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J1.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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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가 조금 있었지만 나는 그를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다.
편의점과 마트에서 만났던 초등 동창 태형이
그는 비틀거리며 간신히 건물 입구를 걸어 나오더니 날 발견한 듯 손을 들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난 급히 버스 아래로 내려가 그에게 뛰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피니 그는 이미 의식을 잃었다. 나는 혹시 몰라 팔의 액정부터 살폈다. 탐지 근거리 숫자는 0이다.
나는 그를 둘러업고 버스로 뛰어왔다. 입구에 다다르자 팔의 액정에 승객추가 메시지가 떴다.
<김태형을 탑승객으로 등록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난 그를 추가하고 바로 버스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혔다.
"쿨럭 누구여?"
할아버지가 경계의 목소리로 물었다.
"친구요 어렸을 때"
같이 보낸 시간이 길지 않았지만 나는 녀석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근거 따위는 없다. 그저 느낌일 뿐
예전 마트에서 잠깐이지만 그를 의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버스에 초대도 하지 못한 걸 내내 후회했었다.
물론 지금 내 눈앞에 누워있는 그는 내가 알던 그 태형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헤어진 후 그가 겪었던 일들을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쓰러진 그를 모른 척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버스에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가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거 같으면 난 바로 액정의 [추방] 버튼을 누르면 된다.
"분명 방벽 너머 숲에 있었는데"
성희가 침대로 다가와서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저기 병실에 있었을까? 나도 아까 2층에 있었는데 그땐 인기척이 없었거든, 우리 소리를 분명 들었을 텐데"
단순하게 추측하면 2층 수술실에서 초록 방벽이 열렸고 파란 머리 놈과 애들이 넘어갔다. 그리고 그 붉은 영역이 사라지기 전에 태형이가 방벽을 타고 넘어온 건 아닐까?
그런데 왜 혼자? 다른 이들은? 그리고 파란 머리 놈이 그가 넘어올 때까지 순순히 내버려 뒀을 리가 없었을 텐데?
그리고 그건 한참 전이다. 그동안 계속 저 병실에 있었다고? 왜 아까는 조용했던 거지?
확실한 건 그가 깨어나야 알 수 있을 거다.
"기다려보자"
난 거실에 앉았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로 옆 침대 일 층에 앉아서 그를 감시하고 계셨고 성희는 내 앞에 앉았다.
"일어나면 알게되겠지"
내가 그에게 시선을 둔 채로 말하자 성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각자의 생각과 마음의 정리가 필요했다.
아이들의 행방, 그리고 괴물로 변한 누나를 만나고 내 손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끔찍한 기억, 어설프고 기이한 장례식
평소의 마음 같으면 견디기 어려웠을 일들을 겪고도 우리는 겉으로는 너무나 태연했다. 점점 이런 상황에 익숙해 가는 것처럼, 그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처럼 그렇게
이번에 인류가 멸종하게 될지 아니면 강한 생존력으로 더 살아남을지는 두고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적어도 적응력 하나만은 대단한 것 같다.
"끄응"
두어 시간쯤 지났을 무렵 침대에서 신음이 들려왔다. 옆 침대에서 졸고 계시던 할아버지가 번쩍 눈을 뜨더니 녀석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우리도 긴장된 표정으로 그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나는 팔의 액정과 거실 테이블의 액정을 다시 눈으로 훑었다. [추방] 버튼의 위치를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해서다.
자꾸 녀석을 의심해서 또 미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 작은 가능성에 모두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으니까
그는 눈을 뜨더니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그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우리도 순간 움찔했다.
"일어났어?"
내가 물었다. 그는 테이블 자리에 앉아있는 날 발견하고는 눈이 점점 커지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 진우"
그러고는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버스구나···. 이 버스···. 많이 달라졌네···."
그는 잠시 주변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뵈어요. 어르신···. 성희도 오랜만···."
난 일어서서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몸은 좀 어때?"
내 말에 태형은 자신의 배를 만지작거리며 확인하더니 놀란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어···. 어떻게? 분명히···. 창에 찔렸는데?"
하지만 조금 전에 우리가 그를 발견했을 때는 출혈 같은 건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방벽을 넘어왔다면 그건 한참 전일 텐데 그 상처로 지금껏 버틸 수는 없었을 거다.
"어떻게 된 거야?"
난 그에게 물었다. 그는 할아버지와 성희 그리고 나를 번갈아 살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좀 일어날게."
내가 다가가서 부축하려 하자 할아버지가 먼저 그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쿨럭, 내가 부축할 테니 가서 앉아있어"
나는 테이블에 있는 성희 옆에 가서 앉았다. 할아버지는 그의 옆에 바짝 붙어서 우리 맞은편에 같이 앉으셨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한 병 꺼내서 건네자 그는 잠시 그 생수병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 병 본 적 있어, 네가 보낸 거 맞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방벽의 줄어드는 붉은 영역으로 물품을 던진 적이 있다. 물론 실제로 던진 건 준호씨였지만
"잘 받았어?"
"생수병에 이름 적어놨더라. 진우 성희 희성 태형"
급히 네임펜으로 생수병에 적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길게 사정을 쓸 시간도 없었고 사람 이름만 적어놔도 충분히 상황이 전달될 거라 믿었다.
"맥주도 정말 끝내줬어, 그때 마트에서 다 마시지도 못했는데"
그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
"어떻게 방벽을 다시 넘어온 거야? 애들은 봤어? 할아버지는?"
성희가 참고 있었던 질문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태형은 성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걸 방벽이라고 부르나 봐, 우리는 레드홀이라고 했었어···. 희성이가 그렇게 부르더라고"
"희성이는 어떻게 만났어? 그리고 그때 마트에서는···."
나도 더는 참지 못하고 그를 다그쳤다.
그는 원래의 성격처럼 느리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트 사람들과 갑자기 이상한 숲에 떨어졌어, 기절한 것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조금 어지럽더니 다른 곳에 와 있는 거야"
우리는 그때 버스 안에서 강한 빛에 모두 잠시 정신을 잃었었다. 그런데 마트에 있던 사람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경험을 했던 거다.
"그리고 바로 할머니가 괴물에게 그만···."
그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잠시 눈을 찡그렸다.
"우리 다 죽는 줄 알았는데 그때 희성이가 창을 들고 나타났어"
난 버스 창고에서 방벽을 넘어왔던 희성이의 창을 꺼냈다.
"와! 이거 정말 네가 가지고 있었구나, 희성이가 그러더니"
희성이도 창이 붉은 영역으로 넘어가고 얼마 후에 생수병과 물품들이 넘어오는 걸 전부 봤을 거다.
"희성이는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화장실에서 기절했는데 나와보니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었데, 그리고 숲속에 있는 빈 비행기 속에서 혼자 있었다고···."
그가 이륙한 비행기 안에서 그날을 맞이했을 거라는 건 추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런 이야기가 있었을 줄이야.
"우리는 숲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희성이에게 배웠어, 하지만 각성자가 많지 않아 몇 명 더 죽었고···."
"너의 능력은 어때?"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내 눈을 잠시 바라봤다.
"아···. 읽지 마라"
그가 눈을 바라보자 순간 뭐라 표현하기 힘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 미안, 나도 내 능력이 그대로인지 한번 해보고 싶어서"
기분은 그랬지만 나도 궁금했다.
"그래서? 어떤데?"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 아직 믿지 못하는 거 이해해"
그리고 옆의 할아버지와 성희의 눈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어르신, 저 살인마 아니에요. 괴물도 아니고, 성희까지 의심하니 좀 서운하긴 하네"
할아버지는 약간 당황한 듯 연신 기침하더니 말했다.
"쿨럭, 그···. 그래"
성희도 무안한 듯 그의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아···. 미···. 미안"
태형이는 시선을 테이블 위로 옮겼다. 사람들의 눈을 바라보는 게 본인도 부담이 된 것 같은 표정이다.
"그래서 혹시 파란 머리 사내나 애들은 본 적 없어?"
희성이는 시선을 옮기지 않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여기서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거긴 레드홀이 특정 지역 안에서만 생기거든, 네가 보내준 생수병을 발견하고서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확신이 들었어. 그래서 레드홀을 찾으려고 한동안 숲을 헤맸고"
그는 생수병을 열어서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다시 발견했어, 마침 거미가 넘어오고 있어서 희성이가 바로 죽였는데"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뒤로 어린아이 둘이 나타난 거야, 놀란 희성이가 창으로 찌를 뻔했다니까"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애들을 보고 안심하고 있는데 그 뒤로 네가 말한 그 파란 머리 사내가 나타났고 우리는 아이들로 이미 긴장이 풀린 상태여서 애들 아빠인 줄 알았어."
"파란 머리 이 새끼···."
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태형이도 내 반응을 이해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갑자기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거에 짜증이 난 것 같았어, 그런데 그때 갑자기 주변 사람들이 머리를 감싸 쥐고 쓰러지기 시작한 거야 희성이까지"
"왜?"
파란 머리의 이상한 시공간 왜곡 능력이 발현된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그의 움직임이 다 보였어, 어떻게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정신을 이상하게 만드는 느낌이었어, 흐느적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말 이상했거든, 마치 스스로 느린 시간 속에 갇혀있는 거 같은?"
시공간 왜곡이 아니었나?
"나만 멀쩡하게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자 그도 당황했는지 갑자기 땅에 떨어져 있던 나무 창을 집어 들더라고"
그는 자신의 배를 아직도 신기한 듯 만지작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대로 있으면 놈에게 죽겠다 싶었어, 그래서 난 무작정 레드홀로 뛰어들었거든 그때 내 배로 튀어나온 창끝을 본 게 마지막 기억이야."
잠시 버스 안이 고요해졌다. 이따금 들려오는 누군가의 한숨 소리만이 정적 속에서 무의미하게 퍼졌다.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내가 입을 열었다.
"혹시 우리 할아버지는 못 봤어?"
태형은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이 허공으로 향했다. 나는 그의 말을 기다렸으나 그는 계속 침묵을 지키다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난 거기가 무슨 완전히 다른 세계인 줄 알았거든?"
난 할아버지 소식을 물었는데 녀석은 다른 이야길 꺼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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