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J1. 반찬
[ 1 < 23 < 0 ]
저 근접 숫자 1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근처에 괴물 보여?"
내가 거실 쪽으로 물었으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창밖이 온통 푸른 연기로 가득해서 버스 밖으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근접에 한 마리 있다고 나오는데 안 보이네"
[ 1 < 14 < 0 ]
교회 쪽의 괴물들은 계속해서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거대파도 식물의 저 연기를 감당하기 힘들었군.'
이구아나 여섯 마리와 열 마리 정도의 촉수 거미만 해도 16 이상은 찍혀야 하는데, 게다가 남은 꺽다리파도 조금은 있을 텐데
그런데 숫자는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다. 단지 맨 왼쪽 1만 변함없이 그대로다.
우리는 긴장하며 버스의 모든 창문을 계속해서 살폈다. 그사이 밖이 많이 어두워졌다. 이제서야 해가 지는 모양이다. 참으로 긴 하루다.
짙은 연기에 노을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주변이 조금씩 어두워지는 걸로 시간을 파악할 뿐이다.
꼬르륵
아이들의 배에서 소리가 들렸다. 나도 심한 허기가 몰려오고 있었다. 아까 간단하게 먹은 주먹밥은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아직 편하게 밥 먹을 분위기가 아니다. 우선 저 숫자의 정체부터 알아내야 한다.
[ 1 < 6 < 0 ]
그때 중거리 숫자는 6에서 멈췄다. 교회 부근에 여섯 마리가 살아있다.
그럼 살아남은 건 혹시 거대 이구아나?
창밖을 보니 조금씩 연기가 걷히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 검푸른색으로 보이는 연기는 뒷산에서부터 점점 희미해지더니 버스 옆을 지나 아래로 흘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누가 있어요."
성운이가 오른쪽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곳에는 긴 머리를 한 여성이 뒤돌아 서 있었다.
"사람인가?"
스키니진에 하얀 티셔츠 차림의 여성이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나이를 가늠하긴 어려웠다.
"왜 저러고 있지?"
그녀는 약수터 방향을 바라보며 약간 허리가 우측으로 꺾인 이상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근접한 괴물의 숫자는 1이다. 그리고 수상한 사람이 창밖에 있다. 당연히 괴물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 너무 평범한 사람 같았다. 반소매 티 밖으로 드러난 가느다란 팔과 손도 사람이다.
"불러볼까?"
성희가 물었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괜히 버스를 드러낼 필요는 없다. 어차피 각성자거나 혹은 인간형 괴물이라면 투명 모드 상관없이 버스를 볼 수 있을 거다.
그때 갑자기 수상한 여성이 버스 쪽으로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얀 얼굴의 젊은 여성이다. 그런데 눈을 감고 있어 눈동자를 볼 수 없었다.
"사람인가? 왜 여기에 혼자?"
외모는 정말 사람이다. 하지만 액정에 표시된 근접 숫자는 여전히 1이다. 혹시 다른 곳에 괴물이 있을지 몰라 난 반대편 창밖을 살펴봤다.
"깜짝이야!"
성희의 외침에 다시 돌아보니 그 수상한 여성은 버스 우측 창문 바로 앞까지 접근해 있었다. 그런데 긴 머리를 늘어트리고 고개를 숙인 채 눈은 여전히 감고 있다.
난 액정의 [자동 접촉 파괴] 버튼을 눌렀다. 진화하고 처음 생긴 버튼이다.
의도치 않게 코르카가 많이 소모될까 걱정되어 켜지 않았지만, 지금은 만약을 대비해야 할 것 같았다.
마침내 수상한 여성이 눈을 떴다. 하지만 아직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숨죽이며 창 바로 앞에 있는 그녀를 관찰했다. 그녀가 인간형 괴물이건 그냥 각성자건 간에 우리에게 큰 위협은 되지 않을 거다. 그런데 너무 행동이 좀 섬뜩해서 괜히 찝찝했다.
여성이 고개를 완전히 들었다. 평범한 하얀 얼굴에서 두 개의 붉은 눈이 살기를 가득 품고 번뜩이고 있었다.
인간형 괴물이다.
난 검을 들고 창문을 살짝 열었다. 그 순간 괴물은 뒤로 조금 물러섰다. 검이 닿지 않는 거리다.
난 활을 꺼내 들고 조준했다. 그런데 제대로 조준을 할 수 없었다. 괴물은 기이한 움직임을 보이며 마치 꺽다리처럼 정신없이 내 조준을 피했다.
'무기를 알아보는군.'
난 활을 내려놓고 운전석으로 가서 대시보드 액정을 바라봤다.
'안 그래도 테스트가 필요했는데'
바로 [자동 포격]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기계음이 버스 지붕 쪽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뭔가 조준하는 비프음이 들렸다.
삐이이이이 삑, 텅! 슈욱
그러더니 바로 붉은색 구체가 작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빠직
붉은빛의 덩어리를 맞은 괴물은 그대로 초록색 피를 사방으로 퍼트리며 그 자리에서 터져나갔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화약 포탄은 아닐 거라 짐작은 했다. 그런데 상상 이상으로 기묘한 느낌이었다. 마치 어떤 에너지가 작은 구로 응축된 것 같았다.
어쨌든 한 방에 괴물을 보낼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 여러 놈일 때는 또 어떻게 동작할지 궁금했지만 그건 나중에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다.
놈의 시체 조각은 이내 연기가 되어 사라졌고 코르카 네 개가 나타났다. 그리고 버스는 그 코르카를 순식간에 흡수했다.
'코르카 1개 투자로 4개가 생겼네?'
4배 수익이다. 나쁘지 않다. 그런데 만약 코르카 1개만 주는 괴물이라면 본전치기다. 게다가 코르카가 나오지 않는 악마쥐 같은 놈들한테 쓰면 손해다.
[ 0 < 6 < 0 ]
탐지 램프를 확인하니 이제 근접 괴물 수치가 다시 0이다. 그때 교회 방향에서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크르르르르르르
낮고 강한 굉음이다. 그 엄청난 저음의 괴성에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교회 주차장을 덮고 있던 푸른 연기는 이제 거의 희미해졌고 그 자리엔 예상대로 거대 이구아나 괴물 여섯 마리만 멀쩡하게 보였다.
그런데 놈들은 마치 잠들어 있는 듯 움직임이 없었다.
놈들 앞에 있는 덩굴 식물은 바람이 빠진 튜브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색깔도 검푸른색으로 변했다. 그 괴식물은 벌써 썩어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무지막지하게 괴물들을 잡아먹던 그 위용이 이렇게 허망하게 바람 빠진 풍선처럼 쓰러져 있으니 어이가 없었다. 저 초식 괴물 몇 마리가 그 난리를 정리한 건가?
푸른 연기는 덩굴 식물의 마지막 발악이었을 거다. 그리고 그건 괴물들에게 독인 모양이다. 교회 주차장에 널브러져 있는 수많은 괴물의 사체가 그걸 알려주고 있었다.
물리적인 타격으로 찢기거나 터져서 죽은 게 아니라 연기에 중독되어 죽은 것같이 파랗게 질린 채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괴물 미라 같은 모습이었다.
단지 거대 이구아나만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이상한 소리만 내고 있었다.
크르르르르르
날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놈들의 모습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워낙에 큰 덩치라 어둠 속에서도 그 윤곽과 이상한 괴성만으로 여전히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덩치가 커서 죽는데도 시간이 걸리는 건가?'
녀석도 가망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밥 먹자"
난 거실로 향하며 말했다. 이제 상황은 대략 정리가 된 것 같으니 밥이나 먹으면서 저 거대 괴물의 추이를 지켜봐도 될 거 같다.
"진화된 냉장고 개봉을 해볼까?"
내가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냉장고로 다가가자 다른 식구들도 나와 똑같은 표정으로 냉장고의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냉장고를 열지 않은 식구들이 대견했다. 이런 사소한 걸로도 난 감동한다. 특히나 먹을 거는 그런 능력이 있다. 음식은 사람의 감정을 생각보다 많이 건드린다.
난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보다 문이 더 커진 것 같다.
"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물은 그대로다. 그런데 맨 위 칸에 네 개의 반찬통이 생겼다. 그리고 음료 칸에는 오렌지 주스와 소주가 보인다.
신선칸 안에는 커다란 생닭이 한 마리 들어있다. 백숙이나 닭볶음탕이 가능해졌다. 후라이드 치킨까지는 힘들 것 같다. 튀김기가 없다.
냉동실을 열어보니 얼음과 아이스크림 외에 냉동 치킨 너겟이 생겼다.
"에어프라이어 있으면 딱인데"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뭔가 찐득하고 축축해져서 너겟이 맛이 없다. 물론 팬에 기름 두르고 구워도 상관은 없지만, 손이 많이 간다.
그때 성희의 음성이 들려왔다.
"에어프라이어 있다."
내가 놀라 고개를 드니 주방 위쪽 선반, 전자레인지 옆에 검은색 에어프라이어가 시야에 들어왔다.
"오호!"
이제 고기도 저기에 돌리면 될듯하다. 저건 누가 간절히 원했을까? 식구 중에 누군가의 결핍이 버스 진화에 영향을 준 거 같다. 그리고 그 간절함이 누구였는지는 길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이미 삼겹살을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있는 성희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로켓 배송이라도 받은 모습인데?'
내가 살짝 미소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성희는 머쓱한 표정으로 냉장고에서 채소들을 꺼내어 다듬기 시작했다.
아참 그런데 반찬통?
난 그중 하나를 꺼내서 뚜껑을 열어봤다.
'아···. 이런···.'
난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고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반찬통에 들어있는 건 마늘쫑 볶음이었다.
'설마'
난 손으로 두어 개를 집어 입에 넣었다. 예상했던 맛이다. 어떻게 이 반찬이 여기에
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셨던 몇 개 안 되는 반찬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던 반찬이다.
김치는 동네 분들이 나눠주시는 걸로 대부분 먹었고 할아버지는 가끔 불고기나 고등어 정도를 구워서 밥을 차려주셨다. 그리고 평범하게 김치찌개나 된장찌개에 두세 가지의 반찬으로 밥을 먹었다.
반찬이라고 해봐야 콩나물무침이나 어묵볶음 그리고 마늘쫑 볶음 정도다. 그런데 그중에서 내가 정말 환장할 정도로 좋아하던 건 마늘쫑 볶음이다. 그거 하나만 있으면 밥 두 그릇은 뚝딱 해치웠다.
취직해서 혼자 살게 된 후에 여러 반찬가게를 전전했지만, 할아버지의 그 맛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그동안 마늘쫑 볶음을 잊고 있었다.
눈앞에 마늘쫑 볶음이 가득 들어있는 반찬통을 보고 있으니 직장 동료들이 부모님이 보내주신 반찬 택배를 받던 생각이 났다.
나는 그런 경험이 없어서 마냥 부러워했었다. 식구들이 택배로 뭔가 먹을 걸 보내주는 게 정말 따뜻해 보였다. 정작 그 직장 동료는 부모님의 전화에 항상 투덜대긴 했지만
난 다시 손으로 마늘쫑을 집어 먹었다.
분명 할아버지의 맛이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세상이 멸망하고 나서야 나도 가족이 보내주는 반찬을 먹게 되었다.
게다가 이 익숙한 그리움의 맛을 앞으로도 계속 먹을 수 있다니, 이 신비로운 버스에 다시금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마치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계실 것만 같은 할아버지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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