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J1. 전조
인기척에 눈을 떴다.
지붕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잘 때는 항상 투명을 켜놓기 때문에 놀라진 않았다. 낯선 이의 방문은 아닐 거다.
게다가 나에게 이미 익숙한 무게감의 발소리다.
난 벙커 침대에서 내려왔다. 버스 안에 커피 향이 가득했다. 일전에 구해놓은 드리퍼로 누가 커피를 내려놨다.
침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머그잔에 커피를 따른 후 지붕 계단을 올랐다.
"일어났어?"
지붕 테이블에 성희와 나라가 마주 보고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산책하러 나가셨어, 새벽잠이 없으시더라고"
성희가 대답했다. 난 테이블 자리에 가서 커피잔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공기가 상쾌하네!"
두 여자는 평온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이내 그들이 나누던 대화로 돌아갔다.
무슨 이야길 저렇게 정겹게 하고 있을까?
나는 지붕 난간을 돌며 주변을 살폈다. 피바람이 불었던 어젯밤의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그런 일 따위는 없었다는 듯 아침은 평화로웠다.
"쿨럭, 일어났어?"
아파트 뒤편에서 할아버지가 걸어오고 있었다.
"어디 다녀오세요?"
"뒷산에, 그쪽은 어떤가 해서"
할아버지는 사다리로 천천히 지붕에 올라왔다. 그런데 그 모습이 이전보다 힘들어 보였다. 난 일어서서 그를 잡아주려 했으나 그는 손을 저었다.
"모닝커피 한잔하실래요?"
"됐어 쿨럭"
할아버지는 숨이 찬 듯 잔기침을 하며 테이블 자리에 앉았다.
"아침부터 무리하신 거 아니에요?"
나라가 묻자 할아버지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괴물이 산 쪽에서 올 수도 있어서 가 봤어, 거미 놈이 저쪽으로 온 거 같기도 했고"
"어때요?"
"쿨럭, 괴물 흔적은 못 봤어."
난 그가 다녀왔다는 야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때 산 위로 뭔가 날아가는 게 얼핏 보였다.
"새 들이 있더라고"
"네?"
여기 오면서 요양병원 근처를 맴도는 까마귀 무리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 후로 다른 동물은 보지 못했다.
"어떤 새가?"
"까치랑 참새"
동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괴물의 영향력이 약해져서 어딘가에 숨어있던 동물들이 다시 나오는 걸까?
"그리고 고라니 발자국도 봤어."
우리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멀리 산 쪽을 바라봤다. 그때 아파트 공동현관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생존자 엄마들과 아이들이었다. 어젯밤과 달리 깔끔한 모습이다.
내가 일어서자 그들은 허리 숙여 인사했다.
"아침 드셨어요?"
성희가 난간에 다가가며 묻자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생수로 씻기는 아깝고 어떻게?"
내 질문이 뭔지 아는 듯 나라가 바로 대답했다.
"지난 홍수 때 여기 옥상 물탱크를 열어놓은 모양이라더라고, 게다가 화장실 물도 내려가"
'수세식 화장실까지? 정화조가 괜찮으려나?'
전기는 들어오지 않지만, 빗물만으로도 조금은 문명인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게 놀라웠다. 정화조가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뭐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딱히 방법도 없어서 언급하진 않았다.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려요."
엄마들은 고개를 푹 숙이며 고마움을 표현하려 애썼다. 그때 그들의 손에 잔뜩 들려 있는 생필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버스에 없는 것들이다.
"약소하지만 이거라도"
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성희가 다가와서 말했다.
"어제 필요한 거 없냐고 물으시길래"
그녀도 버스에 대해 많은 이야길 한 건 아닌 듯했다. 단지 버스에서 무한 리필로 얻을 수 없는 물품 위주로 몇 가지만 얘기해준 모양이다. 주로 위생용품들이다. 아쉽게도 약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버스 아래로 내려가 그들이 가져온 물품을 버스에 실었다.
"커피나 한잔하시죠, 드릴 말씀도 있고"
나라가 말하자 엄마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여기 4층 치워놨어요."
난 버스 지붕으로 다시 초대할까 했는데 아무래도 비좁을 듯싶었다. 그리고 그들이 갇혀 있던 1층도 좀 그랬고 18층까지는 너무 높았다.
"커피 챙겨야지?"
내가 나라에게 말하자 한 엄마가 나섰다.
"저희도 커피는 많이 있어요. 그냥 오세요."
그런데 버스를 비워두고 가는게 내키지 않았다. 아무리 잠금장치가 있더라도
"다들 말씀 나누고 와"
이번에는 내가 버스에 남았다. 그들은 모두 공동현관으로 걸어갔고 나는 버스 운전석에 앉았다.
멀리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과 겹쳐서 떠오르는 아이들이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한때 나의 식구였던 아이들
난 액정에 아직 남아있는 녀석들의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날 밤 아이들과 누나는 파란 머리와 왜 갑자기 그렇게 집을 떠난 걸까? 우리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급하게 떠난 것에는 말 못 할 어떤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거다.
'마시울이라···. 이름도 특이한 놈'
다시금 파란 머리를 떠올렸다. 아주 잠깐 대화를 나눠봤지만 그다지 호감이 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분위기가 정말 묘했다.
신비롭다기보다는 인간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어떤 같은 종의 동질감 같은 게 전혀 없었다. 껍데기만 인간 같다고 해야 하나?
'어?'
그때 아파트 담벼락 뒤로 뭔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뭐지?'
액정 탐지 숫자는 특별할 게 없었다. 근처 하천에서 들락날락하는 원거리 십여 마리의 숫자만 조금씩 변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건 어제도 그랬다.
난 광역 방어막을 켜고 활을 챙겨 지붕에 올랐다.
"나와라."
저 정도 거리에 괴물이 있다면 중거리 숫자는 올라야 한다. 괴물이 아니라면 사람이다.
부스럭
비닐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숨어있던 그 형체는 그 작은 소리에 놀란 듯 갑자기 담벼락 옆으로 튀어나왔다.
"고라니?"
새끼 고라니다. 놈은 근처를 불안하게 뛰어다니더니 갑자기 자기가 왜 그러는지를 잊은 듯 움직임을 멈추고 화단에 자란 풀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녀석은 내가 지붕에 있는 걸 아직 모르는 듯했다. 난 숨죽이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녀석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아침의 찬 바람에 식어버렸지만 그래도 고소한 맛은 남아있었다.
"우유가 간절하네"
아침엔 드립커피보다 카푸치노가 제격인데, 물론 드리퍼뿐이라 에스프레소 샷을 못 내리긴 하지만 아쉬운 대로 우유라도 대충 넣어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뀌이이이
"아 씨 또 뭐냐 아침부터"
나도 모르게 소릴 지르며 일어서자 내 목소리에 더 놀란 듯 고라니가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야산 방향이다.
고개를 들어 괴성을 지른 놈을 찾아보니 날괴물 세 마리다.
'벌써 괴물들이?'
어젯밤 마지막 제물은 마녀···. 아니 마귀할멈이었다. 날괴물은 변화를 벌써 눈치챈 건가? 수룡이나 거머리 괴물 같은 놈들이 이동을 시작했나?
난 활을 들고 제일 가까운 놈에게 날렸다. 화살은 그게 광역이건 아니건 버스 방어막이 있어도 문제없이 날아간다.
첫날 시골집 마당에서 내 화살에 머리가 뚫렸던 놈도 날괴물이다.
난 두 발을 연달아 쐈다. 그리고 이내 공중에서 초록의 피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뀌이익!
그런데 순간 남은 한 놈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고라니가 도망간 야산 방향이다.
시야에 보이지 않아도 위치만 그대로면 생각만으로도 조준은 가능하지만, 놈은 계속 날아가고 있다.
난 버스 아래로 내려가 야산 방향으로 뛰었다.
뀌이이이
날괴물이 고라니 바로 머리 위에 있었다. 난 이미 걸어놓은 화살을 바로 쐈다.
"젠장!"
그런데 화살은 갑자기 움직인 나뭇가지에 걸려서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뀌익!
그때 시커먼 형체가 옆에서 날괴물을 들이받는 게 보였다. 그 덕에 고라니는 숲속으로 무사히 도망쳐 사라졌고 날괴물은 창고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시커먼 형체가 뭔지는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난 다시 버스로 뛰어와 운전석에 앉아 악셀을 밟았다.
아파트 담벼락을 지나 날괴물이 추락했던 시골 창고 뒤편으로 버스를 몰았다.
개 두 마리가 날괴물을 마구 물어뜯고 있었다. 시골에서 키우던 걸로 보이는 사냥개다. 개의 종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렇게 야생화된 들개들은 고라니도 잡아먹는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번엔 고라니를 구하다니
뀌이이익!
날괴물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연신 반항하며 버둥거렸다. 하지만 덩치 큰 개 두 마리의 끈질긴 공격에 끝내 움직임이 멈췄다.
날괴물의 붉은 눈에서 생명의 빛이 사라졌다.
'혹시···.'
연기로 변하고 코르카라도 나올까 기대했지만, 괴물의 사체는 그대로였다. 아니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굶주린 들개 두 마리가 정신없이 괴물을 뜯어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쩝'
난 운전석에 그대로 앉아 놈들을 지켜봤다. 버스의 투명은 켜져 있으니 놈들은 날 보지 못할 거다.
그때 근처 수풀에서 다른 들개가 나타났다.
그러자 먼저 먹고 있던 개들이 놈들을 보고 초록으로 물든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들개는 계속 늘어났다. 먹이 냄새를 맡고 몰려들고 있는 것 같았다.
난 버스를 돌려 다시 아파트로 향했다. 그때 다들 공동현관으로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버스를 세우고 옆문으로 내리자 성희가 다가오며 물었다.
"어디 갔다 와?"
"고라니가 있더라고"
"정말?"
다들 눈이 동그래졌다.
새벽에 산책하러 나갔던 할아버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난 좀 전에 봤던 날괴물과 고라니 이야길 다 해줬다.
"들개가 위험하지 않을까?"
성희의 걱정스러운 말에 내가 대답했다.
"오히려 단지가 안전해질 수 있을 거 같아, 슬슬 괴물들 나타날 텐데 들개가 오히려 여길 지켜주는 셈일걸?"
다들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엄마들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다.
"나라는 이야기 잘했어?"
그녀는 옆 엄마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벌써 친해진 듯 씩 웃었다.
"짐은?"
"빈손으로 탔으니 빈손으로 내려야지"
그때 한 엄마가 나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모카포트?"
커피와 그라인더가 있었지만, 드리퍼뿐이라 아쉬웠는데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았을까?
"이야기하다가 보니까 여기 물품 중에 쓸만한 게 많더라고"
나라가 중얼거렸다. 문득 커피 이야기에 도계리에서 내린 진주씨가 떠올랐다. 그녀와 은결이는 잘 이겨내고 있을까?
"밥 잘 챙겨 먹어라 쿨럭"
할아버지는 나라의 등을 툭 치고는 버스로 들어갔다. 성희는 나라를 꼭 안아주고 버스에 올랐다. 나도 성희처럼 팔을 벌리고 다가갔으나 그녀는 한 손을 내밀었다.
굳은살이 가득한 작은 손이다. 그런데 이 감촉은 이제 느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잘 지내라"
"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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