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J1. 응급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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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해!"
나도 모르게 창밖의 놈에게 소리를 질렀다. 녀석이 발버둥 치다 버스 방향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괴물이라면 터질 거다.
쿵!
그리고 괴물이라면 저 소리도 나지 않았을 거다.
"응?"
큰 소리와 함께 버스에서 묵직한 진동이 느껴졌다.
괴물과의 충돌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소리와 충격이다.
"안 터졌어."
성희가 창밖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놈은 버스의 전면 우측에 부딪히고는 버스 옆쪽으로 튕겨 버둥거리고 있었다.
나는 액정을 다시 확인했다. 접촉 파괴는 ON 상태였으며 괴물 탐지는 여전히 0이다.
"일어나는데?"
성희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놈이 거대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상처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붉은 피야!"
나라의 음성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어떤 사연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놈은 다른 괴물과는 다른 놈이다.
"저 몸으로 움직일 수 있을까?"
성희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우리가 놈을 위해 뭘 해줄 수 있을까? 상처를 꿰매줄 도구도 없을뿐더러 할 줄 아는 사람도 없다.
"아, 가루약이 있었던 거 같은데"
성희가 벌떡 일어서더니 창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 게 있다고?"
약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품이면 저렇게 큰 상처에 도움이 될 거 같지는 않았다.
"찾았다!"
성희의 손에 들려있는 건 분말형 상처 치료제라고 쓰여있는 약병이었다.
"인간용인데 녀석한테 효과가 있을까?"
"뭐라도 해봐야지, 내버려 두면 죽게 될 텐데"
성희가 바로 옆문으로 나가려 하는데 누군가 그의 팔을 잡았다.
"콜록, 벌어진 상처에 그걸 바로 뿌린다고?"
"뭐라고 해보려고요"
성희와 할아버지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나라가 입을 열었다.
"본드 있던데?"
갑자기 버스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뭐라고?"
침묵을 참지 못하고 내가 말하자 나라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사람 상처에 쓰는 의료용 본드도 있다고 들었어, 저놈 상처 보니까 큰 혈관이 터지진 않은 거 같고 벌어진 거만 닫으면 될 거 같은데, 괴물이 공업용 본드 썼다고 뭐라 하진 않을 테고"
그때 성희가 서랍을 열더니 본드를 꺼냈다.
"붕대랑 반창고는 아끼자"
그녀가 다른 서랍을 열려 하자 내가 말렸다. 놈이 딱하긴 하지만 우리의 유한한 자원은 아껴야 한다. 무한 버스라고 해도 의약품은 예외다. 우리가 쓸 일은 거의 없겠지만 또 모를 일이다.
성희와 나라가 버스에서 내려 놈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을 발견한 놈이 멀어지려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나라가 놈의 머리에 손을 얻었다.
"가만히 있어라."
버스 안에서 본 그녀의 모습은 마치 동물과 교감을 나누는 사람처럼 보였다.
"죽기 전에"
하지만 교감이 아니라 협박이었다. 그런데 그게 먹힌 듯 놈의 버둥거리던 움직임이 멈췄다.
"내가 상처 누를게."
큰 출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혈이 먼저인 듯 보였다. 나라는 비슷한 경험이 있는지 능숙하게 상처 부위를 눌렀다.
성희가 머뭇거리자 나라가 본드를 받아 들고 말했다.
"내가 할게, 네가 눌러"
성희는 안도의 표정을 짓더니 출혈 부위를 강하게 압박했다. 그때 나라가 벌어진 상처에 본드를 바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괴물이라도 공업용 본드를 쓰다니'
버스에 할아버지만 두고 내릴 수가 없어 안에서 지켜보기만 하는데도 눈앞의 광경은 정말 기이했다.
그녀들은 본드를 바른 상처 부위를 강하게 밀어서 붙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녀석의 괴성이 터널 안에서 묵직하게 울렸다. 그 초저음의 진동에 가까스로 붙인 상처가 조금씩 벌어졌다.
퍽!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나라의 손찌검에 놈의 괴성이 멈췄다. 조금씩 꿈틀거리던 놈의 움직임도 멈춘 거 같다.
"주···. 죽은 거 아냐?"
내가 놀라 말하자 나라가 고개를 들어 버스 안의 날 바라봤다.
난 시선을 피했다.
"쿨럭, 상처 붙으면 가루 뿌려도 된다."
할아버지가 옆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마침 성희가 약병의 뚜껑을 열고 있었다.
하얀 가루가 상처에 뿌려지자 놈이 따가운 듯 살짝 경련을 일으켰다.
나라의 손찌검에 기절까진 하지 않았는지 놈의 검은 눈은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녀석의 상처를 누르고 있었을까?
"이제 놓자"
나라가 놈의 피부를 쓰다듬으며 일어섰다. 성희도 상처 부위를 확인하며 일어났다. 그녀들의 손은 하얀 가루와 본드 그리고 녀석의 피가 뒤섞여 엉망이었다.
성희와 나라는 버스로 들어와 손을 씻었다. 녀석은 한동안 움직임이 없이 편안하게 누워서 숨만 쉬고 있었다.
기다랗게 생긴 거대한 덩치가 버스 옆에 누워서 숨을 쉬고 있으니 무슨 사파리 투어를 온 거 같다.
"이제 어쩌지?"
성희가 조수석에 앉더니 말한다.
"이제 서로 갈 길 가야지"
내 말에 다들 동의하는 듯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경험이다. 이런 죽음 직전의 상황을 그동안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우리는 과하게 놈에게 감정을 이입했다. 왜 그랬을까?
놈의 검은 눈에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있었을까?
모든 생물은 저마다의 아우라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운명은 그 아우라의 우연으로 흘러간다.
우리는 마치 뭐에 홀린 듯 놈에게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 그게 공업용 본드로 상처를 붙여버리는 엽기적인 행동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무슨 지구의 동물을 대표해서 나타난 놈 같았단 말이지'
난 이상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한 채 옆에서 쉬고 있는 놈을 바라보며 악셀에 발을 올렸다.
"잘 살아남아라."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데 놈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어라?"
사실 우리는 모두 놈이 버스로 달려드는 줄 알고 살짝 움찔했다.
놈은 접촉 파괴가 안 되는 놈이고 놈의 충격은 그대로 버스에 전해진다. 생각해보면 놈이 저 덩치로 버스를 밀어버리면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놈이 벌떡 일어나 뛰어가는 곳은 우리 쪽이 아니었다. 전방에 멀리 보이는 터널의 출구 쪽이다.
"뭐가 있나?"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버스의 탐지 숫자였다.
[ 0 < 0 < 16 ]
탐지 숫자가 바뀌기 시작했다.
[ 0 < 2 < 14 ]
난 악셀을 밟아 버스를 출발시켰다. 그런데 좀 전까지 거의 죽을뻔해 보였던 놈의 움직임은 정말 빨랐다.
쓰러져있던 게, 마치 연기였던 것처럼 힘차게 뛰어가고 있었다.
그때 멀리 출구 근처에서 여러 형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꺽다리다. 놈들은 이미 검은 눈을 알고 있는 듯 포위 진형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 0 < 12 < 4 ]
검은 눈이 위험하다.
난 버스 운전대를 성희에게 넘기고 활을 들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지붕에 오르자마자 활을 꺽다리에게 겨누려고 했으나 검은 눈의 거대한 덩치에 가려 제대로 조준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놈은 화살에 맞아도 별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놈에게 맞아버리면 소중한 화살 한 발의 기회가 날아간다.
꺽다리를 줄이지 못하면 저 검은 눈은 아직 성치 않은 몸으로 놈들에게 난자당할 거다.
난 간신히 꺽다리 한 놈을 겨누고 화살을 발사했다.
어두운 터널 속에서 화살은 지구의 물리법칙을 벗어난 움직임을 보이며 내가 조준한 꺽다리의 뒤통수에 정통으로 적중했다.
뀌익!
놈의 짧은 괴성이 들려오더니 이내 머리부터 터져나가 초록의 피떡으로 변했다.
뀌이이이이
다른 꺽다리 놈들이 나의 존재를 인지한 듯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놈들은 검은 눈이 출구 앞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볼 수 없는 곳, 검은 눈의 덩치 뒤로 숨어들었다.
그때 검은 눈이 꺽다리 한 마리를 입에 물었다.
검은 눈의 거대한 입에 물린 꺽다리가 특유의 시공간 움직임으로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그때 검은 눈의 괴성이 울려 퍼졌다.
우우우우웅!
초저음의 괴성이 들리기 시작하자마자 입에 물려있던 꺽다리의 머리가 그대로 터져나갔다.
뀌이이이이
하지만 다른 꺽다리들이 달려들어 날카로운 발톱으로 검은 눈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놈들의 몸은 검은 눈의 덩치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살점과 피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게 보였다.
그때 우리 버스가 검은 눈의 꼬리 앞에 당도했다.
난 바로 검을 손에 쥐고 지붕에서 버스 앞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때 나라도 옆문으로 뛰쳐나오는 게 보였다.
"성희는 안에 있어라."
난 소리치며 검은 눈의 몸통 왼쪽으로 뛰었다. 그때 나라가 오른쪽으로 뛰어가는 게 보였다.
뀌이이이이
출구 밖으로 나오자 꺽다리들에게 난자당하고 있는 검은 눈의 머리가 보였다. 머리에 달라붙어 마구 발톱을 휘두르는 꺽다리는 다섯 이었다.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화난 나라의 음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리고 두 마리의 꺽다리 머리가 몸통과 분리되었다. 나라의 손찌검에 정통으로 맞은 놈들이다.
나머지 세 놈이 나라를 향해 몸을 틀 때 내 검이 한 놈의 몸통을 둘로 갈랐다. 그리고 다시 나라의 손에 다른 한 놈이 바로 터져나갔다.
나머지 한 놈이 당황하는 사이 검은 눈이 얼굴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그놈을 입에 물고는 특유의 초저음으로 대가리를 터트렸다.
순식간에 다섯 놈의 꺽다리가 터져나갔고 한 놈을 제외한 다른 놈들은 코르카로 변해 버스로 날아갔다.
"딴 놈들 보여?"
난 나라에게 소리치며 주변을 살폈다. 버스에서 화살로 잡은 것까지 합치면 총 여섯 마리를 해치웠다. 열 마리가 남았을 텐데 시야에서 놈들이 보이지 않았다.
고사 2터널 밖은 바로 고가 도로다. 그리고 멀리 다른 터널의 입구도 보였다.
"온다!"
나라가 외쳤고 나도 이미 보고 있었다. 놈들은 고가 도로 아래에 숨어있었던 듯 도로 난간 양쪽에서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 명당 다섯 마리···. 못 잡을 건 아닌데'
조금 간당간당한 수치다. 상대가 못난이나 멧돼지면 열 마리도 가능한데 꺽다리는 움직임이 달라서 동시에 두 마리 이상도 힘든 경우가 많았다.
'시간 흐름이 그대로인 걸 보니 어렵지 않은가?'
목숨이 위험한 상황은 아닌 거 같다. 내 마음대로 느린 시간의 흐름을 발현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발현 후의 속도만 조절할 수 있을 뿐 발현은 아직 내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수련이 더 필요한데, 방법을 모르겠단 말이지'
그때 내 쪽으로 세 마리의 꺽다리가 번개같이 다가왔다. 익숙한 움직임이다.
우측의 나라도 자기 몫 이상은 해줄 수 있을 거다. 나는 한 번에 한 놈씩 놈들의 목과 몸통과 팔을 잘라냈다.
순식간에 세 마리의 꺽다리를 코르카로 바꾸고 있을 때 뒤쪽에서 섬뜩한 바람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은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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