성 여부를 먼저 확인하고 싶었다.
"너 버스 보여?"
내가 다급하게 묻자 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버스?"
안 보이는 거다. 난 그에게 소리쳤다.
"다시 마트 안으로 빨리 들어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나는 그를 철문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바로 뒤돌아 버스 옆문으로 뛰어가는데 마트 유리문 안에서 공포에 질린 시선들이 어디론가 향해 있는 걸 발견했다.
난 버스에 올라 문을 닫고 버스의 우측 조명도 껐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뭐···. 뭐야 저게?"
새로운 놈이다. 뭐지? 공룡인가? 아니 거대 이구아나?
다행히 놈은 마트 건물 쪽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주차장을 통해 옆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주차 칸 한 칸의 가로가 대략 2.5미터라고 치면 꼬리를 포함한 놈의 길이는 25미터는 되는 것 같다.
놈의 몸에 부딪힌 가로등은 그대로 사정없이 뽑혀 나갔고 시멘트 담벼락은 과자처럼 바스러졌다.
거대 괴물은 아직 우리의 존재를 모르는 듯 도시의 중심부 방향으로 천천히 기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느렸다.
놈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며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으니 시간이 더욱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저놈이 이쪽을 공격하더라도 우리 버스는 별일 없을 것이다. 문제는 마트의 사람들이다.
괜히 우리가 시선을 끌어서 놈이 이쪽으로 방향을 바꾸기라도 한다면 마트 건물은 무사하지 못할 거다. 그 안에 숨어있는 사람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어라?"
놈 근처에 익숙한 괴물들이 나타났다.
꺽다리 무리다.
난 주변을 더 살폈다. 추가로 다른 종류의 괴물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어?"
꺽다리가 이구아나와 같이 생긴 거대 괴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퀘에에에에에!
그 공룡 같은 괴물은 고개를 하늘로 쳐들더니 포효하기 시작했다. 그 굉음과 함께 몰려온 충격파가 버스 안까지 뒤흔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꺽다리는 날카로운 발톱을 연신 거대 괴물의 등에 찔러 넣었다. 다른 놈은 목과 어깨 그리고 머리에 올라타서 마구 칼날 같은 발톱을 휘둘렀다.
거대 이구아나는 꼬리로 놈들을 쳐내려 했지만, 꺽다리는 내가 겪은 것처럼 순식간에 위치를 이동하며 거대 괴물을 공격하고 있었다.
"지들끼리 싸우네"
성희의 무덤덤한 말이다. 아이들도 소란에 잠을 깨고 거실 창밖으로 놈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 어설픈 가설이 맞았나?
아까 촉수 거미는 정말 도망치는 못난이와 멧돼지를 쫓고 있던 건가?
그럼 거대 거미는? 놈은 못난이 쪽인가? 아니면 촉수 거미 쪽인가? 생긴 거로 봐서는 촉수 쪽인 거 같은데 아직 확실치는 않다.
거대 거미는 사람을 공격했다. 촉수 거미도 나를 잡아먹으려 들었다. 놈들이 꺽다리 무리와 적대적이라고 해도 우리에게 우호적인 놈들도 아니다.
아직 놈들끼리의 정확한 관계는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저 거대한 놈들과 작은놈들이 적어도 같은 편은 아닌 것 같다.
거대파, 꺽다리파, 인간형, 우선 이 정도로 구분해야겠다.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무리하게 맴돌자 갑자기 눈앞이 핑 도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피곤했다.
오늘 밤은 좀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계속 사건이 발생한다. 사실 솔직히 내버려 두고 그냥 자버려도 상관은 없었다.
괴물끼리 싸우든 말든 버스와 우리는 별일 없을 거다.
그런데 근처에서 저 난리를 치고 있으니 정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편하게 잠자리에 들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내가 아는 사람들이 마트 안에 있다.
졸린 눈을 간신히 뜨고 상황을 보니 저 거대 이구아나는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꽤에에에에에에!
그때 놈은 거대한 입을 하늘을 향해 벌리고 다시 포효했다.
'마지막 비명인가?'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다. 괴로움의 비명이 아니라 누군가를 부르는 괴성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울음에 응답하듯 지축이 울리기 시작했다.
쿵! 쿵!
"저건?"
날 잡았던 촉수 거미다. 한 마리가 아니다.
대략 대여섯 마리 정도의 촉수 거미가 거대 이구아나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동시에 수많은 촉수가 징그럽게 꿈틀거리더니 꺽다리를 향해 쏜살같이 뻗어나갔다.
하지만 촉수는 꺽다리의 시공간 초월 움직임을 전혀 따라가지는 못했다.
"너무 굼뜬데?"
그런데 나의 말을 마치 들은 것처럼 갑자기 놈의 촉수에 달린 빨판에서 초록색의 찐득한 액체가 사방으로 강하게 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특유의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하던 꺽다리들도 순식간에 놈들의 전체 동선에 동시에 뿌려지는 그 액체는 피할 수 없었다.
뀌이이이이
꺽다리의 괴성이 들린 직후 놈들의 움직임이 확연히 느려지는 게 보였다. 꺽다리가 제대로 피하지 못하자 마침내 놈들은 촉수에 걸려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저건 내가 걸려봐서 안다. 지옥이다.
꽈직!
꺽다리가 부서지는 소리다. 촉수 거미의 입에 반쯤 잘린 꺽다리의 몸통이 보였다. 거대 촉수 거미들은 그렇게 꺽다리들을 모두 잡아 올려 와작와작 씹어버렸다.
"오!"
내가 탄성을 지르자 옆에서 성희가 흘깃 나를 바라봤다.
우리는 그렇게 무슨 거대 괴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버스 안에서 안전하게 앉아 그들의 싸움을 구경했다.
그 광경의 또 다른 관객은 마트 안에서 공포에 질린 채 보고 있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상태가 궁금했던 걸까? 나의 상대적인 안전함을 즐기고 싶었나? 난 문득 마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마트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다. 마트 건물 위의 높은 하늘에서 시커먼 날파리 같은 게 눈에 들어왔다.
날파리가 아니군.
익룡처럼 생긴 날괴물이다. 아이들이 버스 지붕에서 빛의 바늘로 모두 괴멸시켜버렸던 바로 그 종류
뀌이이이이이
하늘에서 놈들의 괴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팝콘은 없나?"
이건 뭐 4D 영화관도 아니고, 상황이 점점 더 흥미진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심하게 느껴졌던 피로감도 잊은 지 오래였다. 단지 뭔가 씹을 게 필요했다.
"여기"
그때 작은 성희가 나에게 건넨 것은 새우과자였다. 이런 게 버스에 있었나?
와자작
아이들도 우리도 며칠 괴물에 시달리다 보니 이제 저런 풍경에 놀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버스 안에만 있으면 별일 없을 거라는 안도감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팝콘이 아쉬웠지만, 새우과자도 맛있었다.
대략 백여 마리는 되어 보이는 날괴물들은 빠른 속도로 촉수 거미들에게 달려들었다.
저놈들이 다 죽으면 코르카가 얼마나 떨어질까?
난 과자를 먹으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벌써 이렇게 적응이 된 걸까? 혹시 나는 멸망한 세상이 체질인가?
날괴물들은 촉수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거미 머리에 지속해서 상처를 내고 있었다. 그 사이 거대 이구아나만 따로 공격하는 놈들도 있었다. 큰 꼬리와 주둥이로 저항해 보지만 거대 이구아나는 싸움에 최적화된 형태는 아닌 거 같았다.
거대한 덩치와 느린 움직임으로 인해 속절없이 날괴물들에게 상처를 입었고 긴 부리에 눈까지 찔렸다. 자세히 보니 그래도 눈이 여섯 개는 되어 보였다. 괜히 자세히 봤다. 너무 흉측했다.
그런데 놈들은 왜 싸우는 거지?
거대 이구아나 사냥이 오늘의 미션인가? 먹을 수만 있다면 한동안 식량 걱정하지 않아도 될 크기긴 했다.
그때 거미에게 머리만 씹어 먹히고 죽은 꺽다리의 시체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오! 코르카가···.'
그런데 한동안 지켜보고 있는데도 놈의 시체가 연기로 피어오르지 않았다.
인간에게 죽은 괴물만 연기로 사라지는 건가?
쿵!
촉수 거미 한 마리가 옆으로 쓰러졌다. 놈은 바닥에 누워 버둥거리다 날괴물에 의해 촉수가 잘리고 다리는 부서졌다. 그리고 끝내 움직임이 멈췄다.
거대 이구아나도 마치 생을 포기한 것처럼 대응하지 못했고 거대한 꼬리만 의미 없이 처량하게 휘두르고 있었다.
그때 가로로 누워 큰길을 막고 있었던 긴 트럭 위로 시커먼 형체들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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