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J1. 다른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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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왜?"
코트의 사내는 사실 우리에게 피해를 주거나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보를 알려준 사람이다.
그가 어떤 행동을 하던 우리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내 알 바 아니지만, 이곳의 상황에 관해 물어볼 사람이 그뿐이라 그냥 보내줄 수가 없었다.
"저들에 대해 더 아는 건 없나?"
난 침대에서 숨만 붙어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까 들었잖아, 수액 뽑으면 다 죽을 거라고, 그 이상은 나도 잘 몰라"
난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살피며 걸었다. 발가벗겨진 그들의 피부 상태는 흐린 녹색 코르카의 빛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미 시체 같은 느낌이다.
"그냥 이대로 두기엔 마음에 걸려서 말이야."
난 근처에 있는 천 따위를 집어 들어 나체 상태의 몸을 덮어줬다. 얇은 천이 몸 위에 얹어지니 앙상한 모습이 더더욱 눈에 잘 드러났다.
이들 모두가 각성자라면 우리 버스를 볼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의도에 따라 우리에게 위협이 될 수 있겠지.
물론 버스가 진화되어 이젠 내 허가 없이는 아무도 탑승할 수 없다. 하지만 버스를 볼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할 수도 있는 게 각성자다.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두면 고민과 위험이 동시에 해결된다.
난 눈을 감은 채 가늘게 숨을 쉬고 있는 그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들은 그저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성별과 나이대도 다양했다. 어린 학생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가 다양하게 섞여 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각성자다.
각성자의 그 능력이란 건 육체적 능력만을 뜻하진 않는다는 걸 난 이미 알고 있다.
누군가는 생각을 읽었고 또 바닥에서 이미 숨이 끊어진 것 같은 흉측한 얼굴의 두 각성자는 감별 능력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 이들은 각자 또 어떤 각성 능력을 갖추고 있을까?
그 능력이 이런 혼돈의 세상에서 인간에게 어떤 방식으로 쓰였으며 또 쓰일 수 있을까?
내가 지금 괜한 오지랖 상태인 건가?
수많은 사람이 아직 그 생명의 미련을 놓아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의식은 없는 것 같아도 그들은 힘겹게 버티고 있을 거다. 이들은 또 누군가의 가족이고 친구며 지인일 테지
우리가 이대로 떠나면 이들은 필시 죽을 거다.
그거 하나 때문에 나는 겨우 정신을 조금 차리고 있는 성희와 유민이를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아직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끄으"
그때 철문 옆에 쓰러져 있던 한 여성이 신음을 흘렸다. 코트의 사내가 철문 위에서 떨어트렸던 그 사람이다.
코트를 질책이 섞인 의문의 눈빛으로 노려보자 그는 내 시선을 애써 피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오늘 계속 꼬이네!"
그의 표정을 보니 뭔가 드는 생각이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 저 여자분 능력자 아닌 거"
그는 대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난 그가 뭔가 고민 중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다.
그의 손에는 언제 꺼내서 마셨는지 뚜껑이 없는 박카스 병이 들려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일어났다.
"이제 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녹색의 코르카 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좀 전과 완전히 달라 보였다.
"그러시던가"
그가 약물을 마시든 말든 그것도 내가 알 바는 아니다. 우리만 건드리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그는 밖으로 향하지 않고 침대들이 있는 큰 방 안쪽 구석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디가?"
내가 물었지만, 그는 대답 없이 안쪽 벽면에 있는 문을 만지작거렸다. 두꺼운 자물쇠로 잠겨있는 철문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갈 순 없지"
그는 맨손으로 그 두꺼운 금속의 자물쇠를 아주 쉽게 뜯어냈다. 약물의 위력이었다.
'저기가 약물 창고?'
나도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그가 사라진 창고의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예상대로 창고 안에는 수많은 박카스 병이 있었다. 혼자서 다 들고 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그거 다 가져가게?"
내 질문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그런데 그때였다. 초록의 흐릿한 빛에 비친 그의 눈동자에 갑자기 죽음이 스쳤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의 가슴에 작은 손이 하나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과 얼굴과 맞은 편에 있는 나에게까지 많은 피가 튀었다.
그 작은 손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뚫린 그의 가슴 구멍에서는 피가 연신 울컥거리며 쏟아졌다.
그는 이미 숨이 끊어진 듯 그 자리에 바로 주저앉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잠시 움직임이 없던 그는 갑자기 극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격하게 몸을 움직이다 곧 잠잠해졌다.
난 갑자기 얼굴에 튄 그의 피를 닦으며 어두운 창고 안을 노려봤다.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학생?"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다. 고등학생 정도로 보였다.
그녀의 피 묻은 오른팔이 눈에 들어왔다. 저 가냘픈 팔과 작은 손으로 코트의 사내 몸을 뚫어버리다니
그녀는 공포스러운 작은 손을 들어 올리며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진정해"
내가 말을 걸어봤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살기가 가득했다.
"악마들···."
그녀가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시간은 나에게만 다시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난 작지만 섬뜩한 손을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피하며 그녀의 다리를 걸었다. 하지만 쉽게 넘어질 것 같던 가느다란 다리는 마치 단단한 철 기둥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넘어질 뻔했다.
'어?'
나에게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몸과 달리 그녀의 눈은 이질적으로 나의 움직임을 전혀 놓치지 않고 있었다.
각성 상태인 내 움직임을 저 섬뜩한 눈으로 전부 따라오는 걸 보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오히려 그녀의 철 기둥 같은 무게감의 얇은 다리가 내 발을 걸었다. 난 그대로 넘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난 넘어진 상태에서 급히 몸을 반대로 돌렸다. 그때 내 목을 향해 다가오는 그녀의 작은 손이 보였다. 난 검으로 그녀의 손을 겨우 쳐내고 옆으로 굴렀다.
바닥을 구르는 와중에 극심한 통증이 어깨까지 밀려왔다. 그녀의 손을 검으로 쳐내면서 전달된 그 엄청난 힘의 진동이 아직도 내 온몸을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놀라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다시 나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검을 휘두를 틈도 없이 간신히 옆으로 피하며 그녀에게 소리 질렀다.
"정신 차리라고! 난 아니야!"
내가 뭐가 아닐까? 내가 말하면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누구라고 해야 이 학생이 멈출까 고민하던 와중에 그냥 내 입에서 아무 말이나 튀어나온 거 같다.
난 누구며 또 누가 아닐까?
그녀에게 내 음성 따위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시간조차 느리게 보이지 않았다면 아마 저 작은 강철같은 손에 내 몸에 구멍이 여러 개는 났을 것 같았다.
난 계속 간신히 피하며 검을 휘둘렀지만 단단한 강철을 막대기로 때리는 듯한 느낌은 여전했다.
"악!"
그녀의 손만 계속 피하며 움직이다 뒤에 있는 침대를 보지 못하고 발이 걸려 넘어졌다. 그때 침대도 휘청이며 옆으로 쓰러졌고 그 바람에 침대에 누워있던 의식이 없는 여성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 내 눈에 작은 손이 다가오는 게 천천히 보였다. 난 급하게 옆으로 다시 피하려 했지만 쓰러진 철제 침대와 의식 없는 여성의 사이에 끼여 바로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침내 그 작은 손이 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다.
'아 이렇게 어이없이?'
생각지도 못한 전개다. 이 지하 공간 안에서 변수가 왜 이렇게 많을까? 예상치 못한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항상 위기는 내 상상을 더 벗어나고 있었다.
피가 아직 묻어있는 그 작은 손이 내 목덜미 앞까지 다가왔다. 그 순간 난 왼손으로 그녀의 가느다란 팔을 붙잡았다.
얇은 팔에서 차가운 죽음이 느껴졌다. 그녀의 손이 나에게 닿지 못하게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아 씨 이제 끝인가?
난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
갑자기 그녀의 팔이 내 손을 확 빠져나가는 느낌에 난 급히 눈을 떴다. 그러자 익숙한 맨들맨들한 머리가 보였다.
"형! 일어나요!"
유민이가 옆에 있던 침대를 치워내고 날 일으켜 세웠다. 좀전의 여고생은 유민이가 던져버렸는지 구석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바로 다시 일어나 우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
유민이의 음성이다.
"지영아!"
유민이는 저 여학생을 아는 것처럼 소리쳤다.
"아는 애야?"
유민이는 내 질문에 대답할 겨를이 없어 보였다.
"지영아! 나 유민이야!"
하지만 그 여고생은 여전히 눈을 까뒤집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난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우려고 허리를 숙였다. 그런데 그 짧은 틈에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내 눈에 그녀의 발이 보였다.
'벌써?'
내 손이 바닥의 검에 닿기도 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발이 사라졌다. 난 급하게 검을 주워 들고 일어나 전방을 살폈다.
그때 내 눈앞에 서있는 건 성희였다. 그녀는 한 손에 여고생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다른 팔로는 그녀의 몸을 꽉 잡고 있었다.
뒤에서 그렇게 몸을 잡힌 여고생은 버둥거리며 무시무시한 작은 손으로 성희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자 입으로 이상한 괴성을 질러댔다.
"까아아아 끼아아아!"
사람이 아닌가?
그때 유민이가 그녀의 정면으로 다가가며 소리쳤다.
"지영아, 나야! 유민이! 인성 고등학교 1학년 2반 유민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우리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며 괴성을 멈추지 않았다.
"반장! 정신 차리라고!"
쩍!
유민이의 손이 여학생의 뺨을 치고 지나가는 게 보였다. 녀석이 힘 조절을 제대로 했을 텐데도 그 소리가 지하실 전체를 울렸다.
여학생은 그대로 고개가 앞으로 고꾸라지며 긴 머리가 축 늘어졌다.
'설마?'
"끄으···."
'휴! 다행이다.'
유민이도 순간 놀랐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여학생이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자 유민이의 긴장된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반···. 장···."
그녀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좀 전과는 전혀 달랐다. 평범한 여학생의 음성이다.
"그래 너는 반장! 나는 유민이라고!"
그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유민이와 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시선이 내 뒤편 어딘가로 옮겨지는 게 보였다.
'아 씨 또 뭔데'
내 등 뒤에서는 항상 내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이거 뒤통수에 눈을 달고 다닐 수도 없고
"엄···. 마···?"
그때 여고생의 입에서 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난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까 침대가 넘어지면서 바닥에 떨어진 여성이 아직 그대로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있었다.
난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를 살폈다. 숨은 붙어있었지만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엄마아아아!"
갑자기 여고생이 심하게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내가 성희에게 눈짓하자 그녀는 여고생을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바닥에 쓰러져있는 여성에게 달려가는 그 학생의 모습은 아까 죽이려고 달려들던 움직임과 전혀 달랐다. 그저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엄마! 일어나 엄마!"
쓰러져있는 여성을 흔들며 학생은 울부짖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바라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건물 밖에서 경적 소리가 다급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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