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J1. 우비 메뚜기
성희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왜?"
"누가 있는 것 같아"
내가 손으로 컵라면 쪽을 가리키자 그녀도 자세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라면이네···."
그녀는 컵라면을 잠시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키더니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냥 가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버스의 조명이 유리문 너머 편의점 안쪽까지 환하게 비추고 있었지만, 여전히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숨어서 보고 있겠지.'
원래 주인이거나 혹은 이후에 자리 잡은 생존자일 거다. 난 운전석으로 돌아가 다시 버스를 출발시켰다.
번쩍!
그때 다시 번개가 쳤다.
"어제부터 날씨가 왜 이러지?"
꽈르릉!
이내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천둥소리도 들려왔다.
난 사이드미러로 멀어지는 편의점을 잠깐 바라본 후 전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 뭐야!"
순간 앞에 누군가 있는 걸 발견하고는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내 시선은 아주 잠깐 전방에서 벗어났을 뿐이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지?'
우비를 입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폭우 속에서 저러고 서 있으니 무슨 연쇄살인마 같은 모습이다.
난 창문을 조금 열고 밖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지붕에 선수를 뺏겼다.
"너 뭐야!"
할아버지의 쉰 목소리가 거칠게 폭우 속을 뻗어나갔다. 그때 시커먼 우비가 살짝 다리를 구부리더니 순식간에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오!"
나와 성희는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점프력이 대단해 보였다.
쿵!
놈이 지붕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쾅! 퍽! 쿵!
지붕에서 뭔가 일이 터지고 있는 것 같다.
"이 새끼가!"
할아버지의 분노가 점점 올라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때 버스 우측으로 우비가 뛰어 내려왔다.
빡!
우비의 발이 땅에 닿을 때 그런 소리가 났다. 저기에 밟히면 꽤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다.
그의 뒤로 할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났다. 마치 꺽다리의 인간 버전 같은 움직임이다.
휙!
폭우를 뚫고 우비가 다시 점프했다. 할아버지의 움직임은 공중으로는 불가능한지 고개를 들고 놈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방아깨비도 아니고!"
할아버지의 화난 목소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웃기지?
문득 성희가 날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표정을 감추고 다시 밖을 살폈다.
팍! 퍽! 슉! 퉁!
행동을 알 수 없는 소리가 연이어서 들려왔다. 난 버스의 사방 조명을 다 켜고 밖을 살폈다.
쾅!
그때 우비는 테이블 쪽 창문으로 날아와 머리가 그대로 부딪쳤다. 할아버지가 집어 던진 거다. 그 순간 우비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젊은 남성이다. 버스에 강하게 부딪혔는데도 얼굴에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마주친 눈에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이 새끼 뭐지?"
그때 할아버지가 순식간에 놈의 옆에 나타났다. 버스 유리창에 얼굴을 붙이고 안을 구경하던 놈은 그 기척을 느끼자 눈알만 할아버지 방향으로 굴렸다.
그때 놈의 왼손에서 일어나는 희한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놈의 몸에 가려서 저 손이 보이지 않을 거다. 우비는 교묘히 왼손을 감추고 뭔가하고 있었다.
난 방패를 팔에 끼우고 검집을 둘러맸다.
"설마 나가려고?"
성희의 우려 섞인 물음에 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느낌이 안 좋아"
그때 푸른 빛의 섬광이 놈의 손에서 터지더니 사방이 밝은 빛으로 순식간에 휩싸였다.
"크악!"
할아버지의 비명이다. 난 버스 옆문을 열었다. 그때 다시 성희가 내 팔을 잡았다.
"굳이 네가 이러지 않아도 돼"
난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괜찮아"
어리둥절한 표정의 그녀를 뒤로하고 나는 버스 밖으로 걸어 나갔다. 비가 오고 있었지만, 우비 따위를 입을 시간도 또 입을 생각도 없었다.
아직 할아버지를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은 우리 승객이다. 그리고 그가 당하면 그다음 차례는 우리가 될 거다.
유민이네 동네에서 한 달여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놀고만 있지 않았다.
엄청난 공격력의 유민이와 반장, 그리고 성희를 보며 나는 내 능력이 항상 궁금했다.
나의 각성 능력이란 게 이따금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거 하나뿐인가?
다른 각성자들의 능력을 보며 사실 좀 부러웠었다. 내 능력이란 게 고작 느리게 흐르는 시간 하나뿐이라니
그래서 매일 혼자 언덕 아래로 내려가 일부러 멧돼지나 못난이 괴물을 찾아다녔다. 성희는 내가 매일 약수터로 산책하러 나갔던 걸로 알고 있다.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잘 아는 동네 근처라고 해도 예상치 못한 위험에 빠지면 돌이킬 수 없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감수하지 않으면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을 보낼 뿐이다.
그저 버스에 숨어서 살아남기만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실 거실 액정도 분리해서 팔에 끼우긴 했었지'
여차하면 버스 근처로 뛰면서 포탑을 작동시킬 생각이었다. 물론 한 달 동안 혼자 나설 때 단 한 번도 그런 경우는 없었다.
난 지난 한 달을 떠올리며 버스 왼쪽으로 뛰었다. 그런데 시커먼 우비 청년의 뒷모습만 보일 뿐 그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너 뭐야?"
내가 소리치자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그때 그의 너머 멀리 할아버지가 쓰러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 버스 뭔가요?"
살인마 같은 외모와 달리 차분한 청년의 목소리다. 하지만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할아버지를 보고 있으니 놈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난 할아버지 쪽으로 뛰었다. 그런데 그러려면 놈을 지나야 한다.
놈의 왼손에 다시 푸른빛이 감도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버스 안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성희의 몸짓도 느리게 보였고
놈의 왼손에 휘감기고 있는 이상한 섬광도 느리게 반짝였다.
심지어
번···. 쩍
번개도 느리게 쳤다.
'이게 말이 되나?'
난 내 모습에 흠칫 놀라며 뛰었다. 놈은 내 움직임을 따라올 수 없었다. 커다란 눈알이 아주 천천히 나의 궤적을 쫓았지만 날 시선에 잡아둘 수는 없어 보였다.
난 놈의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검 등으로 놈의 머리를 후려쳤다.
"아···. 악!"
청년의 손에서 점점 강해지던 빛은 놈의 비명과 함께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놈은 머리를 감싸 쥐려 두 손을 올리기 시작했으나 내 눈에는 그 행동이 너무 느리게만 보였다.
난 놈의 다리를 걷어찼다.
"우으···."
놈은 아주 천천히 뒤로 자빠지기 시작했다. 난 바로 할아버지 방향으로 달렸다. 그는 꽤 멀리까지 날아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살피니 상태가 처참했다. 머리카락이 전부 타버렸고 얼굴도 시커멓게 그을렸다. 하지만 다행히 미세하게 움직임이 있었다.
'빗속이라 그나마 이 정도로 끝난 건가?'
난 길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그를 둘러업고 버스를 향해 뛰었다.
버스 옆에서 아직도 지면에 닿지 않은 채 뒤로 자빠지고 있던 놈이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사방을 살폈다. 하지만 나의 움직임을 제대로 볼 수는 없을 거다.
한 달 전에 나는 아직 발현되지 못한 다른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한 달 내내 혼자서 못난이의 못생긴 얼굴을 마주 보고 멧돼지 괴물의 거대한 어금니를 만지작거리며 수련하다 보니 그런 거 따위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오히려 그 시간 동안 내가 깨달은 건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내가 조절할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갈수록 그 느림의 힘은 더욱 강력해졌다. 그걸 매일 매일 몸소 체험했다.
이제 웬만한 사람이나 괴물은 내 움직임을 잡을 수 없다. 나의 공격력은 검과 활뿐이었지만 이젠 그거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에겐 버스가 있지'
난 김씨 할아버지를 업고 바로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성희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어떻게 할아버지가 버스에 들어와?"
난 그를 침대에 눕히며 대답했다.
"좀 전에 눌러놨어, 승객 추가"
성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일전에 성희와 내가 쓰던 이층 침대의 일 층에는 짧은 머리 한나라가 누워있다. 그녀는 아까 잠시 의식이 돌아온 듯 보이더니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그 옆에 아이들이 쓰던 침대의 일 층에는 김씨 할아버지가 누워있다. 약하지만 숨은 붙어 있어서 이제 별일은 없을 거다.
"이거 무슨 구급차도 아니고"
시외버스였다가 이젠 앰뷸런스가 된 것 같다.
난 창문을 열고 다시 일어서고 있는 우비 청년에게 소리쳤다.
"버스가 궁금하면 처음부터 물어볼 것이지 난데없이 왜 공격 질이야!"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저는 공격하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뭐지? 차분하고 예의 바른 저 목소리는?'
놈은 여전히 의문에 가득한 표정으로 버스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떻게 버스가 있나요? 그리고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말투가 너무 이상한데?"
성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난 놈의 눈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궁금하면 네 정체부터 말하는 게 순서 아닐까?"
놈은 대답 없이 큰 눈알만 이리저리 굴렸다. 조명에 비친 얼굴을 보니 뽀얀 피부의 잘생긴 훈남이다. 하지만 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는지 얼굴이 수척해 보인다.
"저는···. 저는···."
녀석은 부드러운 저음으로 말을 더듬었다.
"누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난 어이없는 표정으로 놈을 노려보다 말했다.
"우리는 사실 모두 우리가 누구인지 몰라, 인생은 그런 거지 모두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끝내 죽어가, 그러다 죽기 전에라도 알게 되면 행복한 거···. 같은 개소리 말고 정체가 뭐냐고!"
내 갑작스러운 급발진에 성희가 다가와서 내 등을 쓸어줬다.
'왜 강아지 쓰다듬는 거 같지?'
그때 침대에서 심하게 몸부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의 치료가 시작된 모양이다. 처음엔 좀 고통스러울 거다. 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새 몸을 얻은 것 같으시겠지
'이거 치료비라도 받아야 하나? 버스비도 밀렸는데'
청년은 여전히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몸을 웅크렸다.
"메뚜기냐?"
놈은 웅크린 자세 그대로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다시 날 바라봤다. 이렇게 보니 정말 메뚜기 같다.
"어디 가려고?"
"괴물 나타났어요."
테이블 액정을 살피자 탐지 램프의 숫자가 변하고 있었다.
[ 0 < 212 < 432 ]
"이게 뭐야? 언제 이렇게?"
내가 놀란 목소리로 소리치자 성희가 급하게 다가와 액정을 살폈다.
"숫자가 좀 많은데? 벌레류인가?"
쏴아아아
하늘은 아까보다 더 많은 비를 퍼붓고 있었다. 걱정스러울 정도로 많은 비다.
그런데 창밖에 서 있던 우비의 메뚜기 청년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액정의 숫자에 신경을 쓰느라 그를 시야에서 놓쳤다.
"괴물 잡으러 간 건가? 아니면 도망?"
그런데 내 시야에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 괴물을 놈은 어떻게 알았을까? 어쨌든 희한한 녀석이다.
난 액정의 [투명] 버튼을 눌렀다. 포탑도 쓸 수 없고, 어떤 괴물인지도 아직 모른다. 할아버지까지 버스 안으로 들어왔으니 지금은 투명을 켜야 할 때다.
뀌이이이이이
그때 사방에서 괴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게 뭐야?"
성희의 말에 난 반대편 창문으로 급히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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