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J1.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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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건 그들보다 오히려 나였다.
'김씨 할아버지가 여기 경비였다고?'
난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는 올라오는 기침을 참고 있었다. 기침이 아니라 웃음을 참고 있는 건가?
어이없는 전개다.
이분의 진짜 정체는 뭘까?
언덕 동네에서부터 지금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아직도 그를 모르겠다.
같이 위기를 이겨내며 이제는 어느 정도 신뢰가 쌓였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누군가에 대해 우리가 너무 많이 알 필요는 사실 없지 않나? 특히나 이런 세상에서 시시콜콜, 어쨌든
난 갑작스러운 전개에 거미 따위는 벌써 잊어버린 듯 그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아···. 예전에 일하셨던 분"
새마을 아저씨가 할아버지를 아는 척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말끔한 중년인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아파트 보안 직원들은 다 젊어요."
그는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할아버지에게는 관심이 없는 듯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보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난 흥미로운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이 식료품들 어디서 구하셨나요?"
이 질문이 언제 나오나 했다.
"왜요? 거기 터시려고?"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허허, 아니요. 고기와 시원한 맥주가 있는 게 이해가 안 돼서요. 냉장고가 아직 돌아가는 곳이 있나 해서 물어봤습니다."
난 그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총은 어디서 구한 거죠?"
그의 얼굴에 남아있던 어색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냥용 엽총이나 공기총은 아닌 것 같고···."
사실 나는 총기 관련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파트 저 높이에서 날 제대로 겨누고 쐈다.
총을 쏜 사람이야 대한민국이니 그럴 수 있다 쳐도 어떻게 가정에서 군용 소총을?
말끔한 중년인은 뭐라 말을 할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듯 가느다란 눈 속에서 수상한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저기요. 아저씨"
난 테이블 자리에 다시 앉아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말을 이었다.
"생존자가 보여서 도와드리려고 했거든요. 거미 행방이야 뭐 대단한 정보도 아니고"
버스 아래의 사람들은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모두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쿨럭, 근데 왜 총을 쏘고 지랄이여"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내가 하려던 말을 대신하며 걸어오더니 내 맞은편 테이블 자리에 앉았다.
"K2 같은데 이걸 민간인이 어떻게 구했어? 쿨럭"
잠시 정적이 감돌다 말끔한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어디 깊은 산골짜기에 있다 오셨나?"
그의 눈빛에서 처음으로 가식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식이 사라지자 그의 진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난 그의 눈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말고도 여기 생존자 온 적 있죠?"
우리 버스를 가로막고 있는 잡동사니 속에는 쓸모없어 보이는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한때 소중했을 법한 물건들이 뒤섞여 있었다.
"살려달라고 할 때마다 총 쏘셨죠?"
나는 대놓고 내가 짐작하는 걸 이야기했다. 그들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부정하지 않는 거다. 중년인 뒤에 있던 청년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또 의심하네! 짜증 나게! 아빠 그만 돌아가요!"
젊은 여성은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입이 거칠었다.
가족이 정말 맞았나?
그런데 옆 단지의 천반장은 여기 말끔 가족과는 어떤 관계일까? 조력자라고 하기에는 사이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혹시 갑질?'
사이가 좋진 않지만 서로 협력할 수밖에 없는 관계라면···. 갑을 관계?
그리고 그들은 지금 싸우는 척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를 동시에 덮치려고 신경을 분산시키는 거일 수 있었다.
"쿨럭, 천반장 여기 얼마나 사셨지?"
할아버지가 묻자 그 옆의 아주머니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경비나 하던 영감탱이가 반장님한테 뭔 소리야!"
난 듣기만 해도 분노를 부르는 그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그냥 가려고 했는데요"
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지랖인 건 아는데"
난 아파트 안쪽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단지를 좀 살펴봐야겠네요."
그때 양쪽에서 욕지거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발 무슨 소리야! 먹을 거로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꺼지라고!"
혹시 중년 아주머니와 혈육이 아닐까 의심되는 젊은 여성의 따가운 목소리다.
"시발 좀 진정하라고"
남동생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 그녀를 말렸다. 그때 말끔한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돌아가네요. 진정들 하시고 오해는 푸시죠"
그런데 차분하게 말하던 그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난 잠시 그들을 한명 한명 자세히 살폈다. 왼쪽의 새마을 중년 부부도 뭔가 조금 이상했다.
모두 연기를 하는 것 같았다.
새마을도 부부는 아닌 거 같다. 그리고 말끔 가족도 가족이 아니다.
뭔가 이상하다.
그런데 이 상황의 뒤에 뭐가 있는지는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뭘까?'
젊은 여성의 눈이 버스 옆으로 아주 잠깐 이동했다가 돌아오는 걸 목격했다.
그때였다.
"윽!"
"으악!"
"그만!"
"끄윽!"
버스 옆 단지 담벼락의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뭐야?"
내가 고개를 돌리니 어둠 속에서 도끼와 쇠막대가 튀어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이내 사람들이 두 손을 들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모두 얼굴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나라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대략 스무 명은 되어 보였다.
"이런 시발!"
말끔 중년인이 품에 숨기고 있던 사시미 칼을 꺼내더니 나라에게 달려들었다. 그 뒤에 있던 청년과 여성도 품속에 있는 손도끼를 들고 뒤따랐다.
"악!"
하지만 그들은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굳이 나와 할아버지가 버스에서 내릴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나라가 중년인의 칼을 피하던 틈에 손을 들고 있던 스무 명의 남녀가 다시 바닥에 떨어져 있던 무기들을 주우려 흩어졌다.
"일단 버스 옆으로!"
아직은 아파트 담장 근처에 있어 건물 위에서는 사각이라 안심이지만 언제 또 총탄이 날아올지 알 수 없었다.
몰래 접근하던 무리 중에서는 다행히 총을 가진 자는 없었다.
버스의 광역 방어막은 5미터다. 아직 지름인지 반지름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적어도 2미터 내에만 있으면 안전하다.
버스에 붙은 나라를 향해 도끼와 칼과 쇠막대가 날아들었다.
깡! 챙! 툭!
하지만 방어막을 뚫을 수는 없었다.
"시발 이게 뭐야!"
"벽이 있는 거 같아!"
"눈에 안 보이는데?"
그들은 마치 유리창에 붙은 파리들 같았다.
난 버스 주변에 있는 거의 서른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결국 강도단이라는 걸 밝혀주셨어요. 여러분"
버스를 마구 공격하던 그들은 그 움직임이 의미 없는 걸 알게 되자 모두 행동을 멈추고 날 올려다봤다.
탕! 탕! 탕!
어디선가 다시 총탄이 날아왔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대로 여러분들을 살려두면 괴물이 아니라 인간을 또 잡겠죠?"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천천히 블루건으로 걸어가 앉았다.
"괴물보다 못한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아시는 분?"
그러자 군중 속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살려고 그랬다고!"
"내가 살아남아야 가족을 지키지!"
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 저도 그러려고요."
"뭔 개소리야!"
"시발 닥치시고"
나는 잠시 올라오는 화를 누른 후 말을 이었다.
"또 여기서 죽을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가족을 살리려고 이러는 거예요."
내가 블루건의 발사 버튼에 손을 가져다 대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어"
"쏘지 말라고!"
나는 그들을 보며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블루건 따위가 아니라 검을 쥐고 내려가서 다 썰어버리고 있는 내 모습을
지난 세월 동안 만났던 괴물 같은 인간들의 면상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저 난 조용히 지내는 순둥이라 생각했다. 병신같이 다 받아들이며 살았던 내 지난 삶은 안정이 아니라 축적이었다.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사람들의 면상들이 나의 기억과 교차되었다.
난 블루건의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검을 꽉 틀어쥐고 지붕 난간으로 걸어갔다.
내가 혼자 다가가자 도망가던 사람들이 만만하게 보였는지 도끼와 칼을 부여잡고 다시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바리케이드 잡동사니를 기어오르며 여전히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다. 현명한 사람이다.
난간에 한쪽 발을 올렸다. 그리고 탐욕에 절어 죽음을 예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바라봤다.
그들은 내가 보여준 황금 같은 식료품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블루건이 무섭더라도 검 하나만 달랑 들고 혼자 서있는 나는 만만해 보일 거다.
그러니 이렇게 또 슬금슬금 떨어진 먹잇감에 몰려드는 비둘기처럼 모여드는 것일 테지
난 그들의 미래를 상상하며 묘한 쾌감을 느꼈다.
나를···. 아니 우리를 세 번이나 죽이려 한 생명체다.
살고자 그랬다고?
나도 똑같다.
나는 몸의 중심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난간 너머로 뛰어내리기 직전에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
나는 순간 몸의 중심을 다시 잡고 뒤로 물러섰다.
성희였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보였다.
그 눈망울 속에 괴물이 있었다.
아니 그건 나였다.
나는 괴물이 되려 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그러고 싶어서 여기까지 달려온 건 아닐까?
정체불명의 괴물로 엉망이 된 세상에서 나는 또한 멸망 이전부터 갈망하던 괴물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성희가 간절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힘이라면 나를 아예 꽉 붙잡고 뒤로 던져버릴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런데 그녀의 손에서는 악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내 팔을 그때 그 어린 시절의 성희가 되어 잡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때처럼 그렇게
그녀를 놀리고 괴롭히던 옆 동네 욕쟁이 새끼를 내가 죽일 듯 패버리고 있던 그때처럼
그때 느꼈던 손의 감촉이었고
그때 지었던 나의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나는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 버스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나를 겨누고 있던 도끼와 사시미 칼과 쇠막대 사이를 검을 들고 누볐다.
총알 몇 발이 내 머리를 향해 날아왔으나 의미 없었다.
내 목숨을 위험하게 하는 모든 주변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들은 단 하나도 내 몸에 닿지 못했다.
핏물이 튀었다.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아니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눈에 핏물이 들어가지 않게 피하며 검을 휘둘렀다.
사람들의 수만큼 내 목숨이 위험했다.
그 덕분에 시간은 마치 멈춘 듯 그렇게 느리게 흘렀고 나는 몇십 년 묵은 감정을 모두 쏟아내었다.
마침내 더 밸 것이 없어지자
문득 잊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때 그 성격 파탄 욕쟁이 새끼는
깨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도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교통사고로 기억이 온전하지 못했던 게 아니었다.
부모님이 그때 돌아가신 게 아니었다.
'시발 기억 났어,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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