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J1. 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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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대표로 보이는 그는 긴 흰머리를 뒤로 묶은 중년인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고 주변에서 고통의 신음으로 발버둥 치는 동료들을 바라봤다.
"끄아아아아"
"도···. 도와줘!"
그때 그의 뒤에서 다시 화살 여러 발이 나타났다. 그런데 화살이 날아가는 방향은 나와 유민이가 있는 쪽이 아니었다.
"악!"
"끄윽!"
화살이 향한 곳은 고통에 발버둥 치며 바닥에 쓰러져 있던 그의 동료들이었다.
짧은 비명이 몇 번 들리더니 교회 주차장은 이내 다시 고요해졌다.
"이제 좀 조용하군."
그는 머리에 화살이 꽂힌 채 사후 경련을 일으키며 부들거리는 사람들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 시선을 유민이에게로 옮겼다.
"거기 대머리 학생, 같이 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민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중년인의 뒤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끄아아악!"
활을 쏘던 사람들의 비명으로 보인다. 순간 당황한 중년인이 뒤를 돌아보더니 양손을 들었다.
'뭘 하려고?'
그의 왼손에서 심상치 않은 붉은 빛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바로 오른손에서는 묘한 푸른 빛의 구체가 만들어지더니 붉은빛과 합쳐져 엄청나게 밝은 빛의 구체가 생성되었다.
"어?"
그리고 그 눈 부신 빛은 그대로 유민이를 향해 날아갔다.
난 다급하게 그쪽으로 뛰었다. 하지만 중년인의 오른손에 휘감긴 푸른빛이 순식간에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윽!"
난 그 이상한 힘의 기운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져 나뒹굴었다.
'뭐지?'
난 아직 꽉 움켜쥐고 있던 검을 놓지 않은 채 누워있는 상태로 주변의 중년인을 찾았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중년인과 유민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성희다. 옆을 돌아보니 어느새 버스가 가까이 있었다. 난 성희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일어났다.
"괜찮아, 유민이는?"
"그놈이 둘러메고 언덕 아래로 내려갔어."
"뭐?"
유민이가 납치됐다.
적어도 죽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지만 녀석이 없으면 그의 가족은 곧 위험에 처할 것이다. 아니 이 동네 자체가 위험에 빠진다.
"어디로 갔는지 봤어?"
성희는 고개를 저었다.
"급하게 버스 몰고 오는데 언덕 아래로 사라졌어."
"젠장"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의 신음이 들렸다.
"끄윽"
돌아보니 아까 검을 들고 내 오른편에서 달려들던 놈이다. 화살이 머리가 아니라 어깨에 박혀있다. 그 덕에 목숨을 조금이라도 연장한 듯싶었다.
난 다가가서 놈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올렸다.
"네놈들 정체가 뭐야?"
놈은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눈을 부라리며 날 노려봤다. 난 놈의 어깨에 박혀있는 활을 조금 비틀었다.
내게 이렇게 잔인한 모습이 있었나? 여태껏 살면서 내가 이런 행동을 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색하진 않았다.
그의 어깨에서 울컥하고 피가 쏟아졌다.
"말하기 싫으면 죽던가"
난 발로 그의 어깨를 밟았다.
"끄아아"
하지만 놈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근처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사···. 살려···."
아까 도끼를 휘두르던 놈이다.
"궁수들이 형편없네"
놈도 머리를 빗겨나가 어깨 쪽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
"저놈한테 물어볼게, 잘 가라"
내가 검을 손을 치켜들자 여태껏 버티던 놈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시···. 시청"
"뭐?"
"태백시청에···."
난 놈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애를 왜 잡아간 거야?"
놈은 체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능력자의 피···."
"능력자?"
각성자를 놈들은 이렇게 부르나?
"피를 왜?"
"마···. 마신다."
"뭐?"
내가 되물었지만, 순간 번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놈들은 각성자의 움직임으로 달려들었다. 그런데 혹시 각성자가 아니라면? 그런 움직임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게 그럼 각성자의 피?
난 놈의 머리채를 잡아들고 버스 쪽으로 돌렸다.
"뭐가 보여?"
놈은 눈을 반쯤 뜬 채로 내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당황한 눈알을 굴렸다.
"뭐···. 뭐가 보여야 하는데?"
놈은 버스를 보지 못했다. 그때 근처에서 성희의 음성이 들렸다.
"이놈도 안 보이는 거 같아"
성희도 이미 다른 한 명의 생존자를 심문하고 있었다.
"이놈들 각성자 피를 먹는 거 같아, 시청에 근거지가 있는 모양인데?"
성희의 말이다. 내가 들은 정보와 다르지 않았다. 굳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리고도 아직 의식이 있는 걸 보면 각성자의 피를 마셔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아까 그놈은 능력자인가?"
"그···. 그게"
그는 뭔가를 더 말하려 하다가 울컥 피를 토하며 의식을 잃었다. 죽었나?
성희가 다른 한 놈의 머리채를 잡고 물어보려 했으나 그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젠장"
좀 전에 놈의 기이한 섬광에 쓰러졌다. 그게 놈의 각성 능력이라면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거다.
"가자"
내 말에 성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버스 창으로 밖을 바라보던 아이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애들도 이 상황을 알고 있을까? 애들만 여기에 두고 가는 것도 안전하지는 않다. 그나마 이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곳은 우리 버스다.
성희와 다시 버스에 오르니 성운이가 물었다.
"유민이 형 구하러 가는 거죠?"
아이도 이미 알고 있었다. 작은 성희는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나와 성운이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그래, 나쁜 아저씨가 잡아갔어."
작은 성희가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옮기며 짧게 말했다.
"얼른 가요"
난 어른스러운 아이들의 모습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오히려 이런 세상에서 버틸 힘이 되는 것 같았다.
탐지 숫자는 전부 0이다. 이제 유민이 형은 탐지에 잡히지 않았다. 버스도 알 수 없는 어떤 학습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악셀을 밟았다. 버스는 천천히 언덕 아래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혹시 몰라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버스를 움직였다. 하지만 수상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언덕을 내려오다 보니 어제 거대 이구아나가 지나온 자취가 보였다. 다수의 건물과 시설물이 마치 재개발 철거 지역같이 초토화되어있었다. 그래서인지 주변의 분위기가 정말 많이 달라졌다.
정말 멸망한 세상의 풍경으로 점점 변하는 것 같다.
"더 있으면 동네 알아보지도 못할 것 같다."
내 말에 성희가 걱정의 눈빛으로 말했다.
"정말 이런 곳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막연한 희망이나 기대 따위를 말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정말 이런 세상에서 사는 게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이 문득 스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잡다한 생각은 눈앞에 나타난 광경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괴물 벌레 십여 마리가 길가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 뜯어먹고 있었다.
'어젯밤에 언덕을 내려온 놈들이 있었나?'
괴물의 날카로운 발톱에 난자당해 죽은 걸로 보이는 그 시체는 차마 눈뜨고 지켜보는 것도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터트려 버릴까?"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때 탐지 숫자가 약간 바뀐 게 눈에 들어왔다.
[ 3< 18 < 12 ]
저 벌레들 말고도 근처에 다른 괴물이 더 있다. 그 순간 내 궁금증에 답이라도 하듯 옆의 골목에서 다람쥐 같은 게 깡충깡충 뛰어나왔다. 다섯 마리의 악마쥐다.
놈들은 순식간에 벌레들에게 달려들더니 아작아작 모두 씹어먹어 버렸다.
"역시 벌레들은 덩굴에서 나온 건가 봐, 악마쥐들이 좋아해"
난 다시 버스의 속도를 높이려 악셀을 밟다가 못난이 두 마리가 건물 뒤에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악마쥐는 더 뜯어먹을 벌레들이 보이지 않자 다시 골목 어딘가로 사라졌다. 숨어있던 못난이들은 그제야 악마쥐가 사라진 반대편으로 기어갔다.
"역시 못난이는 악마쥐를 무서워해"
작은 소동이 정리되고 우리 버스는 다시 속도를 높여 한동안 달렸다. 태백시청으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일전에 몇 번 가본 곳이고 표지판도 아직 부서지지 않고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시청은 살짝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으로 나무들이 많이 심겨 있어 시청 건물이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 입구 옆에는 시의회 건물이 보였고 체육센터라고 간판이 크게 걸려있는 강당 같은 건물도 보였다.
주차장 입구는 바리케이드로 막혀 있다. 근처에 있는 걸 전부 다 가져왔는지 몇 겹으로 막혀 있었고 그사이를 쇠사슬 같은 걸로 단단히 묶어 놨다. 차량은커녕 사람도 진입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나는 시청 언덕 주변으로 천천히 버스를 몰며 주변을 자세히 관찰했다.
입구 쪽은 높은 언덕으로 주차장 안쪽이 보이지 않았지만, 주변을 돌아보니 다른 입구도 여럿 보였다. 시청 별관 간판도 보였고 별도로 작은 주차장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입구는 바리케이드와 쇠사슬로 막혀 있었다.
버스를 몰고 안쪽 주차장으로 진입하긴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도보로는 충분히 진입할 틈이 보였다. 문제는 들키지 않고 들어가는 거지만
우리는 한 바퀴 돌며 적당한 곳에 버스를 세우고 잠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아직 시야에는 사람은커녕 괴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탐지 램프의 숫자는 계속 천천히 바뀌고 있었다.
[ 0 < 4 < 18 ]
날괴물이 시청 별관 건물 위쪽으로 날아드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두 마리다.
놈들은 건물 옥상에서 뭘 발견한 듯 그렇게 특정 지점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왔다. 그런데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옥상에서 화살 여러 발이 날아올랐다.
뀌이이익!
화살을 온몸에 맞은 괴물들은 괴성을 지르며 그대로 옥상으로 떨어졌다.
뀌익! 뀌이이
옥상에서 놈들의 찢어지는 듯한 괴성이 한동안 들리더니 이내 다시 고요해졌다.
옥상에서도 사람들이 떨어진 날괴물을 공격한 모양이다.
저들이 만약 각성자가 아니라 흡혈 인간들이라면 그들에 의해서도 코르카가 생성될까?
평범한 사람이나 다른 괴물에 의해 죽으면 코르카가 나오지 않는다. 사체나 뼈가 그대로 남으니 코르카가 나올 여지 자체가 없는 거다.
그런데 각성자가 죽이면 마치 원래 존재가 없었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코르카를 내뱉고 사체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문득 그게 마치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옥상을 계속 지켜보던 성희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좀 많은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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