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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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문자를 보고 있으면서도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끄으"
휴대폰을 쥔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내 깊은 마음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수고했다.>
할아버지가 보내신 문자는 아주 간단하게 성의 없이 단 네 글자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마치 옆에서 허드렛일을 거들어 드리고 듣는 가벼운 인사말 같았다.
예전과 똑같이 아무런 설명도 느낌도 의미도 없는 말이다.
'스팸인가?'
나는 보낸 사람을 다시 확인했다. 스팸이나 사기 따위도 아니다.
"하아"
나는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잠시 주변을 살폈다.
'근처에서 보고 계신가? 내 반응을?'
나는 컨트롤 패널로 가서 사방의 조명을 전부 켰다.
'이렇게 어두웠나?'
레벨업 버스에 익숙해서인지 지금의 외부 조명 빛은 노란빛이 돌며 너무 어두웠다.
조명이 비친 창고 안에는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나는 다시 운전석에 앉아 천천히 버스를 몰고 창고 밖으로 향했다.
다 부서져 가는 평상 근처에 버스를 세우고 시동은 끄지 않은 채 사이드 브레이크만 걸어놓고 거실 테이블 자리에 앉았다.
'혹시 모르니 배터리 충전은 시켜놓고'
난 버스 옆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때처럼 눈앞에 평상이 보였다.
멍!
'어라?'
난 버스 밖으로 나가 대문을 열었다.
'으헉!'
내가 문을 열자, 강아지 한 마리가 나에게 안겼다. 그때와 같은 지독한 냄새다.
하지만 너무 반가웠다. 너도 그대로구나!
끼이잉 낑
난 녀석을 안고 평상에 내려놓았다. 내가 손짓하니 나에게 더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때 그 녀석이다. 밥도 한 입 먹지 못하고 거대 거미에게 물려간 그 강아지
그때처럼 땟국물이 온몸에 가득했다. 원래 흰색이었을 것 같은 털은 회색과 검은색으로 변해버렸고 놈의 건강 상태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들개가 많다더니'
녀석은 한동안 제대로 못 먹었는지 계속 낑낑거렸다.
"어쩌냐, 오늘은 삼겹살도 소시지도 없는데"
난 녀석을 바라보다 안아 들고 버스로 들어갔다.
"없으면 사 먹지 뭐"
그런데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난 욕실 문을 열고 물을 살짝 틀어봤다.
졸졸
세면대 겸 샤워기에서 물이 나온다. 아까 틀어놓은 물 펌프가 돌아가는 모양이다. 밖의 컨트롤 패널을 살피니 청수 탱크 게이지가 있었다. 가득하다.
난 녀석을 욕실에 넣어놓고 비누 거품을 내어 씻겼다. 먹을 거 하나 없던 버스에 커다란 비누 하나는 놓여있었다.
'휴'
녀석을 다 씻기고 뽀송한 수건으로 잘 닦아주고 나니 완전히 다른 개처럼 보였다. 네가 이런 모습이었구나!
"이제 밥 먹으러 가자"
난 버스 밖으로 나가 대문을 양쪽으로 완전히 활짝 열었다.
버스로 대문을 빠져나온 후 사이드미러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내려 대문을 닫았다. 가져갈 건 없어도 대문을 열어놓고 다니기는 싫었다.
어두운 시골길을 천천히 달리고 있으니 그때 추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녀와 함께 가던 길이다. 힘들고 두려워도 혼자는 아니었던 길
멍!
그때 강아지가 조수석에 올라와 앉더니 얌전히 창밖을 바라봤다.
'지금은 네가 있구나!'
유기견치고는 그래도 마음의 상처는 덜해 보인다. 멘탈이 강한 녀석이거나
버스가 읍내로 들어서자, 아까와는 사뭇 다르게 거리는 한적했다. 저녁이라 그런지 평소 같은 모습이다.
난 근처 협동조합 마트로 버스를 몰았다.
'어?'
문을 닫았다. 오늘 닫는 날인가?
난 다시 버스를 돌려 근처 정육점을 찾았다. 10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근처의 정육점을 찾아냈으나 거기도 문을 닫았다.
난 버스를 세우고 내려 가게 안을 살폈다.
'정말 아무도 없네'
불이 완전히 꺼져있다. 그런데 옆 가게의 문이 열리더니 중년의 사내가 나오며 말했다.
"육씨네 일이 있어서 며칠 못 나와, 너 한씨네 손주 맞지?"
근처를 배회하던 날 유심히 지켜보신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그는 양계장 집 주인 양씨 아저씨다.
"아! 안녕하세요! 삼겹살 좀 사려고 했더니 마트도 안 열고"
그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저 마트 문 닫았어, 동네에 사람이 없어 사람이···. 근데 한동안 안 보이더니 오랜만이네?"
난 또 간단하게 귀농 이야기를 한 후 다시 버스에 올랐다.
"오늘 삼겹살은 못 먹겠다. 편의점이나 가자"
난 다시 태형이 편의점으로 가려고 핸들을 꺾으려 했다. 그런데 버스 건너편 작은 슈퍼에서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나오는 게 보였다.
"오빠 이건 내꺼야!"
"알았어, 너 많이 먹어"
"하나 더 사자 다시 들어가"
"괜찮아요. 할아버지, 엄마 올 때 됐어요."
나는 멍하니 그들을 바라봤다. 성운이와 작은 성희다. 그리고 저 노인은 그때 아이들을 마지막까지 돌보다 상처를 입고 괴물로 변이한 성운이 할아버지다.
"저렇게 귀여웠었지!"
난 그들을 바라보며 반가운 마음에 버스에서 내려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수상한 사내가 다가오자, 세 명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노인은 그때와 비슷한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누구신지?"
"아, 한씨네 정비소 손주예요."
그는 잠시 날 바라보더니 여전히 미심쩍은 음성으로 말했다.
"한씨···. 정비소라···."
그때 옆에 서서 날 빤히 바라보던 작은 성희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 어디서 본 거 가타요"
'뭐? 설마 날 기억하는 건가?'
"티비에서 봤어요. 웃기는 사람 있잖아요."
'아니었다.'
"아! 문 닫은 그 수리점!"
노인은 그제야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민희 누나 아이들이죠? 저 누나 동생 친구예요. 희성이"
그렇게 간략하게 내 소개가 끝나고 우리는 어색하게 서 있었다. 이들은 터미널에 도착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때 시외버스가 하나 들어왔다. 보니까 태백시에서 출발한 버스다.
"엄마다!"
작은 성희가 버스를 따라 뛰어나가자, 성운이가 급하게 말렸다.
"위험하다니까! 차 오는데!"
그리고 노인은 나에게 손짓한 후 아이들을 따라 터미널 하차장으로 걸어갔다.
난 그 모습을 잠시 그렇게 바라봤다. 곧 민희 누나가 내리겠지, 그녀도 아이들과 이렇게 같이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다행이다.
그런데 작은 성희의 울음소리가 갑자기 온 동네에 쩌렁쩌렁 울렸다. 가까이 다가가니 노인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래 내일 버스로 와, 아이들은 걱정하지 말고···. 그래그래···. 끊어"
민희 누나는 무슨 사정인지 버스를 타지 못한 것 같다. 아이들을 만나러 오늘 오기로 한 약속을 못 지켰다. 그리고 이 버스가 오늘 막차인 모양이다.
난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누나가 못 오나 보네요?"
노인은 여전히 훌쩍이는 작은 성희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자주 그래, 먹고 사는 게 다 그렇지···. 오늘 데리고 바로 집으로 간다고 짐도 다 싸놨는데···. 이 버스가 좀 있다가 다시 태백시로 돌아가거든, 내가 데려다주고 싶어도 나도 새벽 일을 나가야 해서···."
"제가 데려다줄게요."
갑자기 내가 말을 꺼내자, 노인이 흠칫 놀란 듯 날 바라봤다. 고마움보다는 여전히 미심쩍은 눈빛이 강했다.
아무리 아는 사람이라고 했어도 처음 보는 사내가 아이들을 데려간다고 하면 나라도 의심할 거다.
"누나 전화번호 좀···."
나는 노인에게 번호를 받아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렸을 때 희성이네 집에서 같이 자주 놀았던 기억이 있어서 그녀도 날 잘 기억하고 있었다. 공통된 기억이 많은 탓에 그녀는 나를 믿었다. 그리고 연신 고맙다는 인사에 머쓱해졌다.
사실 아이들과 잠시라도 그때처럼 버스를 같이 타고 싶었다. 그리고 그 빌라촌 사람들도 궁금했고
내 전화기를 받아 들고 누나에게 확인까지 하고 나서야 노인은 의심의 눈초리를 풀었다.
"고맙네, 여기서 외삼촌 친구를 만나는 것도 신기하네"
그런데 아이들은 여전히 어색한 표정으로 날 빤히 바라보고 있다.
난 녀석들에게 뒤에 주차된 버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캠핑카야"
그제야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창문 안에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밖을 바라보고 있던 하얀 강아지를 발견한 작은 성희가 갑자기 뛰어나갔다.
"와 귀여워!"
"차길 위험하다니까!"
성운이가 뒤따라갔고 노인은 옆의 짐가방을 들고 그들을 따라 길을 건넜다.
나는 아이들을 버스에 태우고 가방을 노인에게 받아 실었다.
"의심해서 미안하네, 이해해 주게"
"아닙니다.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아이들 안전하게 잘 데려다주겠습니다."
"고맙네, 조심해서 가고"
아이들에게 안전띠를 채워주고 난 운전석에 앉아 다시 버스를 출발시켰다. 우선 태형이 편의점부터 들러서 아이스크림과 개 사료와 작은 플라스틱 그릇을 샀다. 태형이는 교대로 퇴근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맛있어요!"
작은 성희가 테이블에 놓인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며 그때와 똑같은 탄성을 질렀다.
난 그릇 두 개에 나누어 생수와 사료를 부어줬다. 그러자 녀석은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난 녀석이 다 먹을 때까지 잠시 기다려 준 후 다시 천천히 출발했다.
읍내를 벗어나 국도로 접어드니 길은 점점 어두워졌고 인적도 차량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때와 비슷한걸'
강원도 시골 밤길의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마치 그때로 돌아간 느낌이다.
세상이 멸망하고 나서야 내가 풍족해졌던 그 아이러니
설마 내가 그때를 그리워하는 건가? 갑자기 어쭙잖은 죄책감마저 들었다.
성운이는 그때처럼 별말이 없다. 녀석은 세상이 멸망해서 말수가 적은 게 아니었다.
'그래도 가족과 함께 나이를 먹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폭포수 아래에서 녀석의 허망한 세월 흔적을 바라보던 생각이 떠올라 잠시 몸서리쳤다.
정말 다행이다.
가슴이 조금씩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달리는데 얼마 후 전방에 터널이 보였다. 저기서 인간형들 때문에 버스가 아작날 뻔했었지
나는 아무런 장애물 없이 깨끗한 터널을 부드럽고 안전하게 지났다. 평범한 터널의 모습 그대로다.
'왜 식은땀이'
한참 더 달리다 보니 태백시 초입에 들어섰다. 그때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단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행복마트>
마트다. 그리고 아직 문을 닫지 않았다. 난 바로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그때 하차장에서 양씨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 나랑 얘기하고 바로 출발한 모양이다. 그 옆에는 태형이 계란판을 분주하게 옮기고 있었다.
'저들을 여기서 다시 만났었지'
나는 아이들과 같이 내려 마트에서 평범하게 장을 봤다. 강아지는 버스에서 내릴 생각이 없어 보여 차에 그대로 뒀다.
장바구니에 아이들 과자와 음료, 삼겹살과 상추 등을 담았다. 그리고 소주와 맥주도 잊지 않았다.
'오랜만에 돈 주고 사 먹는군.'
계산을 마치고 나오려는데 옆에서 누가 다가온다. 순간 스산한 기운에 난 흠칫했다.
'이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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