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사냥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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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해는 똑같네"
큰 나무들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은 이질적인 숲속에서 유일하게 친근한 것이었다.
"공기 성분도 같은 건가, 그래서 우리도, 놈들도 서로의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나?"
난 전방을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놈들이 피난의 목적지를 우리의 세상으로 정한 건가
"저기 뭐가 있는데?"
성희가 오른쪽 창밖을 보며 말했다. 난 버스를 세우고 그녀가 가리킨 곳을 살폈다.
숲 안쪽에 작은 공터가 보였고 그 안에 작은 움집 같은 게 여러 개 있었다.
"괴물 집인가? 못난이?"
성희는 유심히 뭔가 관찰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빨간색 저거···. 옷 같은데?"
움집 옆의 나뭇가지에 걸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물체가 보였다. 그리고 색상이나 형태로 봤을 때 그건 인간의 것이었다.
난 탐지 숫자를 확인한 후 핸들을 우측으로 조금 꺾었다. 길은 없었지만, 그쪽까지는 수풀뿐이어서 버스로 밀어버리며 들어가는 건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각종 잡동사니가 널브러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움집은 다섯 개였고 대부분 쓰기 힘들 정도로 부서져 있었다.
바닥에는 불을 피운 흔적도 보였으며 마른 핏자국도 눈에 띄었다.
"생존자들이 머물렀던 곳인가 봐"
"떠난 지 좀 된 거 같다."
아니면 다 몰살당했거나, 하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내려서 살펴볼게."
성희가 일어서자, 난 따라 일어서며 그녀를 잡았다.
"우선 조금만 지켜보자, 우리 밥도 먹어야지"
여기로 넘어오고 우리는 한 끼도 먹지 못했다. 계속 정신이 없기도 했고 이상한 중력감과 무력감이 들어 배도 고프지 않았다.
꼬르륵
"그래, 이제 뭘 만날지 모르는데 든든히 먹자"
성희는 덤덤한 듯 말하며 부엌으로 가서 이것저것 꺼내기 시작했다.
난 침대로 걸어가 태형을 확인했다. 그는 마치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든 것처럼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숨을 확인하자 느리고 평온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깨워서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그의 신체가 파란 머리의 기이한 기억을 다 받아들이고 해석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성희가 밥상을 차렸고 나는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한 병 꺼냈다.
"술 마시게?"
성희가 물었다.
"한 병만"
그녀는 말없이 일어나 잔 두 개를 가져왔다.
우리는 서로 한 잔씩을 따라주고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인간이 머물렀던 흔적 너머로 기이한 숲이 있었다. 그리고 바람도 마치 우리의 세상처럼 불어와 근처의 나뭇가지들을 흔들었다.
바람 때문인지 안개는 많이 걷혔다. 그 덕에 시야가 조금 넓어지긴 했지만, 울창한 나무 때문에 아주 멀리까지 보이진 않았다.
"우리와 많이 다른 거 같으면서도 또 익숙하네"
어색한 침묵 속에 내가 입을 열었으나 성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막걸리를 단숨에 비웠다. 나도 향긋한 막걸리의 냄새를 맡으며 잔을 비웠다.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이 기이한 세상에서 평소와 같이 익숙한 술과 음식이라니, 새삼 버스가 더 신비롭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난 테이블 옆의 액정을 바라봤다.
코르카 [7821] [0.14/H]
최종 진화 후에 코르카 수치가 기억나질 않았지만 저거보단 많았던 거 같다. 게다가 시간당 소모량도 증가했다.
'분명히 상어처럼 생긴 괴물을 잡았었는데? 놈들은 코르카가 많이 안 나온 건가?'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수치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싸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 여기서 추가로 코르카를 수급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지금 7천 개가 넘는 코르카가 있지만 추가로 획득할 수 없다면 우리 버스는 시한부다.
생각에 잠시 빠져있는데 갑자기 내 상념을 깨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숲속이다.
"성희 너도 봤어?"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탐지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 0 < 8 < 12 ]
괴물이다. 많지는 않지만 어떤 놈들인지는 아직 확인이 안 된다. 우리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희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운전대로 가서 앉았다.
난 등의 검집을 확인하고 활과 화살통도 챙겼다. 그리고 숲속을 계속 노려봤다.
접촉 파괴보다 가급적 활이나 검으로 잡아야 할 것 같다. 어떤 놈이 나타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능하면 코르카 소모가 적은 쪽으로 움직여야 한다.
뀌이이이
익숙한 괴성이 들려왔다. 소리의 파동이 우리가 살던 지구와 그리 다르지 않아 귀에 들리는 느낌도, 그리고 그 소름 돋는 찝찝함도 비슷했다.
그러고 보니 버스 내부의 먹먹함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돌이켜보면 아까 그 이상한 답답한 느낌은 버스의 잠수함 모드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난이잖아."
성희가 나지막이 말했다. 못난이 십여 마리가 전방 숲에서 뭔가를 쫓으며 네 발로 빠르게 뛰어가고 있었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있는 숲속이라 제대로 시야에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예전에 못난이를 너무 많이 봤다. 그림자만 봐도 놈인 걸 알 수 있다.
"사냥 중인 건가?"
마치 그런 모습 같았다. 몰이사냥을 하는 느낌이랄까?
"뭘 사냥하는 거지?"
여기도 다양한 동물들이 살고 있다고 들었다. 우리 쪽 세상에서 접한 괴생명체는 극히 일부분일 거다.
"으아아아"
그런데 사냥감은 우리도 알고 있는 동물이었다. 바로 인간
"젠장"
그런데 비명만 연이어 들려올 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0 < 3 < 17 ]
"못난이들도 멀어지고 있어"
버스로 따라가고 싶었으나 저 거대한 나무까지 버스가 다 밀어버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난 바로 버스 뒤쪽으로 가서 지붕 문을 열었다.
"흐억"
순간 밖에서 이상한 느낌의 공기가 버스 안으로 훅하고 밀려 들어왔다. 난 깜짝 놀라 지붕 문을 다시 닫으려다 침대에 누워있던 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괜...찮...아...."
태형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입 모양만으로 뭐라고 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난 닫으려던 문의 손잡이를 잡고 잠시 그 공기를 들이마셨다.
이상한 느낌에 약간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그 느낌의 원인이 뭔지는 모르겠다. 그저 어색함?
그리고 연이어 내 후각 세포들이 미쳐서 날뛰기 시작했다.
콧물과 함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이미 버스 안까지 그 알 수 없는 성분의 공기가 흘러들어와 운전석에 앉아있던 성희까지 잔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적응하는 거야"
태형이 희미하게 말했다.
지구이면서 지구가 아닌 곳, 다른 생태계로 진화됐으면서도 또 그렇게 아주 다르지 않은 기이한 곳
여기서 인간이 숨을 쉬며 생존할 수 있다는 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자연의 깊은 메커니즘이 있기 때문일 거다. 굳이 알려고 들어봤자 이해할 수 없을 거고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건 둘째치고 이 처음 맡아보는 진한 냄새에 정신이 혼미했다. 재채기와 눈물, 콧물은 조금 진정이 되었지만, 아직 이 냄새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눈물을 닦으며 지붕에 올라 비명이 들려온 숲속을 살폈다. 사람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못난이 무리 몇 마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난 바로 화살을 걸고 놈들의 대가리를 조준한 다음 다섯 발의 화살을 연달아 쐈다.
쉬이이이익!
내가 살던 곳에서 들리던 것과 조금 다른 바람 소리가 났다. 하지만 소리만 다를 뿐 화살이 놈들을 향해 날아가는 움직임은 거의 똑같았다.
뀌이익!
정확히 다섯 번의 괴성이 순차적으로 들려왔다.
파직! 파직!
그중에서 두 마리가 터져나가는 소리도 들렸다.
"좋았어!"
일단 사냥하던 놈들 무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도망가던 사람은 조금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졌을 거다.
뀌이이이
다섯 발을 명중시켰지만 두 마리만 터져나갔다. 세 마리는 상처만 입었을 거다. 못난이에게 동료애가 있던가? 우리가 겪었던 못난이에게서 그런 것 따위는 보지 못했다.
나무 때문에 놈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난 버스에서 뛰어내려 숲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지만 참아야 했다.
"끼아아아아!"
그때 못난이가 터져나가던 곳 근처에서 여성의 비명이 다시 들려왔다.
난 블루건에 앉아 소리가 들려온 방향 근처의 나무를 조준하고 발사 버튼을 눌렀다.
퉁 퉁 퉁 퉁
총 네 발의 블루건이 커다란 나무의 아랫부분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콰직! 콰직!
두꺼운 나무의 밑동이 검게 타버리며 부서졌다. 그리고 커다란 나무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산들바람이 다시 불어왔다. 그리고 그 작은 바람은 수천 개의 나뭇잎을 흔들었다.
바람에 스치는 작은 나뭇잎의 소리는 익숙했다.
끼이이이익!
순간 찢어지는 듯한 엄청난 소리가 나며 거대한 나무는 옆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쿵!
작은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은 묵직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작은 나무 십여 그루가 덩달아 같이 쓰러졌다.
쓰러진 나무 너머로 못난이 십여 마리에 둘러싸인 두 명의 사람이 보였다. 손에는 나무로 만든 창을 들고 있었지만, 괴물을 상대하기에는 한 없이 초라해 보였다.
"생존자야"
내가 팔 액정의 통신 버튼으로 성희에게 말하자 그녀는 버스가 다가갈 수 있는 위치까지 천천히 이동했다.
그때 못난이 한 마리가 버스 지붕에 있는 날 발견했다.
뀌이이이이
난 바로 못난이 무리를 향해 블루건을 연달아 날렸다. 화살이 코르카 효율이 훨씬 높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박했다.
퉁 퉁 퉁 퉁 퉁
난 놈들이 전부 터져나갈 때까지 블루건을 발사했다.
고요했던 숲은 그렇게 단숨에 난장판이 되었고 괴물은 전부 초록의 피떡이 되며 녹아내렸다. 생존자들은 이미 숲속 어딘가로 숨어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액정의 탐지 숫자는 다시 0이 되었고 시야에서도 괴물의 모습은 더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분명 터지는 건 똑같았는데?"
내 중얼거림이 무전으로 들렸는지 성희의 음성이 팔에서 들려왔다.
"코르카 안 나오나 봐"
내가 우려하던 상황은 현실이었다. 이제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코르카를 습득할 수 없다.
그게 이쪽 세상에서 코르카를 절대 구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아닐 테지만, 아니어야 하지만···. 왜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걸까?
어쨌든
우리 버스에 시간제한이 생겼고 난 바뀐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
"저기···. 요?"
그때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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