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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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직 파직
그런 소리가 났다.
초록의 피가 물과 함께 사방으로 튀었다.
그건 보트 모드에서도 이제 접촉 파괴가 동작한다는 의미다.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진화의 결과가 안 보여서 실망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저런 괴물은 처음 보는데?'
난 창문 가까이 다가가 버스에 닿아 연신 터져나가는 괴물들을 자세히 관찰했다.
나름 괴물들을 많이 접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떻게?'
난 이상하게 가뿐한 기분이 들어, 내 몸을 확인했다. 허리에서도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고 버스 안에서 뒹굴며 긁혔던 상처들도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있지도 않았는데?'
마치 자연 치유가 된 느낌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상태가 좋으니 굳이 더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난 뒤쪽 침대로 걸어가 침대 일 층에 누워있는 성희를 확인했다. 이불을 덮고 있지는 않아서 그녀의 몸 상태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까 언뜻 봤을 때도 느꼈지만 그녀도 치유가 제대로 된 거 같았다.
'다행이야···.'
난 침대 옆에 앉아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의 편안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어릴 때 얼굴이 많이 남아있네'
마치 영원히 어린아이일 것처럼 그렇게 지냈다. 때론 설레고 때론 슬프다가도 또 때로는 너무나 즐거웠던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이미 내 무미건조했던 삶도 멸망으로 가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시골로 굳이 부르지 않으셨어도 난 시골로 갈 수밖에 없었을 거다.
밀린 월세로 반쯤 까먹은 보증금 얼마라도 빼서, 시골집에서 최소한의 생활비로 뭔가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저 아무런 의미도 없던 그런 삶을 종결해 버렸거나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는 괴물을 처음 목격했을 때 공포감을 느꼈다.
두려웠다.
살고 싶었다.
나는 오히려 멸망한 세상에서 더 많은 의미가 생긴 걸 아닐까?
그리고 내 눈앞에 있는 그녀도 다시 만났다.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만 간직하고 있던, 한밤중에 장거리 트럭 운행을 하면서 라디오에서 익숙한 예전 가요가 흘러나올 때, 아주 가끔 그렇게 떠올리던 그런 친구
그녀가 버스의 식구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난 지난 시간을 버틸 수 있었을까?
오랜 시간 혼자 지내왔던 나는 그렇게 다시 혼자 지내기가 두려운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뭘 그렇게 봐?"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탓에 그녀가 눈을 뜬 것도 몰랐다.
"아···. 그···. 그게"
난 훔쳐보다 걸린 사춘기 소년처럼 얼굴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괜찮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으며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난 괜찮아, 성희 너는?"
그녀는 자기 몸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다 나은 것 같아, 아···. 정말 죽을 거 같았는데···."
그녀는 아까의 고통이 다시 떠오르는 듯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그녀가 버스 안을 둘러보며 변화를 감지한 듯 물었다.
"버스가 진화한 거 같아"
아마 그녀도 대략 짐작은 했을 거다. 우리는 거실 테이블 자리로 옮겨와 앉았다.
"그다지 바뀐 건 없어 보이는데?"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닌 것 같아"
그녀가 궁금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좀 전까지 버스에 달려들어 터져나가던 괴물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 버스가 보트 모드인데 아까 처음 보는 수중 괴물이 버스에 달려들더라고···."
"버스가 물에 빠졌어?"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 그리고 예전에는 보트 모드에서 안 되던 접촉 파괴가 되더라고···. 방금 덤비던 놈들 다 터져나갔어."
성희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창밖을 살피며 말했다.
"와, 그러면 이제···. 그 오염 벌레들 바다 위에서 밀어버려도···. 어?"
성희가 창밖을 살피다가 놀란 듯 말을 멈췄다.
나도 일어나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왜? 뭐가 있어? 안개가 자욱해서 멀리까지 안보이더라고"
"아니···. 왜 이렇게 밝아?"
문득 난 그때 등에 찬 냉기가 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버스 진화에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적은 없었다.
분명 거대 뱀과 만났을 때는 아주 늦은 밤도 아닌 저녁쯤이었다. 그런데 벌써 날이 밝았다고?
게다가 어제 그 근처의 바다에 버스가 떨어진 거면 이렇게 바닷물이 맑을 순 없을 거다. 분명 근처의 바다가 시커멓게 오염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기 때문이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는데?"
나와 성희는 창밖을 계속 살폈으나 밝은 빛과 십 미터도 안 되는 시야로 볼 수 있는 건 그저 잔잔한 파도의 수면뿐이었다.
액정의 탐지 숫자를 살폈으나 모두 0이다.
"어머! 뭐야!"
그때 버스 창밖으로 작은 생명체가 뛰어오르더니 버스 창문에 달라붙었다.
"물고기?"
창문 가까이 다가가 놈을 살폈지만 어떤 생물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탐지 숫자에 변동이 없는 걸 보면 괴물은 아닌 듯한데···."
"그때 폐 빌라촌의 괴생명체도 탐지에 안 걸렸잖아"
성희의 말에 버스 바퀴에 끼였던 괴이한 모습의 생명체가 떠올랐다. 머리에 다리만 달린 놈이었지
창문에 붙은 놈은 조금씩 위아래로 움직이더니 작은 입을 벌렸다. 날카로운 이빨 같은 건 보이지 않았으나 돌기가 잔뜩 달린 기다란 혀가 움직이며 천천히 튀어나왔다.
몸통에 달린 건 지느러미인지 다리인지 모를 정도로 짧고 뭉툭했다.
툭 툭
"어? 더 올라와!"
똑같이 생긴 놈들 두어 마리가 물속에서 튀어 오르더니 창문에 달라붙었다.
"접촉 파괴가 켜져 있는데도 멀쩡한 거 보니 해로운 괴물은 아닌 거 같다."
성희의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있는데 문득 당연한 결론이 떠올랐다.
"계속 못 보던 놈들이 나오는 거면"
내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침대 쪽에서 무거운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가 손님이라는 거지"
태형이 언제 일어났는지 천천히 테이블 자리로 걸어와 내 앞에 앉았다.
"태형아! 괜찮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까 그놈 말이야···. 파란 머리···. 일전에 나에게 창 던졌던 그놈이야."
나도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다.
"그때 도망치지 말고 놈의 눈을 제대로 노려볼 걸 그랬었나 봐"
"뭐?"
생각해 보니 아까 둘이 눈이 마주쳤을 때 마시울이 엄청나게 당황하며 고통스러워했던 게 떠올랐다.
"너 혹시 놈의 생각을 다 읽은 거야?"
"그때의 생각은 물론이고"
태형의 음성은 묵직하게 떨리고 있었다.
"놈의 기억까지···."
내 표정이 굳어지자, 성희도 덩달아 놀란 듯 나와 태형을 번갈아 바라봤다.
성희는 파란 머리 마시울과 대면한 적이 거의 없다. 언덕 위 빌라촌에서 어두운 창밖으로 잠깐 마주친 게 전부일 거다. 그래서인지 아직 영문을 모르는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와 만났던 걸 성희에게 자세히 이야기 해준 적이 없었다.
"놈과 난 예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어"
"그건 예전에 말해줬잖아···. 이해는 안 갔지만···."
버스 지붕 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내가 겪은 기이한 이야길 해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도 두서없이 짧게 이야기했었다. 나조차 이해하기 힘든 일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어쨌든···."
난 태형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자 그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날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놈의 기억 전부를 다 본 거야?"
내가 묻자, 그는 아직은 혼란스러운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갑자기 두통이 일어난 듯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인간의 기억이 아니야."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그럼, 놈이 무슨 괴물이라도 된다는 건가?"
내가 내 입으로 질문하면서도 이상하게 내가 나에게 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놈의 기억을 이해할 수가 없어···. 아마도 내 뇌에서 아직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난 모든 궁금증과 실마리가 풀릴 거라 엄청나게 기대했었다. 그런데 쉽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있나···.'
내 마음을 읽은 듯 태형이 입을 열었다.
"너무 실망하지 마. 조금씩 내 뇌가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 마치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달까"
내가 대답이 없자 그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이들은 아직 무사해"
그는 이미 내가 제일 걱정하고 궁금한 게 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부분부터 그의 뇌가 해석한 것 같았다.
"그리고 할아버지도 무사하셔"
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할아버지는 왜 그곳에서 그러고 계신 건지. 마시울은 왜 아이들을 이곳으로 데려온 건지
"그리고 그···. 끄아아악!"
그는 뭔가 떠올리면서 말하다가 갑자기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왜 그래? 괜찮아?"
그는 머리를 감싸 쥐며 바닥으로 쓰러지더니 마구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나와 성희가 놀라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너무나 강하게 발버둥 치는 탓에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태···. 태형아!"
너무 큰 고통 때문일까? 엄청난 힘으로 버둥거리는 몸부림은 마치 악마에게라도 씐 듯한 모습이었다. 그 움직임만으로도 우리에게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가 무섭다기보다 그가 죽을까 봐 무서웠다.
빡!
순간 성희의 움직임이 느껴지더니 이내 태형의 발광이 멈췄다.
"뭐···. 뭐야···. 죽은 거 아냐?"
내가 놀라 다가가서 살펴보니 그는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아···. 이렇게라도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아서"
무릎식신 성희의 움직임은 참 오랜만이다.
우리는 다시 기절한 태형을 침대로 옮겼다. 최근에 그를 너무 자주 침대에 눕히는 것 같다.
"이 녀석 그냥 침대에 묶어두고 대화해야겠어"
"그러게···. 어?"
녀석을 침대에 눕히고 일어서던 성희가 침대 이층을 둘러보더니 짤막한 소리를 질렀다.
"왜?"
내가 묻자, 그녀는 침대 근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김씨 할아버지는?"
성희의 질문에 난, 마치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그를 까맣게 잊고 있을 수가 있지? 이것도 진화의 부작용인가?
"침대 이층에 계실 거로 생각했는데 안 보여"
그녀의 말에 나도 버스 뒤편과 침대 구석, 그리고 아래까지 찾아봤으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욕실에도 안 계셔!"
성희가 욕실 안쪽을 살피고 나오더니 소리쳤다.
"대체 어디로 사라지신 거지?"
"혹시 지붕에?"
난 액정에서 광역 방어막을 [ON] 시키고 바로 버스 뒤쪽의 지붕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밖에서 스산한 바람이 갑자기 밀려 내려왔다.
이전에는 맡아보지 못한 냄새다.
난 조심스럽게 지붕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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