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J1. 인연
마녀의 충격적인 발언 때문에 저 졸개 놈의 존재를 잊었다.
"성희야 먼저 아파트에 가 있어, 할아버지랑 나라도 타세요."
"왜?"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놈이랑 대화만 좀 하고 갈게"
그녀는 여전히 걱정되는 듯 날 잠시 바라보더니 지붕에서 내려와 운전석에 앉았다.
버스에 올라 거실 테이블에 앉던 나라가 창문을 열며 말했다.
"같이 있을까?"
난 고개를 저으며 슬쩍 웃어 보였다. 그리고 버스에 묶여있던 쇠사슬을 풀었다.
다리 위는 물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다. 수중 괴물 말고는 괴물이 습격할 가능성이 제일 낮은 곳
나는 버스가 멀어지는 걸 확인한 후 난간에 걸쳐져 있는 쇠사슬을 끌어올렸다.
"끄으응"
당기는 나보다 끌려 올라오는 놈이 더 힘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난간에 쇠사슬을 다시 묶자 놈은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다···. 올려···. 줘···."
"싫은데?"
놈은 가늘게 뜬 눈으로 날 노려보더니 다시 애처로운 눈빛을 연기하며 애원했다.
안전한 높이는 아니다. 마녀도 이 정도 높이에서 몸이 반토막 났다.
하지만 모든 수중 괴물이 이 높이까지 튀어 오를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다시 그 정도의 점프력을 가진 놈이 다가오면 놈도 무사하진 못할 거다.
난 놈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서 말했다.
"아는 거 다 말해"
"뭐···. 뭘?"
"너도 그 마시울인가 하는 파란 머리 본 적 있나?"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마녀랑은 어떻게 알고 여기 온 거야? 저 강도단 무리는 또 뭐고?"
놈은 고개를 돌려 거칠게 흐르는 하천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의료원 앞에서 만났어, 미친 할망구 무리"
난 말 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난 의료원 근처 모텔에 숨어지내고 있었거든, 그런데 놈들이 사람들을 모으더라고"
"시끄러웠을 텐데 괴물은?"
"그게 희한하게 놈들 나타나기 얼마 전부터 괴물이 안 보이더라고"
놈의 표정에서 그다지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놈들을 어떻게 믿고 나왔지?"
놈은 다시 한숨을 길게 쉬더니 대답했다.
"먹을 거로 꾀더라고, 며칠 동안 굶었거든."
그건 이해할 수 있었다.
"놈들에 대해선 더 아는 건?"
"잡일만 시키고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안 해줬어···. 총도 안 주고 시발! 애들 지키라고···."
난 녀석의 떨리는 눈썹을 놓치지 않았다. 놈은 자신도 피해자라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근데 마녀···. 아니 마귀할멈이 뭔가 할 말이 있는 거 같던데?"
녀석은 내 시선을 피하며 할 말을 찾는 듯 보였다.
퀘에에에!
그때 수룡 몇 마리가 수면으로 머리를 내밀고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 할 말 없으면 간다."
나는 바로 아파트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놈은 몸을 버둥거리더니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 그게···. 의료원에서!"
난 가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만 살짝 뒤로 돌렸다.
"애들 어쩌고 하는 얘길 들었어."
난 다시 놈에게 빠르게 돌아가 머리채를 틀어쥐었다.
"제대로 말해"
"끄윽···.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애들을 보냈다고···."
"어디로?"
"바···. 방벽···."
"뭐? 다른 얘기는 더 없어?"
놈은 고개를 저었다. 놈도 그저 우연히 들은 거 같다. 그게 무슨 얘기인지도 몰랐을 거다.
난 놈의 머리채를 다시 내려놓고 일어서서 쇠사슬을 잡고 끌어올렸다.
"으허"
거친 물살의 하천에는 수룡이 더 모이고 있었다. 살짝 내려다보니 놈들은 한참을 굶주린 것 같았다.
사내를 다리 위로 끌어올리자 그는 바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보···. 보내줘···."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나는 난간에 묶어놓은 쇠사슬의 매듭을 풀었다.
"고···. 고마워"
"근데 그건 내가 결정할 게 아니라서 말이지"
나는 풀어놓은 쇠사슬을 한 번만 난간에 다시 감고 아까 아파트에서 챙겼던 자물쇠를 꺼내서 잠갔다. 비밀번호 자물쇠다.
"뭐···. 뭐야!"
난 다시 아파트 방향으로 걸었다. 놈에게 다른 도구가 없어 두꺼운 쇠사슬이나 자물쇠, 혹은 다리 난간을 부수긴 힘들 거다.
다리 위로 올려놨으니 수룡에게 먹히진 않겠지, 그저 공포스러운 밤을 보내면 그만이다.
"내일 보자고"
녀석의 멀어지는 욕지거리를 무시하고 나는 다시 버스가 세워져 있는 아파트 앞으로 걸어갔다.
나라가 버스 옆에 서서 주변을 살피다 날 발견하고 물었다.
"그놈은?"
"다리에 잠가뒀어, 아까 8층에 자물쇠가 있더라고"
나라는 피식 웃으며 더 묻지 않았다.
"애들이랑 엄마들은?"
그녀는 아파트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성희랑 같이 올라갔어. 18층에 우선 머문다고 하네. 아무래도 높은 곳이 났겠지"
난 버스 창문 안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좀 어떠셔?"
나라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조금씩 안 좋아지시는 것 같아. 일부러 괜찮은 척 말이 많아지는 게 안쓰럽네"
그때 성희가 공동현관에서 걸어 나오는 게 보여 내가 말했다.
"사람들 돌보느라 고생했다."
"그놈은?"
"좀 더 물어보다 묶어놨어, 그보다···. 성운이네가 그 의료원에 있었던 거 같아"
"뭐?"
난 놈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줬다.
"그 마귀할멈 죽기 전에 이야길 더 들었어야 했는데···."
성희는 안타까움과 분노의 표정을 동시에 지으며 멀리 다리 쪽을 바라봤다.
"가보고 싶어"
난 그녀에게 말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그녀는 말을 얼버무리다 내 표정을 보고는 말을 멈췄다.
"늦었으니 내일 가자"
난 당장 혼자서라도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너무 피곤했다. 요즘은 정말 하루하루가 마치 며칠이 지난 것 같이 느껴졌다.
"너 밥도 못 먹었잖아."
성희가 내 손을 잡고 버스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 순간 뒤에 서 있던 나라와 눈이 마주쳤다.
난 거실 테이블에 앉아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꺼냈다.
"알코올 중독되겠어."
성희가 인덕션 전원을 올리며 말했다. 나라는 욕실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샤워기 트는 소리가 들렸다.
성희는 채소와 소시지를 볶으며 전자레인지에 즉석밥을 돌렸다.
"다리에 묶어놓은 그놈 말이야."
"응?"
"올라간 엄마들이 다른 얘긴 없었어? 그놈이 무슨 짓을 했다던가"
성희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접시와 즉석밥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놈 말고, 총 들었던 놈이···."
그녀에게서 졸개 놈들이 저질렀던 만행을 들었다. 다리 위에 있던 저놈은 가담하진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말린 것도 아니었지만
난 창밖을 바라보며 맥주를 들이켰다. 쌀쌀해진 날씨에 몸이 얼어 있었는지 차가운 맥주가 속으로 들어가니 한기가 온몸에 돌았다.
그런데 버스 안은 따뜻했다. 자동 온도 조절 장치라도 있는 듯 알아서 난방되는 것 같았다.
'난방 스위치가 따로 있었던가?'
일어서서 살필 기운은 없었다. 그때 욕실 문이 열리더니 하얀 수증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목욕가운을 걸친 나라가 젖은 머리를 털며 내 옆에 앉았다.
"그건 어디서 구했데?"
"뭐? 아, 이거?"
그녀는 욕실 가운을 펄럭이며 씩 웃었다. 그 바람에 비누 냄새가 거실에 가득해졌다.
"아까 4층에서 봤었거든, 좀 전에 다시 뛰어가서 가져다 놨지, 세 벌이야 너도 이따 써"
그녀가 머리를 털자 짧은 머리카락에서 튄 물기가 테이블로 떨어졌다.
"밥 위에 튄다."
내가 접시를 옆으로 치우며 투덜거리자 그녀는 일어서서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무슨 하숙집 같다."
성희는 별말 없이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냈다.
"소맥?"
내가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나도 제대로 못 먹었어."
그때 에어프라이어에서 종료 알림음이 들렸다.
"뭐 더 했나 봐?"
그녀는 접시에 고기를 꺼내 담고 테이블에 내려놨다.
"오! 삼겹살!"
질려서 한동안 잘 먹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은 허기가 져서 그런지 군침이 넘어갔다.
소맥을 두 잔 말아서 성희에게 건네주고 한 잔을 드는데 나라가 편한 옷차림으로 컵을 하나 꺼내와서 내 옆에 앉았다.
내가 잔에 소맥을 말아주자마자 그녀는 바로 원샷으로 전부 들이켰다.
나와 성희는 처음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놀라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는 한 손으로 입가에 묻은 맥주 거품을 닦으며 말했다.
"고마웠어, 그동안"
잠시 버스 안에 정적이 흘렀다.
"쿨럭, 먼소리여"
할아버지는 눈만 감고 누워 계셨던 건지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나라는 맥주잔에 소주만 반쯤 따르고는 다시 전부 들이켰다.
"태백시로 다시 갈 수도 없고, 사실 강릉으로도 가고 싶지 않았어···."
그녀의 말에 성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어디 가려고?"
나라는 성희와 날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있을까 봐. 아파트에···."
우리는 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할아버지가 침대에서 걸어 나와 짧은 기침을 여러 번 하며 테이블 자리에 앉았다.
"쿨럭, 여기 사람들이 걱정되냐?"
나라의 얼굴에서는 그동안 봤던 살벌하고 차가운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얼굴에 홍조가 올라와 있었고 눈도 살짝 촉촉했다.
우리는 같이 지내면서 많은 일을 겪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너무나 강렬한 경험이라 한동안 잊을 수도 없을 것 같다.
그새 정이 든 걸까?
그녀도 버스에 머무는 게 더 생존 확률이 높은 걸 당연히 알고 있을 거다. 하지만 그녀가 버스를 떠나려고 하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그녀도 뭔가 살아갈 이유를 찾으려 하는 건 아닐까?
우리가 모두 여기서 떠나고 나면 남은 아이들과 엄마들의 미래는 여느 생존자들과 다를 바 없이 암울하다.
더는 수중 괴물에게 제물을 바치지도 못할 거고 지상이건 공중이건 괴물은 들이닥칠 거다. 남은 식료품으로 잘 숨어있으면 당분간 버틸 수는 있겠지만 그게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각성자 나라가 같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또 강도 같은 놈들이 오더라도 쉽게 당하지 않을 수 있고 괴물이 들이닥치더라도 떼로 몰려오지만 않으면 버틸 수 있을 거다.
근데 문제는 식수와 식량이다. 근처에서 나라 혼자 수급해서 모아야 할 텐데 쉬운 일은 아니다.
"혼자 감당할 수 있겠어?"
내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자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때 태백시에서 널 만나지 못했다면"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날 죽었을 거야. 홍수로든 괴물로든"
난 대꾸하지 못했다. 성희도 할아버지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한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냉장고를 열어 소주 한 병을 더 꺼냈다. 할아버지는 일어나 찬장에서 잔을 가져왔다.
모두의 잔이 채워지고 또 비워졌다.
나는 나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성희가 날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짧은 머리에 말라서 인상이 날카로워 보이긴 했지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평범한 세상에서는 내가 말도 붙이지 못할 만큼 무서운 인상이긴 했지만, 또 우리는 어떤 우연한 인연으로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난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 성희에게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쿨럭"
할아버지도 기침만 연이어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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