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J1. 불청객
난 반찬통의 안을 들여다봤다.
정말 맛있어 보이는 색상과 자태의 깍두기였다. 약간 익어서 상큼한 향이 올라왔다.
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시선을 나에게 옮겼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저렇게 슬픈 눈빛을 할 수 있는 게 놀라웠다.
"어렸을 때 내가 깍두기 질렸다고 짜증 냈었어."
새콤달콤한 향이 계속 올라오니 그 냄새에 저장되어 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성희네 집에서 늦게까지 놀다가 저녁을 먹고 오기도 했었는데 그때 물에 밥 말아서 저 깍두기랑 먹었던 기억이 났다.
"서울로 이사하고 엄마 깍두기는 더는 먹을 수 없었어···. 나도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성희도 사실은 저 깍두기가 그동안 그리웠던 건 아닐까?
난 전자레인지에 즉석밥을 돌리고 냉장고에서 생수를 한 병 꺼냈다.
"밥 말아서 먹던 그 맛이 생각났어."
그렇게 우리는 깍두기 하나를 놓고 즉석밥 한 개를 말없이 나눠 먹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사실 필요하지 않았다.
버스 식구들이 반찬을 통해 그들의 식구를 다시 만났다.
그렇게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식구들을 떠올리며 침대에 누웠다.
정말 긴 하루였다.
무척이나 피곤했지만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침대 아래층에서도 한참 동안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 * * * *
거실에서 들려오는 달그락 소리에 눈을 떴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이들이 벌써 자신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난 침대에서 내려오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유민이 형이 찾아준 거야"
"네, 아침에 인사했어요."
성운이가 대답한다. 표정이 한결 밝아진 모습이다. 작은 성희도 오랜만에 웃음을 보였다.
"유민이 아침 운동 나갔나 보네?"
아침을 준비하는 성희의 뒷모습을 보며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버스 안으로 훅 들어왔다.
"애들이랑 잠깐 얘기 나누다가 갔어, 약수터 쪽으로"
난 버스 옆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어제 그 난리 통이었던 교회 쪽은 조용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거대 이구아나는 마치 조형물 같아 보였다.
'벌레 괴물의 작품이군.'
그때 갑자기 지축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던 거대 괴물의 뼈들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었다.
버스 안의 식구들이 놀란 표정으로 그쪽을 바라봤다. 놀란 사람들은 우리 식구뿐만이 아니었다. 골목 안쪽 빌라의 창문들이 열리며 사람들의 얼굴이 나타났다.
밝은 아침 햇살 덕분에 그들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저 두려움에 떨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어제의 그 난리 통에서도 얼마나 공포에 떨었을까?
엄청난 굉음과 진동은 한동안 그렇게 온 동네를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거대한 통뼈 조각들이 무너지면서 생겨난 먼지가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상쾌한 아침 공기 다 버렸네'
다시 버스로 들어가자 테이블 위에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 반찬통 네 개도 보였다.
"다시 가득 있어요!"
작은 성희의 설렘 가득한 목소리다. 이제 우리는 버스가 존재하는 한, 코르카가 떨어지지 않은 한 그 반찬들을 계속 먹을 수 있다. 마치 엄마가 차려주신 밥상처럼 그렇게
성희도 깍두기를 아주 맛있게 먹었다. 어제의 깊은 슬픔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난 식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침을 먹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참 어제 말하다 만 게 있었지?"
내 말에 성희가 밥을 먹다가 갑자기 기침했다.
"아···. 먹는데 미안"
그녀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니···. 별건 아니고···. 어렸을 때 네가 날 구해준 적이 있다고"
난 도무지 기억할 수 없었다.
"내가 언제?"
"난간 없던 다리에서"
"뭐?"
"그날 그냥 앉아 있던 게 아니었거든."
지금은 없어졌겠지만, 시골에 난간이 없는 높은 다리가 있었다. 그 아래로는 강물이 흐르고 있었고 특히나 장마철에는 물도 깊고 물살도 셌다.
"그날 아빠 엄마가 이혼하신다고···."
갑자기 그때 기억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너 이사하기 얼마 전이었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갑자기 서울로 이사를 한다고 해서 무척이나 서운했던 기억이 난다. 그 전에 다리 위에 멍하니 앉아 있던 그녀를 본 기억도 어렴풋이 났다.
"그때 너를 만나지 못했으면 아마···."
그랬던 거였나, 그래서 다리 위에서 그렇게 위태롭게 앉아 있었구나
우리의 대화를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아이들이 갑자기 창밖에서 뭘 발견한 듯 외쳤다.
"사람들이다!"
작은 성희의 음성이다. 성운이도 놀란 표정으로 창밖을 살폈다.
'동네 사람들인가?'
나와 성희도 창밖에 멀리 서성이는 사람들 무리를 발견하고 자세히 관찰했다.
그들은 언덕 아래에서 막 올라온 거로 보였다. 교회 주차장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거대 뼈다귀를 살피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장했는데?"
성희의 음성이다. 나보다 눈이 좋은 성희는 작은 디테일을 항상 나보다 먼저 발견했다.
그들의 손에는 검과 도끼, 그리고 활 등이 들려있었다. 개중에는 낫과 곡괭이도 보였다.
생존자 그룹인 거 같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직 알 수 없으니 우선은 경계해야 한다.
"유민이 형이에요"
성운이의 음성이다. 약수터 쪽에서 내려오던 유민이가 낯선 무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저들이 각성자면 유민이가 위험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 버스도 보일 거다. 그 때문에 난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그들이 유민이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을 때 버스에서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난 긴 고민 없이 검집을 등에 메고 방패를 팔에 걸었다.
"애들 잘 보고"
난 조용히 버스에서 내려 빌라 건물 뒤쪽으로 몸을 숨기며 교회 주차장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그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유민이가 그들에게 다가가서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엄폐물이 없어 바로 노출될 수 있었다.
난 그들의 행동과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좀 이상한데?'
무리의 대표로 보이는 사람은 온화한 표정으로 유민이를 바라보며 뭐라고 계속 말을 하고 있었다. 유민이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느라 주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때 내 눈에 유민이의 뒤쪽으로 은밀하게 접근하는 사내들이 보였다. 네 명이었다. 처음부터 놈들의 그룹과는 다른 방향에서 접근한 놈들이다.
그들의 손에는 이상하게 생긴 그물망 같은 게 들려있었다.
'설마? 유민이를?'
그 수상한 네 명은 유민이의 뒤쪽으로 조용히 접근했고 유민이는 아직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각성자만 아니면 저 정도의 숫자는 나 혼자도 쓸어버릴 수 있다. 유민이에게도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저놈들은 유민이에 대해 알고 온 것 같았다. 저 허접하게 보이는 그물망은 내가 모르는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유민이가 저 그물에 걸리기 전에 우선 막아야 했다. 길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난 그물망을 들고 지나가는 놈들에게 바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세 명의 머리를 주먹으로 후려쳐 기절시킨 후 나머지 한 명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그리고 그들의 무기가 아침 햇살에 번뜩였다.
"형!"
유민이가 날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대체 뭘 잡으려고 그물을 몰래 가져와?"
난 대놓고 반말부터 하는 성격은 아니다. 그런데 놈들의 행색과 표정에서 우러나오는 그 천박하고 야비한 기운에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검 내려놓으세요."
대표로 보이는 자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이 차분했다. 온화한 표정과 따뜻한 음성으로 여러 사람 홀리게 생겼다.
난 저런 사람을 안다. 내가 뒷모습으로만 생물을 판단하는 건 아니다. 모든 생물에게는 타고난 기질과 기운이 있다. 그리고 태생적으로 야비하고 천박한 인간들이 있다. 난 특히나 그런 기운을 잘 느낀다.
"왜 이자들이 뒤로 몰래 접근했는지부터 설명하지?"
내가 재차 묻자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유민이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와 그룹 대표를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괴물 뼈 필요하다고 도와달라고 하시더니"
그때 대표의 뒤에서 어떤 형체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리고 이미 화가 나 있는 내 감정은 오랜만에 내 고대 세포를 깨우고 있었다.
여섯 명의 사내가 대표의 뒤에서 반씩 갈라져 좌우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움직이는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 보였으나 나에게는 마치 나무늘보가 움직이는 것 같아 보였다.
일반인의 움직임이 아니다. 각성자다. 그리고 손에는 허접하긴 하지만 검과 도끼 등의 병장기를 들고 있었다.
'저런걸 어디서 구했지?'
그들은 동시에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유민이도 그들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있었으나 그 속도를 따라가진 못했다.
난 우측으로 달려드는 놈들의 발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어쨌건 놈들은 아직 인간이다. 그리고 나는 살인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아직은
내가 휘두른 검에 세 명의 발목이 반쯤 잘려 나갔다.
"정당방위"
내가 중얼거리며 왼쪽을 바라보는데 유민이를 향해 도끼와 낫이 날아들고 있다. 유민이도 순간 피하려고 움직였으나 그들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놈들의 병장기가 유민이의 팔과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악!"
유민이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다행히 그의 상처가 깊어 보이진 않았다.
놈들이 재차 유민이에게 달려들었지만 내가 놈들의 한쪽 발목을 다시 반 정도 잘라냈다.
죽이는 것 보다 부상이 났다던가?
저들에게도 전우애 따위가 있을지 궁금하긴 했지만 적어도 고통의 발악을 하는 동료들을 보고서도 멘탈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그때 대표의 뒤에서 화살이 여러 발 동시에 날아왔다.
'화살도 느리게 보이네?'
난 천천히 날아오는 화살을 전부 검으로 쳐냈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유민이를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
유민이는 피가 흐르는 팔을 부여잡으며 대표를 노려봤다.
"왜 그래요? 도와주려고 했는데!"
유민이는 약수터에서 내려오며 발견한 사람들에게 호의적으로 다가간 거로 보였다.
발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내지르는 비명이 들려오는 주차장은 다시금 그렇게 소음으로 가득해졌다.
하지만 고통의 몸부림으로 바닥을 구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여전히 표정에는 변화가 없는 그룹의 대표는 편안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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