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J1. 방어
놈들이 버스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그 흉측한 얼굴들이 번개의 빛에 순간적으로 비쳤을 때 난 보았다.
놈들은 웃고 있었다.
버스 조명 한계를 살짝 벗어난 위치에서 보였던 놈들은 다시 빗속의 어둠으로 사라졌지만 우리는 안다, 그곳에 그대로 서 있다는걸
아니
놈들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버스 조명의 불빛에 놈들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정말 감정이 있는 것처럼 웃고 있는 놈들도 보였다.
흉측한 인간형 괴물의 소름 끼칠듯한 얼굴에 표정까지 나타나니 오랜만에 괴물에 대한 공포심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포탑은 여전히 조용했다.
"왜 포탑이?"
십여 미터도 되지 않는 놈들에게 여전히 포탄은 발사되지 않고 있었다.
"비 때문인가? 포탑의 센서가 고장인가?"
난 액정의 [자동 접촉 파괴] 버튼을 눌렀다. 어차피 포탄과 효율은 같다. 그런데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당하면 예전 터널에서처럼 쉴드 충전의 지연으로 버스가 손상될 수 있다.
포탑으로 미리 놈들의 수를 좀 줄이려고 했는데 오늘따라 이상하다.
그런데 그때
거실 창 바로 옆에 새하얀 얼굴이 나타났다.
'어? 사람?'
괴물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얼굴이다. 동네 사람도 아니다.
버스 조명에 비친 그는 파란색의 긴 머리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버스 안의 나와 성희를 번갈아 잠시 바라보더니 갑자기 순식간에 사라졌다.
"뭐지?"
성희가 황당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상하게 어디선가 본 거 같은 느낌이다.
"파란 긴 머리···. 파란 긴 머리···.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아닌가?"
그때 성희가 입을 열었다.
"지하에서 내가 다시 잡혔을 때"
"뭐?"
"수다쟁이 아줌마의 말이 기억나"
나도 순간 심한 수다를 떨다가 그대로 절명해버린 거머리 아줌마가 떠올랐다. 그때 그녀가 파란 긴 머리의 사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본 게 아니라 들은 거였다.
"각성자에 대해서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 같은 느낌이었어, 피로 약물을 만드는 방법까지도"
뭔가 이 사태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과연 우리에게 우호적일까? 아마도 아닐 거다.
버스가 지금은 투명 상태가 아니라서 그가 버스와 우리를 본 것으로는 각성자인지는 판별할 수가 없었다.
난 액정의 [투명] 버튼을 눌렀다.
'다시 나타나길 기다려야'
그런데 다시금 생각해보니 그는 주변에 수많은 인간형 괴물이 버스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버스에 접근해서 안을 관찰했다. 그 표정에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놈도 괴물인가?"
성희의 말을 나도 부정할 수 없었다. 놈이 멀쩡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해서 괴물이 아니라는 보장도 없다.
"젠장, 불확실한 게 너무 많아"
한 달여 너무 평화로운 일상에 익숙해졌던 것일까? 갑자기 몰려오는 위기감에 더해 오랜만에 정보 부족에 다시 시달리니 급격한 스트레스가 밀려왔다.
그때 버스 조명의 끄트머리에서 아련하게 보였던 인간형 괴물들이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데?"
성희의 말이다.
"그런데 정말 포탑이 고장인가? 아니면 비가 와서?"
세상이 이렇게 되고 나서 처음 겪는 비다. 게다가 폭풍우다. 버스도 이런 날씨는 처음 겪는 거다.
포탑이 괴물을 인식하는 방식이 어떤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저 비에 영향을 받고 있을 확률이 제일 높았다.
뀌이이이이
인간형 괴물 한 놈이 괴성을 지르며 버스로 달려들었다. 놈이 가까이 다가오자 얼굴이 좀 더 자세히 보였다.
"이전과 좀 다른데?"
흉측한 얼굴은 그대로인데 묘하게 인간일 때의 모습이 남아있는 듯한 느낌이다. 긴 머리칼이 그대로 달려있었으며 뾰족한 턱과 몸의 형태로 인간 여성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래도 괴물이야."
그 여성 인간형 괴물의 손이 버스에 닿았다.
텅! 파직!
바로 눈앞에서 괴물이 터져나갔고 초록의 액체가 버스 창문으로 엄청나게 튀었지만 이내 바닥으로 전부 흘러내렸다.
"다행이다. 접촉 파괴는 동작해!"
그때 인간형 괴물 두 마리가 다시 버스로 덤벼들었다. 그리고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대략 열 마리 정도의 인간형 괴물이 피떡이 되어 코르카로 돌아왔고 드물게 코르카 두 개가 나오는 놈도 있었다.
"더 가까이 안 온다."
아직도 수십 마리의 인간형 괴물이 버스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놈들은 일정 거리를 유지하기만 할 뿐 더는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지능이 남아 있나 본데?"
성희가 계속 중얼거린다. 그녀도 오늘은 꽤 불안한 모양이다. 한 달 전과 다른 모습이다.
"어?"
갑자기 인간형 수십 마리가 버스를 피하며 거리를 두고 빌라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젠장"
버스를 공격하는 게 여의찮아 보이자 옆의 빌라 건물을 먼저 치려고 하는 거 같았다. 난 버스 반대편 창으로 다가가 조명에 비친 유민이네 빌라 입구를 살폈다.
입구에는 익숙한 인간형 괴물이 버티고 서 있었다. 유민이 형이다.
파직!
빌라 입구로 달려들던 인간형 괴물 한 마리의 목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역시 강해, 하지만 너무 많아"
그 순간 유민이 형에게 십여 마리의 괴물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파직! 파직!
유민이 형은 달려드는 놈들의 목에 날카로운 발톱을 연신 휘둘렀다. 그런데 세 마리쯤의 괴물 목을 날리는 순간 다른 놈들이 유민이 형의 팔과 다리를 잡았다.
카아아악!
유민이 형의 괴성이 들려왔다. 난 등에서 검을 뽑고 버스 문으로 다가갔다.
"위험해"
성희가 내 팔을 잡았다.
카아악!
유민이 형은 인간형 괴물이 아니라 괴물 형 인간이다. 그리고 유민이네 식구다. 그 식구가 눈앞에서 죽을 위험에 처했다.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잖아."
내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성희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이 새끼들이!"
유민이다. 그 옆에 반장도 보였다.
그 둘은 순식간에 유민이 형에게 달라붙어 있는 인간형 괴물들의 사지를 붙잡더니 뜯어버렸다.
하지만 그 순간 유민이의 등으로 또 다른 인간형 괴물의 발톱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는 미처 피하지 못했다.
"윽!"
그 순간 반장이 달려들며 그 괴물의 머리를 발로 걷어찼다.
빡!
하지만 동시에 다른 괴물의 손에 머리채를 잡힌 반장의 고개가 뒤로 확 젖혀졌다. 유민이는 등의 상처로 비틀거리고 있었고 버둥거리는 반장의 목으로 괴물의 칼날 발톱이 날아들었다.
난 성희의 손을 뿌리치고 버스 옆문을 열고 뛰어나가 검을 휘둘렀다.
시간은 느리게 흐르지 않았지만 마치 나 스스로 시간의 틈을 파고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반장의 목 바로 앞에서 내 검에 괴물의 팔이 잘려 나갔다. 그리고 난 바로 유민이에게 달려드는 다른 괴물의 목을 베었다.
뀌이이익!
그때 내 목덜미 뒤에서 찬 바람이 불었다. 괴물의 발톱이다. 그리고 그 옆으로 익숙한 괴물의 냄새가 났다. 유민이 형이다.
나에게 기습적으로 달려드는 괴물의 손을 유민이 형이 잡고 뜯어버렸다. 그 바람에 초록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유민아! 괜찮아?"
내가 비틀거리는 그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반장의 옆으로 두 마리의 인간형이 다시 달려들었다.
난 급히 한 놈의 어깨를 베어냈다. 그러자 주변으로 초록의 피가 튀었다. 그때 옆에 있던 괴물의 발톱이 내 팔을 스치더니 그대로 나의 목까지 날아왔다.
그 순간 또 내가 좋아하는 바람이 불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그녀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성희의 무릎이 놈의 머리를 찍었다.
빡! 파직!
비틀거리던 유민이가 겨우 자세를 바로잡았다. 다행히 출혈은 크지 않아 보였다. 그의 옆으로 괴물 형과 반장이 다가갔다.
빌라 입구로 달려들던 십여 마리의 인간형은 순식간에 그렇게 피떡이 되더니 이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형! 괜찮아요?"
유민이가 우리를 향해 물었다.
"내가 물어볼 소리를! 넌 어때?"
녀석은 특유의 여유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괜찮아요! 저 금방 나아요!"
녀석은 좀 전의 상황에 고마운 듯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결연한 표정으로 빌라 건물 앞에 섰다.
그때 다시 몇 마리의 괴물이 달려들었지만, 유민이와 반장, 그리고 괴물 형의 협공으로 순식간에 놈들을 작살냈다. 그 정도로는 이쪽 빌라의 정문을 통과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성희가 소리쳤다.
"벽에!"
빌라 옆쪽 벽을 십여 마리의 괴물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젠장!"
난 버스로 뛰어 들어가 창고에서 바로 활과 화살통을 꺼내 지붕으로 올라갔다.
난 바로 벽을 오르는 괴물을 겨누고 활을 쐈다.
카악! 칵!
총 열 발을 연속으로 쏘고 나서 지붕 문을 열고 대기하고 있던 성희에게 화살통을 던졌다.
괴물 놈들은 등에 화살이 꽂힌 채로 여전히 벽을 오르고 있었다.
유민이와 반장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느껴졌다.
"좀 있어 봐"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놈들의 몸이 터져나갔다.
파직! 파직! 파직!
벽을 기어오르던 인간형 괴물 열 마리가 그렇게 터져나갔다. 그런데 아직 두 마리가 남았다. 그놈들은 이층과 삼 층 빌라의 창문을 부수고 있었다.
"악!"
깨진 유리 조각이 유민이와 반장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창문을 살피니 이미 그 두 마리는 깨진 창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다녀올게요!"
유민이와 반장이 급하게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이내 창문 안쪽에서 집기가 마구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빌라 입구로 달려드는 놈들은 유민이 형이 계속 막아내고 있었지만 아슬아슬했다.
난 버스 아래로 내려가 리필된 화살통을 둘러메고 성희와 함께 다시 밖으로 뛰어나갔다.
와장창!
그때 2층에서 괴물의 머리가 튀어나왔다.
쨍그랑!
3층에서 괴물의 잘린 몸통 일부분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차례로 유민이와 반장이 밖을 확인하는 듯 창문에 모습을 드러냈다.
3층에 있던 유민이의 시선이 버스 너머 멀리 언덕 쪽을 향하고 있었다.
"형! 아직 너무 많아요!"
나도 버스 반대편 창문 너머로 여전히 다가오고 있는 수많은 인간형 괴물이 눈에 들어왔다.
"옆 건물!"
그중 일부는 버스와 유민이네가 커버하지 못하는 옆 건물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쪽에도 오늘 피신한 사람들이 꽤 있다.
"젠장"
버스를 이동하기도 애매하다. 그렇다고 내가 뛰어나가 저 건물을 혼자 방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적어도 이십 마리는 되어 보이는 괴물들이 저 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이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머지는 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난 다시 버스 지붕으로 올라가 눈에 보이는 놈들에게 화살을 날렸다.
파직! 파직!
화살이 머리와 목과 등에 꽂힌 채로 건물 안으로 들어간 괴물들은 잠시 후 그대로 터져나갔다. 하지만 놈들 모두에게 화살을 날릴 수는 없었다.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젠장 포탑만 작동했어도!"
오늘은 아직도 조용한 포탑이 정말 원망스러웠다.
이 마을의 평화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유지될 줄 알았다. 버스의 포탑이 거의 사기 아이템이라 버스만 있으면 어떤 괴물의 공격이라도 다 막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상황에는 변수가 존재한다.
이대로 가면 저 옆 빌라 건물의 사람들은 다 죽을 거다. 내가 저 건물로 뛰어 들어가면 두어 마리 정도는 더 해치울 수 있겠지만 그뿐이다.
저 인간형 괴물들을 깡그리 죽일 수 없다면 무모한 행동은 삼가야 한다.
성희도 유민이네 빌라 입구를 방어하느라 옆 건물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난 리필을 위해 화살통을 창고에 넣고 옆문으로 나가서 이쪽으로 밀려드는 괴물에게 검을 휘둘렀다.
나조차 여기 방어에 집중하는 것도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살려줘!
옆 건물에서 비명이 계속 들려왔다. 유민이와 반장이 다시 건물 입구로 내려왔지만, 녀석들도 그 건물 쪽으로 도우러 갈 여력이 없었다.
"엄마!!"
반장의 어머니가 옆 건물에 있었나 보다.
"엄마 구하러 가야 해!"
반장이 처절한 소리를 지르며 옆 건물로 뛰어가려 했으나 밀려드는 괴물이 너무 많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유민이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반장을 도우려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도 자기 가족이 있는 이 빌라가 우선이다.
번쩍!
그때 하늘에서 눈이 시리도록 거대한 벼락이 치더니 순식간에 옆 건물로 떨어졌다.
파지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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