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J1. 인간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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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머리를 그렇게 성희에게 처맞고도 죽지 않았다.
섬뜩한 눈알을 마구 굴리며 주변 상황을 살피는 모습이 정말 공포스러웠다.
성희의 무릎이 다시 놈의 머리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놈이 온몸을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성희에게 움직임이 읽혀 계속 두들겨 맞더니 이젠 방식을 바꾼 모양이다.
놈의 손과 발에 달린 칼날이 빠르게 팽이처럼 회전하기 시작하니 성희도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 칼날 회오리는 주변의 집기들을 마구 분쇄하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믹서기가 돌아가는 것 같은 날카로운 놈의 움직임에 바닥에 쓰러져있던 시체들이 갈려 나가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붉은 피와 함께 찢어진 살점이 튀어 나갔다.
"으아악!"
사람들은 피와 살점을 뒤집어쓴 채 혼비백산해 도망 다녔고 성희도 놈을 어떻게 하지 못했다.
놈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난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밖으로!"
지금 이 안에 있으면 믹서기 안에서 갈리는 고깃덩이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앞다퉈 밖으로 뛰어나갔다. 성희는 다시 버스 안으로 들어왔다.
난 사람들이 전부 나간 걸 확인한 후 버스를 바로 후진시켰다.
빠르게 회전하며 사람들을 따라가던 놈이 버스 앞에서 이동을 멈췄다. 하지만 여전히 빠른 속도로 돌고 있었다.
저 상태로 버스에 닿길 기다렸지만, 놈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난 기어를 D로 바꾸고 악셀을 밟았다.
캉! 캉! 캉! 캉! 캉!
버스에 놈의 칼날이 드디어 닿기 시작했다. 덩달아 버스의 탐지 램프도 [Warning]과 [Caution]이 빠른 속도로 번갈아 바뀌며 번쩍거렸다.
난 램프의 색과 상관없이 마구 램프를 눌렀다. 그리고 마침내 타이밍이 맞는 순간이 왔다.
텅!
오래도록 기다렸던 아름다운 소리다.
파직!
기대했던 소리다.
회전하던 놈은 그대로 터져나가며 사방으로 초록의 액체를 흩뿌렸다.
버스에 묻은 액체는 바닥으로 모두 흘러내렸으나 마트 안으로 터져 날아간 놈의 살점은 사방의 벽과 바닥으로 흩어져 있었다.
놈이 연기로 흩날리길 기다리는데
"으악! 괴물!"
이번엔 마트 밖에서 비명이 들렸다. 난 후진 기어를 넣고 마트 밖으로 버스를 몰았다.
"쉴 틈을 안 주네"
창밖을 살폈다. 마트 주차장 너머에서 시커먼 움직임이 보였다.
못난이와 멧돼지 괴물이다. 각 열 마리 정도로 보인다. 간밤처럼 대규모가 아니라 다행이다.
밖에 있던 사람들은 마트 밖에서 이동 중인 괴물을 보고 소리를 지른 거였다. 그냥 조용히 숨어있지 왜 굳이 비명을 지른 건지 화가 치밀었다.
"다시 안으로!"
내가 창밖으로 외치자 사람들은 다급하게 다시 마트 입구 쪽으로 뛰었다.
'아까부터 할머니가 안 보이네?'
놈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우리의 존재를 인지한 듯 갑자기 뛰어오기 시작했다.
난 버스를 돌려 가로로 마트의 입구를 막았다. 괴물은 이제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난 검과 방패를 들고 버스 지붕으로 올라갔다.
맨 앞에서 뛰어오던 멧돼지 괴물 한 마리가 높게 뛰어오르더니 지붕으로 달려들었다.
다시 놈들의 움직임이 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난 놈의 머리부터 잘라내고 공중에 뜬 두 덩어리를 밖으로 차 냈다. 그 뒤로 또 다른 멧돼지가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세로로 놈을 두 동강 냈다.
몇 놈이 버스에 부딪혀 나뒹굴었다. 난 아래로 뛰어 내려가 놈들이 일어나기 전에 검을 머리에 각각 찔러넣었다.
그때 등 뒤에서 막 도착한 놈의 콧김이 느껴졌다. 난 검을 거꾸로 들고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찔러 넣었다.
퀘에에에엑
검이 목에 그대로 들어간 듯 놈의 괴성이 바로 귓가에서 들려왔다. 너무 큰 소리에 귀가 잠시 멍했다.
그때 두 놈이 괴물의 사체를 밟고 뛰어올라 내 머리를 향해 거대한 입을 벌리며 동시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마치 내 눈에는 놈들이 공중에 그대로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난 옆으로 가볍게 피하며 놈들의 목으로 검을 휘둘렀다. 두 놈의 목에서 동시에 초록의 액체가 사방으로 퍼졌으나 내 몸까지 닿진 않았다.
난 놈들이 달려오던 방향을 다시 살폈다.
멧돼지 괴물 한 마리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거친 숨만 몰아쉬며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 뒤로 느린 못난이들이 도착했다.
못난이들도 나에게 바로 달려들지 않았다. 놈들도 최소한의 지능은 있는 모양인지 멧돼지의 괴상한 소리를 인지하고 알아들은 모양이다.
난 놈들을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다.
다리 근육에 순간적으로 큰 힘이 들어갔다. 나의 상체는 앞으로 약간 기울었다. 검을 든 손에 마치 손잡이를 부숴버릴 것 같은 힘이 들어갔다.
모든 동작은 마치 세포에 기억된 것처럼 그렇게 내 근육 하나하나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고 내 검이 지나갈 때마다 괴물의 허무한 눈빛을 담은 눈알이 공중으로 휘날렸다.
그렇게 괴물들은 산산조각이 난 채 마트 주차장에 널브러졌고 이내 연기로 흩날렸다.
코르카 이십여 개가 버스 연료 주입구로 날아들어 갔다. 구체적으로 몇 개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난 고개를 돌려 버스 쪽을 바라봤다. 버스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입구가 그대로 열려있는 것처럼 밖의 상황을 훤히 지켜봤을 것이다.
버스 유리창 너머 사람들이 모여있는 게 보였다. 난 지붕으로 올라 안으로 들어간 후 지붕의 출입구를 닫았다.
내가 버스로 다시 들어오자 성희가 지친 얼굴로 벤치 시트에 앉아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몸보다 마음이 지쳐 보였다.
이젠 그녀도 각성 상태의 기억이 나는 거 같았다. 아마 촉수 거미 잡을 때부터 그랬던 거 같다. 각성이 풀리고 나서도 그녀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각성 능력 진입은 그녀가 원한다고 언제나 되는 건 아닌 거 같다. 버스 안에서 놈을 공격하던 그녀는 각성 상태가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때 놈은 죽었을 거다.
난 아이들의 상태를 살폈다. 조금은 진정이 된 모습이지만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난 버스의 옆문으로 나갔다.
여전히 공포에 질린 눈동자로 날 바라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희생자가 생겼지만 그래도 다 죽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생존자들의 표정이 이상하다.
그들의 눈빛은 괴물을 바라볼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공포에 질린 얼굴로 바닥에 잔혹하게 널브러진 시체 조각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도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난 우선 인간형의 사체를 찾았다. 그런데 아까 사방으로 퍼진 놈의 초록색 피만 남아 있고 사체 조각이 보이지 않았다.
"괴물 사체는?"
그나마 정상적인 눈빛의 태형에게 물었다.
"어? 괴물?"
"아까 그놈 말이야, 이 안에 있던"
태형은 멍하니 날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여기 다시 들어올 때 연기가 자욱하긴 했는데"
그때 교복 입은 여학생이 손에 뭘 들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건 코르카였다. 그런데 녹색이 아니다.
"아저씨 이거 찾아요?"
푸른색의 코르카다. 형태도 조금 다르게 생겼다. 코르카를 건네주는 여고생의 손이 피투성이다.
난 코르카를 건네받았다. 그때 버스의 연료 주입구가 열렸다.
"지금 코르카 몇이야?"
잠시 후 성운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52에요!"
좀 전에 스무 개 넘게 들어갔는데도 얼마 되지 않았다. 아까 생각보다 더 많이 소모된 것 같다.
성운이의 음성과 동시에 푸른 코르카는 버스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62로 올라갔어요!"
신비로운 느낌이라 좀 많이 올라갈 줄 알았는데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열 개가 어디야'
난 다시 마트 안의 상황을 살폈다. 이젠 여기에 사람이 머물기 힘들어 보인다. 섬뜩하고 처참했다.
"끄윽"
그때 구석에 앉아있던 아주머니의 신음이 들렸다. 언뜻 봐도 상처가 심해 보였다.
"약품 같은 거 없어? 마트에도 그런 거 있지 않아?"
그때 아주머니가 손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태형이 그 방향으로 뛰어가더니 직원용으로 보이는 의료도구함을 들고나왔다.
태형이 아주머니의 상처에 소독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난 다른 사람들을 살폈다.
소주 아저씨도, 마트 점장도, 괴물이기 이전에 사람 행세를 했던 청년도 이젠 없다.
"할머니는?"
갑자기 떠올라 내가 묻자 다들 행방을 모르는 듯 대답이 없었다. 그때 사무실 쪽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난 쪽으로 뛰어가 살피니 무너진 벽 사이에 할머니가 끼어 있었다.
"여기 좀!"
그때 성희가 버스에서 뛰어 내려왔다. 나와 성희는 무너진 벽을 옆으로 밀어버리고 할머니의 상태를 살폈다.
큰 상처는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의식도 있으셨고 거동도 조금은 가능해 보였다.
살아남은 사람은 마트 복장의 아주머니 두 분, 교복 입은 여고생 한 명, 할머니 한 분, 그리고 태형이다.
대부분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고 정신적인 충격도 커서 제대로 뭘 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멍하니 앉거나 누워있었다.
마트 바닥에는 시뻘건 인간의 피와 초록의 괴물 피가 섞여 엉망이었고 그 사이사이에 괴물에게 갈린 사체 덩어리가 그대로 놓여있었다.
남은 생존자들이 다른 곳으로 당장 거처를 옮기기는 어려울 거 같다. 이들이 여기 계속 머물 수 있게 조금은 돕고 싶었다.
입구는 버스가 안전하게 막고 있다. 괴물은 벽을 부수지 않는 한 지금은 쉽게 들어오지 못할 거다.
"뒷문 창고 쪽은 괜찮아?"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살피던 태형이 일어서며 대답했다.
"어젯밤에도 괴물들이 뒷문으로는 안 갔어, 입구 쪽만 뚫고 들어오더니 난장판을 만들고 바로 나가더라고, 뒤쪽 문은 한 번도 열린 적 없어"
난 청소 도구를 찾으며 말했다.
"시체 수습···. 바닥 정리부터 우선 하자. 이 상태로는 안에서 버티기 힘들 것 같아"
나와 태형 그리고 성희가 바닥에 널브러진 사체들을 모아 자루에 담았다.
세 자루
새삼 인간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졌다.
우리는 뒷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창고 쪽을 살폈다. 의외로 창고는 깔끔했다. 그리고 물류용 큰 문과 그 옆에 작은 철문이 보였다. 큰 문은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작은 철문 옆에 자루를 내려두고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손에 쥐었다.
철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리고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가 주변을 살폈다.
밖은 고요했다.
우리는 자루를 다시 집어 들고 뒷마당으로 나가서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하지만 모두 시멘트 바닥이라 마땅히 그 자루를 둘 곳이 없었다. 땅을 파서 묻을 여유가 없긴 했지만 그래도 아무 곳에나 던져버릴 수도 없었다.
그때 구석에 큰 철제 통이 보였다. 그건 거대한 쓰레기통이었다.
우리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그때 마트 안쪽에서 성운이의 외침이 들렸다.
"아저씨! 노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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