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J1. 한 달 후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기억이 날듯 말듯 답답한 심정으로 도저히 잠이 들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심한 피로감을 이겨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아주 오랜만에 정신없이 푹 잤다.
운전석 위의 침대칸은 넓고 쾌적해서 다 좋은데 창문이 없다. 커튼까지 쳤더니 아침인데도 어두웠다. 덕분에 푹 자긴 했지만 늦잠이다.
눈을 뜨니 거실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커튼을 살짝 들추니 부엌에 서있는 성희가 보였다.
"일어났어?"
성희는 프라이팬에 뭔가 만들고 있었다. 난 아래로 내려오며 물었다.
"애들은?"
성희는 창밖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니 빌라촌 중앙에 있는 놀이터가 보였다. 아이들은 그네를 타고 있었고 성운이 엄마는 옆의 벤치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상적인 평온한 모습이다. 마치 멸망 따위는 원래 없었던 것 같은
내가 테이블 앞에 앉자 성희가 에그 스크램블이 담긴 접시를 내려놨다.
"넌?"
"아까 먹었어."
난 생수병을 하나 꺼내 들이켰다. 어제는 참으로 길고 힘든 하루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난 창밖의 아이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성희는 캔 커피를 하나 꺼내 테이블에 앉으며 대답했다.
"애들은 엄마랑 있어야지"
원래의 계획이다. 아이들을 부모에게 데려다주는 것,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계획대로 되었다. 아이들이 가족을 만났다.
"정들었는데"
성희가 아쉬운 음성으로 말했다.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아이들이 안타까워 아빠 엄마를 찾아주려 했을 뿐인데
그렇게 가족을 찾아주려다가 오히려 우리가 가족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아니 그동안은 적어도 우리는 가족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살았었나 싶기도 했다.
30년 동안의 나의 인생은 단절에 가까웠다.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는 것에 서툴렀고 게다가 의지조차 없었다. 아니 아예 그게 어떤 것인지 배운 적도 경험한 적도 없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마치 4인 가족처럼 지냈다. 내가 처음 겪어보는 관계였다. 하지만 그건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다. 이제 원래의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난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성운이 엄마 이름이 이민희야, 혹시 기억나는 거 없어?"
난 어젯밤의 궁금증을 성희에게 털어놓았다. 액정을 자세히 보지 못했던 성희는 이제서야 거실 테이블 옆의 액정을 들여다봤다.
"민희?"
성희는 그 이름을 몇 번 되뇌며 창밖의 성운이 엄마를 한참 바라봤다.
"어?"
"왜?"
그녀는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눈이 커지며 말했다.
"민희 언니?"
"언니?"
나도 기억날 듯했지만, 구체적으로 아직 떠오르는 건 없었다.
"누구였지?"
내가 묻자 성희는 시선을 나에게 옮기며 입을 열었다.
"희성이 누나"
"뭐?"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 갇혀 있던 어떤 추억들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
"누나? 그 누나?"
성희와 이름이 거꾸로라 자주 장난치며 지냈던 삼총사 중 한 명 희성이, 초등학교 졸업 후 연락이 끊겨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던 그 친구
"아···. 형이랑 누나가 있었지!"
가끔 희성이네 집에 놀러 가면 간식을 챙겨주곤 했던 친절한 누나, 그 누나 이름이 민희였다. 희성이가 혀 짧은 소리로 미니 누나라고 불렀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나도 미니 누나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멀리 놀이터에서 벤치에 앉아있던 누나가 마치 내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이런 인연이···."
"그러게"
우리는 놀란 표정으로 그렇게 희성이의 누나를 바라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워낙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 얼굴도 알아보지 못했던 거 같다.
그때 작은 성희가 버스로 뛰어오며 말했다.
"아이스크림 먹어도 돼요?"
창밖의 아이 목소리에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와 성운이도 천천히 버스로 걸어왔다.
난 버스로 들어오는 누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애들이 자꾸 신세를 지내요"
내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거실 의자에 앉지도 않은 채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누나"
"네?"
내 갑작스러운 호칭 변화에 그녀는 깜짝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저 진우에요."
"...?"
"희성이 동네 친구"
그녀는 잠시 내 얼굴을 그렇게 관찰하다가 순식간에 표정이 밝아졌다.
"카센타네 그 진우?"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성희에요. 파란 대문집"
누나는 성희와 날 번갈아 바라보며 잠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듯하더니 이내 반가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너···. 너희들이 왜 여기에?"
난 웃으며 대답했다.
"사연이 길어요."
우리는 커피와 아이스크림, 그리고 약간의 다과를 테이블 차려놓고 한동안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울로 이사 간 줄 알았던 희성이네는 태백시로 이사를 온 거였다. 도시로 갔다고 해서 다 서울인 줄 알았던 어린 시절의 부정확한 정보다.
희성이는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취업해서 떠났고 누나는 태백시에서 결혼해서 아이들 둘 낳고 잘 살았었다고 한다.
최근 남편의 사업 실패로 형편이 어려워져 맞벌이에 늦게까지 집을 자주 비우게 되었고 그래서 아이들을 친할아버지 댁에 자주 맡기게 되었다고
희성이는 서울로 취직 후 십 년 가까이 일만 하다가 처음 해외여행을 계획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 출국하는 날 그 사태가 벌어졌다며 안타까워했다.
"희성이가 비행기 탄다고 연락이 온 게 마지막이야. 처음 해외여행 간다고 들떠 있던 목소리가 생생한데···."
"그래도 출발하고 한참 지났다면서요? 다른 나라는 괜찮을지 모르잖아요."
내가 작은 희망이라도 주려 했지만 그다지 위로는 되지 않는 것 같다.
아주 오래전 친구라 사실 기억도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그 친구의 안녕을 나와 성희도 기도했다. 예전처럼 다시 뭉칠 날이 올까?
"엄마! 아빠는 언제 와?"
어른들의 이야기를 따분하게 듣던 작은 성희가 묻는다. 아까 이야기를 다 해줬는데도 작은 성희는 서울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듯했다. 그저 멀리 볼일 보러 간 아빠가 곧 돌아올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침묵이 흘렀고 또한 시간도 흘러갔다.
성운이네는 집으로 돌아가 집 정리를 시작했고 나와 성희도 도왔다. 그리고 필요한 물품도 챙겨드렸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바람처럼 흘러갔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버스를 세워놓고 언덕 위 빌라촌에서 지냈다.
언덕 위쪽으로는 이상하게도 괴물들이 거의 올라오지 않았다. 가끔 날괴물이 마치 정찰하듯 마을 위로 지나가긴 했지만, 그마저도 폐허가 된 교회 위쪽으로는 접근하지 않았다.
나는 동네 사람들이 언덕 아래에서 벌어오는 코르카를 물과 음식으로 바꿔주었다. 봉사 같았지만 남는 장사였다.
사실 버스를 몰고 내가 직접 코르카를 직접 벌어와서 여기 마을 사람들을 모두 돌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그들은 점점 나에게 의지할 거다. 그리고 내가 없어지는 순간 그들은 쉽게 무너져버리겠지, 버스와 내가 평생 그들의 옆에 있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니 그냥 여기 눌러앉을까?'
평화로운 일상에 우리는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마치 정착이라도 하고 싶어질 정도로
성운이네 가족은 이제 버스를 완전히 떠나서 예전처럼 자기 집에서 잘 지내기 시작했고 반장과 유민이도 마을 사람들을 돌보며 보람차게 지내고 있었다.
유민이 아빠는 여전히 깨어나진 못하고 계셨지만 적어도 아직은 약물로 제어가 되고 있었다.
약물이 떨어져 인간형으로 변한 사람이 얼마 전까지 더 나오긴 했지만 몇 번의 아픔을 겪으며 그 사건들은 또 그렇게 지나갔다.
지금은 감염자가 없어 인간형으로 변이된 괴물이 더는 나오지 않았다. 이제 약물로 연명하는 감염자는 유민이 아버지 한 분뿐이다.
언덕 위의 마을은 그렇게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마을에 눌러앉은 지 한 달이나 지났을까?
동네 입구 쪽에 외지 사람 둘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민희 누나에게 들었다. 유민이와 반장은 언덕 아래로 정찰을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난 오랜만에 방패와 검을 챙겨 들고 버스에서 걸어 나왔다. 성희는 버스 지붕에 올라 상황을 살폈다.
멀리 두 사내가 힘없이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무기 같은 건 들고 있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얼굴이 익숙하다.
"형···. 왜 안 오셨어요."
깡마른 사내가 날 보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아는 체를 한다.
"어?"
자세히 보니 시청 별관에서 만났던 마른 청년이다. 그 청년은 더더욱 말랐고 그 옆의 덩치는 그때 봤던 그 뚱뚱한 청년일 텐데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수척해 있었다.
"아! 미안! 사정이 좀 있었어."
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들의 상태는 생각보다 더 좋지 않아 보였다.
"무슨 일이야?"
그때 다리를 후들거리던 마른 청년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그를 넘어지지 않게 잡으려던 덩치 청년도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왜들 그래?"
난 깜짝 놀라 그들을 살폈다. 그때 주변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민희 누나도 언제 내 뒤를 따라왔는지 쓰러져있는 두 청년에게 뛰어가 그들의 상태를 살폈다.
"며칠 굶은 거 같아, 다리에 상처도 심하고"
난 아직 정신은 잃지 않은 청년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 물 좀"
내가 고개를 돌리는데 마침 성희가 생수 두 병을 내밀었다. 그녀도 눈치는 참 빠르다.
두 청년은 그렇게 단숨에 생수병을 비운 후 힘겨운 한숨을 쉬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 사장이 죽은 뒤로 나름 그곳도 정리가 되나 싶었는데 본관 사람들과의 정치질이 평화롭게 끝나진 않은 듯했다.
나는 시청에 다시 들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사실 그런 집단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좀 더 정보를 얻고 싶어 다시 들른다고는 했지만, 그날 밤에는 나도 너무 피곤했다. 그리고 괜히 다시 그 집단의 일에 휘말려서 위험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본관 사람들은 위력으로 별관 사람들을 제압하려 했고 그들의 생필품 수색까지 방해했다고 한다. 그래도 김 사장이 모아놓은 각종 생필품 덕분에 별관 사람들이 꽤 오래 저항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덩치 청년이 거친 숨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본관 시장 새끼가 별관 사람들을 전부 감염시켰어요. 인간형 괴물을 어디 숨겨놨었는지···. 밤에 별관에다가 풀어서"
"그러면 별관 사람들 다 죽은 거야?"
그때 어두운 표정의 깡마른 청년이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랬다면 차라리 다행이죠"
"뭐?"
내 기억으로 별관 사람들은 대략 백 명은 넘어 보였다.
'그들이 설마?'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