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J1. 각궁
멀리 물에 잠긴 도계리의 수면 위로 두 개의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아까 봤던 기숙사 건물이다.
옥상에 사람들이 보였다. 그런데 그보다 내 눈을 사로잡은 건 건물 외벽에 달라붙어 있는 검은 생명체였다.
못난이다.
건물 옥상의 사람들은 기다란 막대기 같은 허접한 무기를 들고 난간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원은 많지 않았다. 대략 서너 명 정도
옥상으로 기어 올라가고 있는 못난이는 대략 십여 마리, 그런데 놈들의 상태도 정상은 아닌 듯했다.
홍수 물살에 떠밀려 내려가다가 간신히 건물을 붙잡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이었다.
물에 떠내려가는 못난이와 멧돼지 괴물도 많았다. 특히 멧돼지 괴물은 물 위로 간신히 머리만 내놓고서 속절없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촤아아!
그때 물속에서 거대한 형체가 떠오르더니 수면에 있던 괴물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꿰에에에에!
"아까 봤던 괴물 같아"
터널에 진입하기 전 갈림길에서 고민할 때 멀리 수면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그놈이다.
뀌이이이
멀리서 못난이의 괴성이 들려왔다. 높은 건물 외벽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놈들은 거대 수룡 같은 괴물을 피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못난이들은 지금 옥상에 사람이 있는 걸 모르는 눈치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수면으로 이따금 드러나는 거대 괴물의 지느러미만 바라보며 외벽을 오르고 있었다.
한 마리의 못난이가 거의 옥상에 다다랐을 때 생존자의 허접한 창이 놈의 앞발에 닿았다.
끄트머리에 날카로운 게 반짝이는 걸 봐서는 식칼이나 과도 같은 걸 묶어 놓은 모양이었다.
괴물의 피부를 뚫을 수는 없었겠지만 갑작스러운 공격에 깜짝 놀란 놈이 중심을 잃었는지 버둥거리다 건물 아래로 떨어졌다.
게다가 놈은 떨어지며 바로 아래에서 외벽을 기어오르던 다른 못난이 두 마리와 그대로 부딪혔다.
뀌이이이
그 바람에 덩달아 떨어져 모두 물에 빠졌고 놈들은 간신히 다시 건물 외벽을 잡으려 흉측한 앞발을 뻗었다.
파직!
그중 한 놈의 날카로운 발톱이 다시 건물 외벽에 박혔으나 남은 건 놈의 앞다리뿐이었다.
몸의 나머지 부분은 이미 수룡 괴물의 입 안에서 녹즙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람들 버티겠는데?"
성희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아직 더 있어"
건물 외벽에 붙어 있던 또 다른 못난이 괴물이 마침내 옥상의 생존자들을 인지했다.
"건물 뒤편에도 있는진 모르겠지만 눈에 보이는 놈들만 해도 최소한 일곱 마리야"
내가 중얼거리자 시력이 좋은 나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람은 세···. 아니 네 명이다. 한 명은 뒤편에 혼자 있고 세 명이 무기를 들고 있는 것 같아"
싸우지 못하는 한 명까지 있다. 고작 세 명으로 일곱 마리의 못난이를 상대할 수는 없다. 좀 전에는 운이 좋아 세 마리를 떨어트렸지만, 지금은 다를 거다. 일반인이 상대하기에는 못난이 한 마리도 벅차다.
'사정거리가 될까?'
이렇게 먼 거리에서 쏴본 적은 없지만 그건 해봐야 알 수 있는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다.
난 버스 아래로 내려가 창고에서 리필이 되어있는 화살통을 꺼냈다. 활은 이미 등에 메고 있다.
내가 화살을 하나 걸며 지붕에 오르자 진땀을 흘리며 구석에 기대고 있던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각궁은 300미터도 날아가···. 콜록"
김씨 할아버지는 내 걱정이 뭔지 이미 알고 있는 표정이다.
난 활의 종류를 모른다. 그저 이 정도 거리로 내가 맞추기 힘들다는 것 정도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내 활은 그냥 활이 아니다. 게다가 각궁이라는 건 300미터도 날아간다고?
난 화살을 걸고 시위를 강하게 당긴 후 옥상 제일 가까이 접근한 놈을 조준했다. 활은 내 의중을 이미 알아차렸을 거다. 그리고 그건 그대로 화살에 전달되겠지
그러자 갑자기 활에서 이상한 중력 같은 게 느껴졌다. 내 의지와 달리 갑자기 위쪽으로 활이 들렸다.
'거리에 맞춰서 알아서 각도를?'
나의 조준점은 건물을 한참 벗어난 공중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느낌이 왔다.
마치 활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고
난 시위를 잡은 손을 놓았다.
팅!
손가락에서 작은 통증이 느껴졌다.
휙!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며 건물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버스 지붕 사람들의 시선이 화살의 궤적을 따라 움직였다.
그때 옥상을 오르던 괴물이 앞발로 난간을 움켜잡았다. 생존자는 허접한 창으로 괴물의 앞발을 마구 찍어댔지만, 못난이는 창을 빼앗아 부러트려 버렸다.
허접한 창은 그렇게 허망하게 수면 위로 떨어졌다.
못난이 괴물은 옥상의 사람에게 날카로운 발톱을 휘두르며 난간 위로 올라갔다.
"으악!"
사람들의 안타까운 비명이 여기까지 들려왔다. 옥상 난간 다른 쪽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놈에게 뛰어가며 창을 휘둘러봤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못난이가 흉측한 칼날 발톱을 잔뜩 세운 앞발을 들어 올렸다. 놈의 발톱이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그 앞에서 공포에 질린 채 얼어붙은 사람들은 더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뀌익!
그때 그런 괴성이 들린 것 같았다. 삶을 포기한 듯 눈을 감은 채 체념하고 있던 생존자의 얼굴에 무언가가 튀었다. 아마도 녹색의 액체일 거다.
파직!
멀어서 들을 수 없었지만 마치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적중한 화살이 폭발하며 놈의 대가리였던 무언가가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악!"
사람들은 녹색의 액체를 뒤집어쓴 채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영문을 모르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중 한 사내가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우리 버스에 멈췄다.
'투명을 껐었나?'
투명과 상관없이 지붕에 있는 사람들은 보인다. 그리고 마치 버스 지붕의 우리를 발견한 것처럼 잠시 이쪽을 관찰하더니 누군가의 비명에 다시 부산해졌다.
먼지로 변한 괴물 너머로 다른 못난이 두 마리가 동시에 옥상으로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마리야!"
나라의 말소리를 흘리며 난 다시 화살을 걸고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발사했다.
휙!
거리가 있어 화살이 날아가는 데 시간이 걸렸다. 마음이 급하니 시간은 더욱 더디게 흐르는 것 같이 느껴졌다.
사람은 넷, 그중 허접한 창을 들고 있는 사람은 이제 하나, 괴물은 둘이다.
그리고 화살은 아직도 날아가고 있다. 그사이 나는 다시 화살을 한 발 더 쐈다.
못난이 괴물 두 마리는 독 안에 든 쥐를 대하듯 천천히 여유롭게 생존자들에게 다가갔다.
그때 한 마리의 머리에 화살이 박혔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놈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파직!
멀리서도 놈의 대가리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서는 아주 소름끼치는 소리였을 거다.
남은 못난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놈이 우리를 발견하기 전에 놈에게 당도한 화살이 놈의 눈에 박혔다.
뀌이이익!
괴성과 함께 놈의 대가리도 터져나갔다.
"오!"
버스 지붕 사람들의 감탄사와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이번엔 네 마리야!"
나라의 외침에 나는 다시 화살을 걸고 건물의 옥상을 살폈다.
"안 보여!"
생존자와 괴물이 전부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우리가 있던 언덕 주차장은 건물 옥상보다 고도가 조금 낮아 옥상 전체를 볼 수가 없었다.
"콜록~ 힘들 거야"
내 시야에 있었더라도 네 마리를 동시에 잡을 수는 없었을 거다.
하지만 난 시위를 당긴 손에서 힘을 뺄 수 없었다.
뀌이이이
괴성이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아아아악!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도 들려왔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상황이 눈앞에 있는 듯 그려졌다.
"젠장!"
괴물이 보이지 않으니 조준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미 늦은 것 같다.
나는 활을 천천히 내려놨다. 하지만 사람들은 멀리 옥상을 향한 시선을 아직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뀌이이이
건물 옆쪽 난간으로 못난이 한 마리가 추가로 옥상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잠깐 보였다가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옥상에는 다섯 마리의 못난이가 있을 거다. 아니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놈들이 더 있을 수도 있었다.
잠시 그렇게 무거운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깡!
멀리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렸다. 건물 옥상 너머다.
"뭐지?"
안타까운 표정으로 건물을 바라보던 구조사 진주씨가 갑작스러운 소리에 입을 열었다.
"금속 부딪히는 소리 같아요."
깡! 깡!
그 소리는 점점 더 크게 그리고 자주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숨어 들어간 거 같아, 괴물이 금속을 때리는 거 같은데?"
성희가 말했다. 하지만 아직 우리 눈에 보이는 건 없었다.
난 근처 도로를 둘러봤다. 우리가 내려온 국도변 사잇길 말고 그 옆에 다른 오르막길이 보였다. 터널 위쪽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난 버스 안으로 내려가 화살통을 창고에 넣은 후 운전석에 앉아 바로 악셀을 밟았다.
'조금만 더 높으면 돼'
생존자들이 순순히 당하진 않은 것 같다. 어디 창고나 비슷한 철제 구조물 안으로 피신한 모양이다. 그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발버둥 치는 그들을 위해 나도 뭔가 하고 싶었다.
"꽉 잡아요!"
좁은 오르막을 오르며 지붕 위로 소리쳤다.
"걱정마!"
나라와 성희가 동시에 대답했다.
버스는 구불구불하고 좁은 길을 급하게 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시골집 여러 채가 나타났다. 난 바로 버스를 세웠다.
길이 좁아 더 올라갈 수 없었다. 난 창고를 열고 화살통을 꺼내 버스 지붕으로 뛰어 올라갔다.
'보인다!'
거리는 더 멀어졌지만, 옥상의 전체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섯 마리야!"
검은 점으로 보일 만큼 작았지만 적어도 조준은 할 수 있었다. 놈들은 어떤 문 앞에 모여 있었다.
난 바로 조준하고 화살을 쐈다.
휙!
그리고 연이어 다섯 발의 화살을 더 발사했다.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 여섯 번째 화살을 쏠 때는 어깨에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처음 쏜 화살이 검은 점에 맞았다.
뀌이이이
멀리서 아득하게 괴물의 괴성이 들려왔다.
당황한 괴물들은 우왕좌왕하더니 연이어 화살에 맞았다. 그리고 차례대로 터져나갔다.
"오오!"
준호씨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괴물이 터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진 않았지만, 초록의 피떡이 퍼지는 모습은 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옥상에는 회색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옥상에서 생명체의 움직임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코르카가 날아오기엔 너무 멀다."
아쉬워하는 내 중얼거림과 상관없이 성희가 말했다.
"왜 건물 안으로 피신하지 않았을까?"
성희의 궁금증에 난 가능성 높은 추측으로 답했다.
"안에도 괴물이 있었겠지"
난 멀리 건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괴물 같은 사람들이 문을 잠갔거나"
그때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버스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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