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J1. 여명의 군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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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다시 버스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 오자마자 바로 정신없는 상황을 만났다. 좀 전까지의 살벌한 모습은 마치 꿈인 것처럼 그렇게 거리는 고요했다.
부서진 승용차도 그대로 있었고 그 안의 참혹한 시체도 그대로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수습할 여유는 없었다. 그저 작은 기도를 해드릴 뿐
마음이 왜 이럴까?
그냥 괴물이 아니라 감염자라서 그런가?
내가 위험하고 다급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공포의 대상이 사라지고 나서야 물밀듯이 밀려왔다.
감염자는 더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하는 걸까?
창문을 조금 여니 바람이 불어왔다. 한밤중의 가을바람은 차가웠다.
어제의 그 불덩이는 떨어지는 운석도, 쳐들어오는 외계 비행체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런 게 수백 개가 지면에 그대로 때려 박았으면 이미 지구에 살아있는 생명체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아니 지구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우리의 눈에 보였던 그 현상은 인간의 상식이나 지식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무언가다. 그리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계속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할 것 같다.
아까도 생각한 거지만 이해하려 하지 말아야겠다. 받아들이고 적응해야 한다. 그래야 견딜 수 있다.
그때 테이블에 엎드려 자던 성희가 찬 바람을 느꼈는지 천천히 일어났다.
'벌써 소화가 다 된 건 아니겠지?'
그녀는 조금 편안해진 얼굴로 날 바라보더니 시선을 멀리 읍내 중심부로 옮겼다.
"그대로네"
그녀의 음성이다. 나도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거미 괴물을 향해 질주한 것처럼, 거대 거미가 우글거리는 저곳을 향해 막무가내로 그냥 뚫고 들어가면 어떨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버스의 방어막도 공짜가 아니라는 걸 지금은 안다.
저 안에 들어갔다가 쉴드와 코르카가 다 떨어지면···. 생각하기도 싫다.
"가게에 가본 거 맞지?"
내가 묻자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은 떨고 있었지만,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그렇게 잠시 정적이 흐른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가게에 들어가고 기억이 끊겼어."
그 이후는 굳이 더 듣지 않아도 될 거 같다. 가게에 가서 부모님의 상황을 봤다. 아마도 부모님의 상태가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억이 끊겼다. 이어진 기억은 시골집 앞, 그래서 가게에 간 것이 착각인지 실제인지 구분을 못 한 것 같았다.
부모님 없이 살아온 나는 그녀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유일한 가족인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대체 어디 계신 걸까?'
난 이런 상황을 대비하게 해준, 그래서 많은 설명을 해주실 것 같은 할아버지를 얼른 만나고 싶었다. 정말 물어볼 게 끝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버스에도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 그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만 있었을 뿐
그리고 휴대폰도 안되어 세상의 소식도 알 수가 없었고 버스에는 흔한 라디오도 없었다.
읍내는 컴컴했고 인간의 불빛, 아니 인간의 기계나 전자기기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라디오가 되었다고 해도 아무런 방송도 듣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고 보니 아까 승용차로 도피하려고 했던 사람들도 시동이 걸리지 않았던 거 같다.
생각이 꼬리를 물자 갑자기 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미안한데···. 조금만 잘게"
불침번을 부탁하는 말이었다.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도 차분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거다. 그리고 나도 푹 잘 시간이 필요했다. 제대로 잠자리에 든 지가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너무 피곤했다.
버스의 코르카는 넘치진 않아도 아직은 괜찮을 것 같다. 버스를 볼 수 있는 인간형만 아니면 된다. 그리고 괴물이 나타나면 성희가 날 깨우겠지, 본인이 직접 처리해주면 더 좋겠지만
난 작은 테이블 스탠드만 남겨두고 모든 전등을 껐다. 난 생수병을 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버스의 침대 이층으로 올라가 누웠다.
'버스 침대에 누운 게 처음인가?'
운전석과 거실에서 쓰러져 기절한 거 말고는 생각이 나질 않았다. 침대에 편안하게 누우니 조금 어색했다. 그런데 너무 편안했다.
눕자마자 엄청난 졸음이 한꺼번에 몰려왔고 난 거부할 수 없었다.
* * *
누군가가 나를 흔드는 느낌이다.
누구지?
난 혼자 사는데?
아주 실감 나는 꿈이었다.
내가 무슨 검을 휘두르고
흉측한 괴물을 죽이고
우연히 동창을 만나고
또 꾸고 싶지 않은 꿈이다.
아니
검을 휘두르던 순간은 중독적이었다.
왜 그립지?
젠장
잠깐 그렇게 난 허름하지만 편안했던 나의 자취방에 있다고 생각했다.
아, 이게 다 꿈? 이었으면···.
눈을 뜨니 성희의 얼굴이 코앞에 보였다. 이층 침대 위쪽은 사람의 얼굴 높이와 거의 같았다.
"깜짝이야!"
난 놀라 벌떡 일어나다가 버스의 천장에 부딪혔다.
"윽! 무슨 일이야?"
아직 밖은 어두워 보였다. 내가 아까 켜 놓은 테이블 스탠드만 여전히 켜져 있어 버스 안도 어두침침했다.
"없어"
아,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음식이 없다는 건가? 벌써 배가 고픈가?
"거미가 사라졌어."
"뭐?"
난 침대에서 내려가 버스 창밖을 살폈다. 테이블 스탠드 조명을 끄니 어둠에 이미 적응이 되어있는 내 시야에 읍내의 윤곽이 잘 보였다.
엄청나게 많았던 거대 거미 괴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난 냉장고의 문을 열고 생수병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직 피곤함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벨트"
난 짤막하게 말하고 운전석으로 갔다. 그런데 그녀도 따라오더니 조수석에 앉는다.
난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버스의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전조등을 켜고 악셀을 밟았다.
버스는 묵직하고 부드럽게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조등에 비친 읍내의 모습은 처참했다.
멀쩡한 건물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폭격을 맞은 듯 폐허가 되어있었다.
거리에는 부서진 승용차와 트럭, 버스 등이 무질서하게 흐트러져 있었고 바닥에는 핏자국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깃덩이들이 나뒹굴었다.
굳이 그 형체가 원래 뭐였는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엇?'
난 갑자기 버스의 브레이크를 밟았다. 옆의 성희는 영문을 모르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버스 옆으로 어제 들렀던 편의점이 있었다. 유리가 깨져있었고 건물 일부도 아주 조금 무너져내렸지만, 생각보다 가게가 양호했다.
"저기 동창생이 있었는데"
"누구?"
그의 이름이 기억나질 않는다.
난 편의점을 잠시 관찰했다. 건물 근처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편의점이 버스의 왼편에 있어 난 좌측 외부 조명을 켰다. 가게 안까지 어느 정도 환하게 불빛이 비쳤다.
"다시 오기 힘들 수 있으니 들렀다 가자"
난 그녀를 부모님 가게에 빨리 데려다주고 싶었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물품 수집이 더 중요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뒤로 가서 방패를 팔에 끼우고 검을 들었다.
"어?"
"왜?"
팔이 아프지 않았다. 난 팔의 붕대를 풀었다. 상처가 모두 아물어 있었다. 다친 부위가 어디였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다 나았어."
성희는 직접 먼저 겪어봐서 그런지 그리 놀라진 않았다.
치유는 그녀의 능력이 아니라 침대의 신비한 기능이었다. 아는 정보가 하나 늘었다. 그리고 유용한 정보다.
우리는 버스 밖으로 조심스럽게 나갔다. 문을 열어둔 채로 조금만 낌새가 이상하면 바로 뛰어 들어올 생각으로 그렇게 조금씩 편의점을 향해 걸어갔다.
유리문이 깨져있어서 문을 열 필요도 없었다.
계산대 뒤를 살폈으나 누군가의 핏자국만 남아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냉장고도 당연히 모두 꺼져있었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부는 엉망이었다. 이렇게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게 사람인지 괴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냉장고의 음료와 술이 그대로 있었다. 난장판을 만든 건 괴물이었다.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난 계산대에서 쓰레기봉투 50리터짜리를 찾았다. 마침 한 뭉치가 보였다. 뜯어서 반을 그녀에게 건넸다.
되도록 많은 물품을 들고 가야 한다. 작은 비닐로는 어림없다.
"두 장씩 겹쳐서 담아, 찢어질 수 있으니"
난 가벼운 라면류부터 모두 쓸어 담았다. 그녀는 과자를 쓸어 담고 있었다.
"익숙한데?"
내가 의미 없는 농담을 던져봤으나 그녀는 대답 없이 생필품이 있는 옆 라인으로 옮겨갔다.
난 주류 냉장고에서 에일 캔 하나와 소주 한 병을 꺼내어 넣었다.
'외부 물품도 보충될까?'
궁금했다. 한 병씩 테스트해 봐야겠다.
편의점에 비상약도 있었다. 진통제와 감기약 등도 모두 챙겼다.
냉동고에 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과 만두가 보였다. 만두를 종류별로 챙겼다. 녹았으니 바로 먹으면 될 거 같았다. 아직 하루 정도밖에 안 지났으니 상하진 않았겠지!
우리는 50리터 봉지 각 두 개씩 네 봉지를 가득 담아 편의점의 출입구로 향했다.
편의점을 나서려다 문득 동창 녀석이 떠올랐다. 여기 사장은 아닌 것 같긴 했지만 난 옆의 메모지를 들어 간단하게 쪽지를 남겼다.
<외상이다. - 진우>
버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음식은 냉장고의 빈자리에 넣고 나머지는 수납장에 분류해서 넣었다.
다양한 물품을 챙기니 아무리 무한 리필 냉장고와 음식 창고가 있었더라도 이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아직 편의점에 다른 물품이나 음료가 많았지만, 혹시 모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남겨두고 싶었다. 사실 더 가져오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버스에 더 넣어 놓을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난 다 녹은 만두를 접시에 담아 전자레인지의 문을 열었다. 그때 그녀가 내 손목을 잡았다.
"기름 있던데"
난 날카로운 그녀의 눈빛을 봤다.
"네가 구워라."
난 냉장고에 방금 넣었던 소주병을 다시 꺼냈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제발"
그리고 문을 열었다.
"젠장"
외부에서 넣은 건 보충이 되지 않았다. 기본 세팅되어있는 것만 재보급이 되는 것 같다.
'다음 진화 때는 물품이 더 다양해졌으면 좋겠는데'
신기한 버스에 적응하고 점점 더 기대하는 게 많아지는 내 모습을 보니 잘해주면 인간이건 동물이건 끝도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특히 인간은 무작정 잘해주면 거기에 적응한다. 그리고 그 기준에서 조금만 덜 잘해줘도 투덜대고 심지어 욕까지 한다. 검은 머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밀당이 필수다.
'이건 또 뭔 생각의 수다?'
혼자서 어지러운 생각이 너무 많아졌다. 난 꺼낸 미지근한 소주를 다시 넣었다. 그리고 보충되는 국산 맥주를 꺼냈다.
"군만두에는 맥주지"
내가 중얼거렸으나 그녀는 말없이 만두를 구웠다. 심정은 모르겠으나 그녀의 뒷모습은 무거웠다. 그리고 부모님의 가게에 빨리 가고 싶으면서도 또한 가는 걸 두려워하는 느낌도 들었다. 늦게 가는 이유가 필요해 보였다.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보니 어린 시절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우리 집에서 셋이 모여있을 때 우리는 라면을 자주 끓여 먹곤 했었다. 취향이 모두 달라 덜 익은 것, 완전히 익힌 것, 달걀의 익힘 등으로 많이 싸웠었다.
그래봤자 라면인데
오늘은 라면도 생겼다. 달걀은 없지만, 그때처럼 같이 라면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희성이는 어디 있을까?'
이왕이면 삼총사가 다 모이면 좋을 텐데
잘 구워진 만두가 테이블 위에 올랐을 때 그 너머 창밖에는 새벽의 푸른 빛이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읍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군만두에 맥주를 홀짝이며 말없이 여명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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