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J1. 붉은 거미
"붉은 거미라···."
예전에 초록 방벽이 있던 터널에서 만났던 붉은 거미
놈에게는 내 검이 먹히지 않았다. 그리고 버스의 접촉 파괴를 이미 알고 있는 듯 안간힘을 쓰며 버스에 닿지 않으려 했었다. 검붉은 몸통에 있던 수많은 붉은 눈이 떠오르자 소름이 돋았다.
"놈이 그 터널에 다시 나타나지는 않겠지? 그때 놈도 위험했으니"
난 순대를 하나 집어 먹으며 말을 이었다.
"시체 조각들이 바닥에 너무 많았어, 그리고 그 많은 사람이 터널로 들어가서 한꺼번에 죽은 건 아니었던 거 같아. 시체들의 부패 상태가 다 달랐거든."
"놈이 모은 건가···. 대체 왜?"
나라가 중얼거리자 할아버지가 막걸릿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콜록, 먹이를 모아서 가져가려고 그랬나···. 새끼들 먹이려고?"
우리는 모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황당한 이야기였지만 그렇다고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괴물이건 인간이건 다 먹고 살려고 하는 거 아닌가?
"초록 방벽을 또 본다고 해도 우리가 너머로 갈 수 있을까? 간다고 해도 너머에 있는 사람들을 데려올 수 있을지도 미지수고"
나라의 말에 내가 대답했다.
"우리 버스가 넘어갈 수 있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초록 방벽을 만났을 때는 버스로 접근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화살도 튕겨내던 초록 젤리 방벽이었다. 붉은 눈 거미가 방벽을 넘나드는 건 놈에게만 있는 어떤 특수한 능력 덕분일 수 있다. 버스 혹은 인간도 가능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 터널로 다시 가볼까?"
성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난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가서 한없이 기다릴 수도 없을 것 같아,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고"
우리는 말없이 다들 생각에 잠긴 채 식사를 마치고 테이블을 정리했다.
난 탄산수를 하나 열어서 마시며 조수석에 앉았다.
"일단 원래 가던 데로 강릉까지 가자"
그때 나라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난 강릉에 사촌이 아직 있을지 확신이 없거든···. 사실 별로 친하지도 않고···."
그녀는 강릉에 꼭 가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우리와 함께하고 싶었던 거 같다.
"할아버지 가족이 있다니까"
내 말에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대충은 느낌이 왔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가려고 했으니까"
성희도 내 말을 거들며 운전석에 앉아 악셀을 밟았다.
버스는 다시 국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달리지 않아 표지판이 나타났다.
<직진 환선굴/신기>
<우회전 동해/태백>
"잠시만 세워봐"
성희는 핸들을 우측으로 돌리다 말고 버스를 천천히 세웠다.
환선굴에 가본 적이 있다. 학창 시절 체험학습으로 간 거다.
환선굴로 가는 길은 좀 복잡했던 기억이 있다. 어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 들어갔다가 다시 차에서 내려 등산하듯 힘들게 동굴 입구까지 걸어갔었다. 우리 캠핑카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다.
"왜?"
내가 표지판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자 성희가 물었다.
"아니, 저 동굴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져서"
보통 이런 멸망한 상황에서 오래된 동굴에는 괴물의 근거지가 있지 않나? 영화를 너무 봤나?
"뭐가 있든 위험할 거 같아"
"위험하지 않으면 그 반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방공호 같은···."
잠시 버스에 침묵이 흘렀다.
"글쎄 저기 살고 싶진 않은데"
나라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쿨럭, 물도 있고 물고기나 박쥐 같은 거 잡아먹고 살면 뭐 죽진 않겠어···. 허허"
내가 생각해봐도 단순한 궁금증으로 저기 가보는 건 무리다.
내가 눈짓하자 성희는 다시 버스를 출발시켰다. 우회전하고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다시 터널이 나왔다.
터널은 길지 않았고 안에는 부서진 승용차 하나가 옆으로 누워있긴 했지만, 버스는 별문제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이후에도 몇 번의 터널을 더 지났다. 강원도에는 정말 터널이 많다.
좀 긴 터널을 지날 때는 혹시나 초록 방벽이 있지 않을까 기대 아닌 기대를 해보기도 했지만, 방벽은커녕 괴물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도로가 왜 이렇게 한산하지?"
성희가 핸들을 잡은 채 입을 열었다. 난 바로 대답했다.
"아, 다들 집에서 쉬나 봐"
내 썰렁한 농담에 다들 뇌 정지가 왔는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여기는 원래도 차가 많지 않아 쿨럭"
한 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노란색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우리에겐 의미 없는 표지판이었지만 괜스레 멸망 이전이 그리워졌다.
<60 단속 중 250m>
"성희야 지금 10킬로 오버다."
성희가 피식 웃으며 속도를 더 높였다.
"과속하지 말자고"
"다시 80 제한이야."
우리가 달리는 도로는 상태가 정말 좋았다. 드문드문 멈춰 선 차량이 보이긴 했지만 진행하는 데는 별 방해가 되지 않았다.
"과적 단속 중이라는데?"
나라도 길가에 표지판을 보더니 내 썰렁한 농담에 동참한다.
"그건 그렇고 불법 개조 아닌가? 이 캠핑카"
그때 참다못한 성희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만···."
다시금 그렇게 버스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이렇게 오래 멈추지 않고 달린 건 이 버스를 타고 처음인 것 같다. 장애물도 괴물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 도로에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 같다. 심지어 그 홍수의 난리 통에도 계속 이어지는 고가도로와 터널은 별 피해가 없어 보였다.
그때 고가 왼쪽 아래 큰 강물 위에 이상한 게 보였다.
"뭐지?"
성희의 말에 할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
"지붕이야 쿨럭"
큰 강인 줄 알았던 그곳은 원래 마을이었던 거 같다. 고가도로만 멀쩡할 뿐 저 아래는 아직도 홍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류라서 아직 물이 다 안 빠진 것 같은데"
내가 중얼거리는데 테이블 자리에 있던 나라가 왼쪽 창문 밖을 살피다 말했다.
"어? 잠깐 세워봐"
성희가 천천히 버스를 세우자 나라가 물에 잠긴 마을을 천천히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수룡이다."
난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뒤쪽 계단으로 뛰어가 지붕으로 올라갔다.
정말 수룡이 맞았다. 놈들은 거센 물살에 떠내려가더니 여기 물에 잠긴 마을에 모여있던 모양이다. 물살이 잔잔해서 여기 모여있는 건가? 꽤 많은 놈들이 수면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활을 쓸까 하다가 블루건 의자에 앉았다. 다행히 총구가 아래쪽으로도 어느 정도 겨눌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퉁 퉁 퉁 퉁 퉁
내가 블루건을 쏘자 몇 발씩 맞은 놈들이 하나씩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큰 놈은 열 발 이상도도 필요해 보였다.
퉁 퉁 파직! 퉁 퉁 퉁 파직!
무슨 박자 맞추듯 그렇게 블루건 발사 소리와 멀리 놈들의 터지는 소리가 어우러졌다.
'음?'
그런데 놈들이 거품과 연기가 되어 사라졌는데도 코르카가 날아오지 않았다. 난 발사를 멈추고 거리를 가늠했다.
'너무 머네'
코르카를 직접 가지러 내려갈 수 있을지 주변을 살폈으나 고가에서 아랫마을 쪽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아주 멀리 돌아가야 하는 것 같았다.
난 버스로 내려가 운전석 액정의 지도를 살폈다. 지도는 버스 진화 이후에도 많이 업그레이드되진 않았다. 여전히 길 정도만 표시되어 있었다.
"코르카가 안 날아오네?"
"그래서 아랫마을 쪽으로 접근해보려고 하는데 너무 많이 돌아"
"그냥 가자"
하지만 난 아까운 마음에 계속 창밖을 살폈다. 물속에 몇 마리나 더 있을진 모르겠지만 대충 보이는 놈들만 잡아도 코르카 몇백 개는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에 보이는 걸 그냥 두고 가기엔 너무 아까웠다.
"하아"
그런데 그때 흙탕물 너머 멀리 야산에서 뭔가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어? 저거 보여?"
내 말에 전부 내가 손으로 가리킨 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거미?"
멀어서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저렇게 움직이는 괴물은 여태껏 붉은 거미밖에 보질 못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우연일까? 놈도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가 가는 방향과 비슷했다.
"성희야"
내 말에 그녀는 다시 악셀을 밟았다. 그 와중에 코르카 몇 개가 버스로 날아왔다. 버스의 흡수 사정거리 안으로 몇 개가 떠내려온 모양이다.
놈은 야산을 넘어가다 다시 물에 잠긴 마을을 만나고는 잠시 망설이는 듯 보였다.
"물에 들어가면 먹잇감이 되겠지"
물속에도 굶주린 괴물들이 많다. 놈이 들어가는 순간 수룡들에게는 별미가 될 거다.
"오오."
그때 놈의 몸에서 붉은색의 거미줄이 수십 가닥 튀어나오더니 물에 잠긴 마을을 넘어 건너편 아산까지 뻗어나갔다.
"저 거리를?"
나라가 놀라 외치는데 놈은 그 거미줄을 타고 건너편으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그런데 놈이 건너온 곳은 도로와 붙어있는 야산이었다. 우리 앞쪽이다.
난 버스의 투명 버튼을 눌렀다. 놈의 움직임을 볼 때 다행히 아직 우리를 발견하진 못한 것 같았다.
"계속 가자"
멈춰있던 버스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은 국도 위로 올라오더니 도로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시원하게 뻗어있는 고가 다리의 국도로 이동하는 게 낫다는 걸 놈도 인지한 모양이다.
"도로가 편한 줄 아는 모양이네"
성희가 전방 50미터 정도 떨어져 놈을 따라가며 중얼거렸다.
"다행이야 산 쪽으로 사라졌으면 못 따라갔을 텐데"
놈을 따라 달리다 보니 표지판이 나타났다. 직진하면 동해고 우측으로 빠지면 삼척이다.
"강릉 가려면 어차피 우측으로 빠져야 해, 삼척IC로 가야 하거든."
내 말에 성희가 놈의 움직임을 살피며 말했다.
"놈이 어디로 갈까?"
갑자기 무슨 범죄자 추적하는 경찰이 된 거 같은 기분이다.
"괴물 따라 도로를 달리니 기분이 이상한데?"
내가 중얼거리는데 나라가 외쳤다.
"어라?"
놈이 갑자기 도로를 벗어나 우측의 야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삼척에 볼일이 있나 봐 쿨럭"
상황을 구경하던 할아버지의 말이다. 그때 놈이 산 너머로 사라졌다.
"젠장 안 보여!"
"놈이 고속도로 타려고 삼척IC로 갈 리는 없을 거고 삼척시로 향하는 건가?"
그때 삼척 방향으로 빠지는 길이 나와 우리는 우측으로 버스를 틀었다. 난 계속 오른쪽에 있는 산을 살폈지만, 놈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며 산 쪽을 계속 살피는데도 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달리니 왼쪽에 삼척IC로 진입하는 도로가 나타났다. 직진하면 삼척시로 들어가는 길이고 좌회전하면 동해를 지나 강릉까지 쭉 이어지는 고속도로다.
성희가 머뭇거리는 듯 해서 바로 이야기했다.
"직진하자."
내가 뒤를 바라보자 나라와 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성희는 다시 버스의 속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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