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J1. 진압작전
붉은 거미는 중앙 계단 쪽 창문으로 들어가더니 계속 아래로 내려갔다.
'혹시?'
빠르게 내려가던 놈은 1층을 마지막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놈은 공동현관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놈이 향할 곳은 지하 주차장뿐이다.
그곳엔 시체의 산이 있다. 그때 놈을 처음 목격했던 터널에서도 시체의 바다가 있었다.
난 창밖으로 외쳤다.
"지하 주차장!"
누군가 들었을 거다. 그게 동료든 혹은 낯선 타인이든 상관없었다. 난 바로 계단 쪽으로 이동했다.
그때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아주 잠깐 그의 존재를 잊었다.
녀석은 움직임이 없는 저격수의 시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자"
소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나를 따라 계단으로 향했다. 난 굳이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수많은 계단을 밟고 내려가던 중 문득 김씨 할아버지 쪽에서 들려왔던 총성이 떠올랐다.
'여기서 총잡이 둘을 잡았는데? 할아버지가 처음에 숨었던 놈을 잡았다면 블루건에 작살난 놈까지 총잡이 네 명을 다 잡은 건데 왜 총성이?'
난 일 층에 도착한 후 복도 벽 뒤에 앉아서 잠시 숨을 돌렸다.
'처음에 떨어진 총···. 아···. 누군가 주워갔군.'
1102호 놈들 정리하고 떨어졌던 총을 확인하러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미 늦었다. 어쩌면 한참 늦었는지도 몰랐다.
아까 대놓고 총이 떨어지는 게 단지 내에서 보였다. 게다가 그때는 어스름한 저녁 빛도 남아있을 때였다.
"놈들이 더 있을까?"
고개를 돌리며 소년에게 묻자 그는 피 묻은 손을 이미 더 더러워지기도 힘들어 보이는 옷에 쓱 문질러 닦더니 고개를 들고 날 바라봤다.
"아저씨는 저 사람들이랑 달라요?"
'뭐지? 이 섬뜩한 기분은?'
녀석의 초롱초롱한 눈 속에 숨어있던 그 기운은 살기였다.
하지만 그 살기는 나를 향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난 녀석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 다르지 않아"
내가 녀석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 것처럼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소년은 내 눈을 잠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처음에 시퍼런 총 쏘셨던 건너편 아파트요"
소년은 고개를 조금 빼서 그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거기 일 층에도 아이들이랑 아줌마들 갇혀 있어요. 지키는 아저씨도 있었고, 항상 두 명이 지키고 있었어요. 지금은 모르겠지만"
하필 총이 그들의 근처로 떨어진 모양이다. 아직 총잡이 잔당이 남았다.
그런데 그때
녀석이 바라보는 건너편 단지의 그 아파트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다 죽일 거야! 다가오면 다 죽여! 애들이랑 애들 엄마도 싹 다 죽일 거야!"
거리가 좀 있었지만, 문명의 소음이 대부분 사라진 세상에서 놈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잘 들렸다.
그리고 여지없이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흐느끼는 여인의 소리도 들린다.
'아 씨! 인질극인가?'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간 거미를 쫓아야 하는데 상황이 애매하게 돌아갔다.
'우선 사람부터 살려야지'
놈은 지금 내가 105동에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단지라 지하 주차장으로 저쪽 아파트로 접근할 수 없다.
'완전히 돌아가야 하는데'
놈은 건너편 단지의 101동이다. 그곳으로 들키지 않고 가려면 다시 버스로 돌아가서 그쪽 단지 담벼락과 가까운 103동을 이용해 그쪽 단지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할아버지가 아직 그 건물에 있는데?'
고층에서 잔당들을 처리하고 내려오다가 저 인질극을 벌이는 놈의 외침을 들었을 거다.
그리고 아까 할아버지가 소리치는 바람에 놈은 나 포함 우리 두 명의 위치를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나라는 어디 있는 거지?'
그녀도 이 상황을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거다. 서로 통신이라도 가능하면 같이 계획을 세워볼 텐데 각자 따로 움직이니 너무 비효율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놈은 우리가 접근만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럼 그냥 가는 척하면 되지 않나?
"넌 여기 있어라."
난 뒤쪽으로 완전히 돌아가려는 계획을 접고 그냥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년에게서 들을 이야기가 많지만, 지금은 우선 인질부터 살려야 한다.
놈은 소년의 존재를 모를 거다. 여기 1102호 놈들이 아까 총을 갈기긴 했지만, 그놈들은 이미 끝장났고 그들끼리 통신 수단은 없다.
난 공동현관 밖으로 걸어 나가면서 소리쳤다.
"총 쏘면 넌 죽는다."
그리고 버스 방향으로 태연하게 걷기 시작했다. 완전히 노출된 아파트 지상 주차장이다.
놈은 총을 겨누고 날 지켜보고 있을 거다. 난 활과 검을 모두 등에 메고 빈손으로 그렇게 버스를 향해 걸었다.
"한 명 더 있잖아! 기침 할배도 나오라고!"
놈이 소리쳤다. 할아버지는 이미 같은 건물에 있고 놈도 그걸 알고 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탕!
난 순간 움찔했다. 그런데 나를 겨누고 쏜 게 아니라 집 안에서 총성이 울렸다.
놀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더더욱 커졌다.
'저 새끼가'
집 안에 숨어 밖에서 전혀 보이지 않으니 활로 어떻게 할 수도 없다. 인질 때문에 블루건으로 쓸어버리지도 못한다.
적어도 한 놈은 아닐 거다. 작은 창문 틈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데 그 틈을 찾기는 어려웠다. 어둡고 멀었다. 접근할 수도 없었다.
"할아버지! 그냥 갑시다!"
내가 그렇게 외치자 인질 건물 근처에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가고 있어! 쿨럭"
우리가 돌아가고 있다고 믿게 해야 했다. 그리고 나와 할아버지 그리고 저놈의 외침을 어디선가 나라가 들었을 거다.
나는 바리케이드를 넘어 버스로 다가갔다. 마침 할아버지도 그쪽 단지에서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버스 지붕으로 올라가 놈이 잘 보이게 서서 손을 흔들었다.
"우리 간다! 아파트 일은 알아서들 해결해!"
운전석에 앉아있던 성희가 내 의도를 알아차린 듯 천천히 버스를 움직였다.
우리는 버스를 돌린 후 다시 다리를 건너 시내 방향의 언덕길을 올랐다.
언덕 위에는 아파트 방향으로 작은 둔덕이 있었다.
"성희야 저기 뒤에"
버스가 완전히 아파트에서 가려지자 난 바로 [투명] 버튼을 눌렀다. 투명이 활성화된 후 우리는 바로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된 거야?"
난 버스 외부 조명을 모두 끈 후 말했다.
"떨어진 총을 주운 게 하필 놈들이야."
난 소년을 만난 것과 다른 총잡이를 처리한 이야기를 빠르게 전달했다.
"반대편으로 돌아서 접근하자, 아직 나라가 단지 안에 있어."
난 조수석에 앉아 성희에게 방향을 알려줬고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최대한 다른 잡동사니를 밟지 않게 조심하며 우리는 조용히 접근했다. 타이어가 소리만 내지 않으면 놈이 우리를 발견할 방법은 없다.
우리 버스는 천천히 반대편 단지 입구 쪽으로 향했다.
'왜 여긴 바리케이드가 없지?'
주변을 살피니 여기도 막는 중이었던 거 같다. 단지 작업이 끝나지 않았을 뿐
그 덕에 버스는 장애물 없이 인질극을 벌이던 아파트 단지 안으로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었다.
버스를 인질이 있는 건물의 사각에 세우고 옆문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계세요. 기침하면 바로 들키니까"
난 버스의 [소음 차단] 버튼을 누르고 버스에서 내렸다. 성희가 바로 버스 문을 닫았다.
난 몸을 숙이고 천천히 접근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 덕분에 인질의 위치는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 시끄러워!
쿠당탕!
누군가 맞고 쓰러지는 소리가 안쪽에서 들렸다. 그게 아이는 아니길 바랐지만, 더 시끄럽게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검을 쥐고 있는 손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저 새끼가"
- 그놈들 정말 간 거야?
- 시내 쪽으로 가는 거 봤어.
- 다시 자세히 봐!
두 놈의 대화가 들렸다. 난 벽에 붙어 계속 귀를 기울였다.
- 으아아아앙!
- 살려주세요. 제발
- 시끄럽다고! 아 씨 생각 좀 하게 조용히 좀 해!
놈들도 당혹스러울 거다. 수십 명의 동료들이 순식간에 몰살당했다. 게다가 두목도 죽었다. 그들에게 명령할 사람이 사라졌고 그들은 방향을 잃었다.
'이 새끼들은 배가 가라앉아도 여성과 아이들 먼저 구하는 데 그걸 거꾸로 배워먹었나'
끓어오르는 분노는 이내 식었지만 검을 너무 꽉 쥐고 있던 탓인지 손바닥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여기 아파트는 지하 주차장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일 층이 이 층 높이에 있는 필로티 구조다.
난 창문에서 보이지 않게 벽으로 붙어 안으로 진입할만한 곳을 찾았다. 그때 창문 난간에 누군가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나라다.
'저길 어떻게 올라갔지?'
내가 접근하는 걸 그녀도 눈치챘는지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나에게 손짓했다.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보니 인질이 있는 바로 옆집이다. 그쪽 아래에 주차된 차를 밟고 올라가면 될 듯했다.
바로 위로 올라가 베란다 난간을 붙잡고 안을 살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난 조심스럽게 창문을 밀었다.
끽
잠겨있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열린 적이 없었는지 둔탁한 소음이 울렸다.
난 잠시 멈췄다가 힘 조절을 하며 천천히 창문을 열었다. 다행히 큰 소음은 나지 않았다.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가자 썩는 냄새가 심하게 풍겨왔다. 음식 썩는 냄새다. 그 냄새는 냉장고 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벽에 가족사진이 걸려있다. 중년의 부부와 이십 대 초반의 여성이 웃고 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문득 건너편 단지의 지하 주차장이 떠올라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나라가 창문으로 들어왔다. 난 속삭이며 물었다.
"어디 있었어?"
"애들 우는 소리 들려서 처음부터 여기 근처에 있었어, 혼자 들어가기가 너무 애매해"
"몇 놈인 거 같아? 두 명 맞아?"
"아니 세 명이야."
그녀도 계속 인질들을 구할 방법을 고민하며 놈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던 거 같다. 하지만 그녀 혼자서 방법을 찾긴 어려웠을 거다.
"너 아까 매달렸던 창문으로 가서 기다릴래? 내가 여기서 놈들 유인할게."
"어떻게?"
"그냥 규칙적인 소음만 내면 돼, 총 가진 놈은 한 놈이야. 그놈만 인질에서 떨어지면 되니까"
나라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창문으로 향하며 말했다.
"총 위치 확인되면 소리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가 창문에서 사라지고 나서 집안을 둘러봤다.
현관문은 닫혀있다. 비밀번호 잠금장치다. 배터리로 동작하는 거다. 그냥 방전이면 9볼트 전지 하나 편의점에서 사 오면 되는데 지금은 모든 전기 장치가 동작하지 않는다. 심지어 부탄가스 버너도 스파크가 일지 않아 성냥을 이용해야 하는 세상이다.
물리적인 힘으로 열어야 한다. 부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면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이 이걸 부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게 저놈들이라면 총으로 쏘지 않을까?
난 소음을 위한 도구를 찾기 위해 집안을 둘러봤다.
'뭐가 좋을까?'
아무리 주인의 생사가 불분명하다고 해도 남의 집안을 부수고 싶진 않았다. 벽에 걸린 사진의 집주인이 날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부엌 찬장에 있는 냄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벽에 국자도 걸려있다.
난 두 개를 집어 들고 국자로 냄비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 밖에서 누군가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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