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J1. 식구
난 고개를 겨우 움직여 소리가 난 아이들 쪽을 바라봤다.
한쪽 눈은 베였는지 찔렸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머지 한쪽 눈도 초록 액체가 찐득하게 달라붙어 있어 성희와 아이들의 윤곽만 겨우 보였다.
그런데
더는 베이고 찔리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성희도 움직임이 거의 없다.
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그때 아이들의 얼굴이 잠깐 시야에 보였다.
눈이 벌겋게 변한 두 아이는 서로의 이마를 맞대고 손을 꼭 잡은 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공포의 비명이 아니었다.
그건 분노의 외침이었다.
아이들의 몸이 하얀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 빛에서 사방으로 무언가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눈부신 바늘 같았다.
햇빛에 반사된 게 아니라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바늘이었다.
그 헤아릴 수 없는 빛의 바늘들은 동시에 사방으로 퍼지며 하늘로 날아갔다.
난 흐린 시야로 하늘을 살폈으나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그저 하늘이 반짝이는 무언가로 뒤덮이는 느낌만 들었다.
귀가 먹먹하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다시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아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하늘이 어두워지는 느낌이다. 회색 연기가 온 하늘을 뒤덮었다.
그런데 그 연기 속에서 무언가 반짝인다. 이번에는 초록빛이다.
익숙한 느낌이다.
뭐지?
코르카?
쿵!
반짝이는 그 물건은 내 머리 바로 옆으로 떨어졌다.
시발 정통으로 맞으면 죽겠는데?
욕이 나오는 걸 보니 난 아직 살아있었다.
"윽!"
또 다른 한 개가 내 배 위로 떨어진 것 같다. 이번엔 그 느낌이 미세하게 들었다.
난 그때 보았다.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고 있는 코르카 들을
대략 백 개는 넘어 보였다. 난 순간 흐릿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거 제대로 맞으면 죽는다.
왜 버스가 바로 받아먹지 않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건 잘도 주워 먹더니
일단 피해야 한다.
좀 전까지는 괴물이 문제였지만 지금은 떨어지는 코르카가 문제다. 이 상황에서는 무시무시한 돌멩이일 뿐이다.
하지만 난 몸을 거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성희도 움직임이 없다. 그런데
어?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버스 아래로 떨어졌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내 흐릿한 시야에 보였다.
지붕의 출입구에서 나타난 작은 손들이 성희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성희가 출입구 안으로 떨어졌다.
그 작은 손들은 출입구에서 다시 등장하더니 축 늘어진 내 팔을 잡았다.
"윽!"
이 남매의 힘이 보통이 아니다. 하지만 건장한 어른을 아이들이 옮기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난 오래도록 힘겹게 당겨졌다. 그때 코르카 한 개가 내 팔 바로 옆에서 강하게 튕겨 나갔다. 아슬아슬했다.
그리고 마침내 난 버스 운전석으로 떨어졌다.
"악!"
성희의 비명이 들렸다. 먼저 안으로 떨어진 성희 위로 내가 떨어진 탓이다. 그녀도 살아있어 다행이었다.
"침대로"
두 아이는 나와 성희를 힘겹게 끌고 끌어서 침대 옆으로까지 데려갔다. 대단한 아이들이다.
난 왼팔에 조금 남은 모든 힘을 다 쏟아내어 성희를 침대로 올려 욱여넣었다. 그리고 나도 간신히 성희 옆으로 비집고 들어가 누웠다. 이층까지 올라갈 여력이 없다. 회복이 우선이다.
"냉장고에 먹을 거 꺼내 먹어···."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한 것 같다. 정확하진 않다. 그런 느낌이다. 시야도 흐릿하고 침대에 오르며 마지막 남은 기력까지 다 써버려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 * *
"뭐야!"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내 눈 바로 앞에 성희의 얼굴이 있었다. 그녀는 이미 눈을 뜨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그렇게 우리는 한 침대에 누워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현재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정신이 들자 잠들기 전의 상황이 기억났다. 우리는 거의 죽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지붕 위에서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침대에서 눈을 떴다. 그런데 내가 옆에 누워있다. 나는 여기까지의 상황을 알지만, 그녀는 중간의 기억이 없을 터였다.
번쩍!
다행이다. 적어도 무릎에 맞진 않아서
거실로 가니 아이들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테이블 위에 바나나 껍질이 수북이 쌓여있다.
'헐'
아이들이 간단히 먹기 좋은 과일이다.
"저거 마술 냉장고에요"
나도 안다.
난 한숨이 나왔지만 그래도 녀석들이 벌어들인 코르카가 백 개는 넘을 거다. 먹을 자격이 있다.
난 창밖을 살폈다. 땅에 떨어진 코르카는 보이지 않았다. 버스가 잘 주워 먹은 모양이다.
창밖에는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오래 잔 거 같다. 몸이 가뿐하다. 옷만 넝마가 되어있다. 청바지도 마치 옷을 입지 않은 것처럼 너덜너덜하다.
뒤에 서있는 성희도 나보단 나아 보였지만 옷이 거지꼴이다. 청바지가 어느새 반바지가 되어있었다. 너덜너덜한 부분을 아예 손으로 찢어버린 것 같다. 공포의 무릎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난 운전석으로 가서 계기판을 확인했다.
[184/100]
그리고 노란 불빛을 발하고 있는 버튼이 옆에 보였다.
[Evolution]
지금 눌러도 될까?
아니 밥이나 먹고 누르자 급할 거 없으니
아이들은 지붕 문까지 닫아 놓았다. 꼼꼼한 녀석들이다.
그 덕분인지 창밖에는 괴물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그들에게 우리가 보이지 않을 테니 여기 괴물이 죽치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물론 인간형은 예외지만
조수석에 떨어져 있는 방패가 보였다.
'검은 아직 지붕에 그대로 있겠네'
난 거실 테이블로 다가가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고기 먹을래?"
아이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음식 창고를 가리킨다.
음, 이미 열어본 거군
난 라면을 꺼냈다. 인덕션의 화구가 두 개다. 한쪽에는 라면 물을 올리고 한쪽에는 프라이팬에 소고기를 올렸다.
성희가 다가와서 말없이 고기를 구웠다. 나는 라면을 끓였다.
테이블 위에 고기와 즉석밥과 라면, 그리고 각종 반찬이 놓였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모여 앉았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 마치 식구 같다. 같이 밥 먹으니 식구 맞네
"자 먹···."
내가 말하기도 전에 모두 전투적으로 수저를 움직였다. 아이들의 식성도 보통이 아니다. 식신 멤버 추가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코끝이 찡했다.
"아저씨 아파요?"
여자아이가 묻는다. 그나마 먹으면서 나의 존재를 잊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다.
"오빠라고 해, 삼촌이나"
아이가 음식을 입안 가득 우물거리며 눈을 가늘게 뜬다.
"아여씨 가튼데"
아이고, 어디 가면 아직도 학생이라고 부르고 편의점에서 민증 검사도 가끔 하는데 아저씨라니
"먹어라."
나도 잘 익은 한우를 한 점 집어 먹으며 그렇게 식신 식구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잘 먹었습니다!"
밥을 다 먹은 아이들이 동시에 큰 소리로 인사했다. 가정 교육을 엄하게 받았나 보다.
우리는 같이 테이블을 정리하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오빠가 대답했다.
"강원도 태백시 운주로 17번길 1"
똑똑한 아이다. 주소를 줄줄 왼다. 요즘 아이들은 다 이러나?
그런데 이 버스의 내비게이션은 주소 검색 따위는 없다. 지형과 길 정도만 표시한다. 하지만 다행히 태백시 가는 길은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때 여자아이가 하품한다.
난 뒤의 침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층은 오빠랑 내가 쓸게, 넌 여기 언니랑 같이 일 층 써
말하자마자 여자아이는 침대로 들어가 눕는다.
"양치···."
성희가 뭐라고 중얼거리다 만다. 애들 칫솔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다음번에 구해야겠다. 편의점에서 칫솔을 왜 두 개만 챙겼을까?
남자아이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내가 물었다.
"이름이 뭐니?"
"성운이요. 최성운, 동생은 최성희"
"정말? 동생이 성희라고? 이 차에 성희가 둘 이네?"
성희가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말은 없다.
"나는 한진우, 여기는 큰 성희 아니 장성희"
소년이 나와 성희를 번갈아 바라본다. 이제 큰 성희 작은 성희라 불러야 하나?
"엄마 아빠한테 가주실 거예요?"
성운이가 담담하게 묻는다. 어린 나이에 상황 파악이 어느 정도 되는 것 같다. 첫째고 오빠라 다른 건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이 애들을 계속 보살피기는 힘들뿐더러 부모님 찾으러 애들만 보낼 수도 없는 일이다.
"내일 아침에 출발하자."
아이는 벌떡 일어서더니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감사합니다."
그 음성이 애잔하게 들려왔다.
성운이도 졸린 눈으로 하품하더니 침대의 이층으로 올라갔다.
난 성희와 테이블에 앉아서 말없이 어둠이 내리는 창밖을 바라봤다.
"살아서 다행이야."
내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난 밖을 확인한 후 옆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스산한 찬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에 시골의 냄새가 실려 왔다.
아닌가
불 지피는 냄새도 아니고, 밥 짓는 냄새도 아니고, 외양간 냄새도 아니고
이건 피 냄새다.
인간의 피 그리고 괴물의 피
오늘은 살았지만,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난 버스 창으로 안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테이블 조명만 켜놔서 그런지 불빛이 따뜻하다. 성희는 여전히 반대편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침대 쪽 창에는 아이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세상이 멸망하니 나는 오히려 식구가 늘었다.
그러면 나의 세상은 멸망인가 아니면 축복인가?
살기 위해 임시로 뭉친 사이라고 해도 혼자 자취방에서 느꼈던 외로움보다는 나았다.
살아야 하는 의미가 조금 생겼다.
난 버스 주변을 살폈다. 바닥에 떨어진 코르카는 보이지 않았다.
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버스의 지붕을 살폈다. 찌그러진 부분은 보이지 않았지만, 지붕은 엉망이었다. 괴물 사체는 모두 먼지로 변해 사라졌겠지만 찐득한 액체 찌꺼기 잔여물은 아직 남아있었다.
난 지붕에 그대로 있는 검을 집었다. 손잡이에 초록의 액체가 범벅이 되어 묻어 있었다.
죽기 전에 괴물의 몸에서 흘러나와 떨어진 초록 피는 몸체가 죽어도 먼지가 되어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찐득한 액체 사이로 코르카 십여 개가 아직 지붕에 남아있었다.
발로 차서 전부 떨어트리자 곧 연료 주입구가 열렸다. 그리고 버스는 순식간에 전부 먹어 치웠다.
'바닥에 한 번은 떨어져야 하는 건가?'
내가 주워서 던지는 건 잘 받아먹었다. 그런데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거나 혹은 버스 지붕에 있는 것들은 자동으로 충전이 안 되는 것 같다.
난 멀리 마을 읍내 쪽을 내려다봤다.
어둠이 깔려있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시꺼먼 개미 떼 같은 괴물들은 여전히 그 원형 안으로 모이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장소가 뭐길래'
하지만 알 수 없었다. 물어볼 사람도 없다.
난 버스 지붕 문을 열고 아래로 내려가 검을 창고에 넣어두고 성희에게 말했다.
"진화할 건데, 여기 앉아 있을래?"
그녀는 일어나 침대로 들어갔다. 내 생각에도 침대에서 기절하는 게 나을듯싶었다.
난 운전석으로 가서 계기판을 살폈다.
[197/100]
지붕에서 떨어트린 코르카가 충전되어 있었다.
난 그 옆의 버튼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누르지 않았는데도 벌써 눈이 시리고 아픈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수면용 안대라도 있으면 좋겠다.'
난 고개를 돌려 침대에 누운 식구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노란색 불빛의 버튼으로 시선을 옮겼다.
[Evolution]
난 안전띠를 맸다. 핸들 쪽으로 쓰러지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조치였다.
그리고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강한 빛이 내 시야를 뒤덮었다.
익숙할 만도 한데
너무 눈부시고 아렸다.
하지만 조금 기대가 되기도 했다.
'냉장고에 뭐가 새로···.'
그리고 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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