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J1. 행복 마트
내가 검을 들어 올리고 사무실 쪽을 겨누자 태형이가 입을 열었다.
"사무실로 피한 사람들이야."
난 천천히 검을 내리고 문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중년의 아저씨와 아주머니, 할머니, 교복 입은 학생, 젊은 청년, 양복 사내, 그리고 마트 유니폼을 입은 여러 나이대의 아주머니들
아는 사람은 없었다. 태백시에 내가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양씨 아저씨는?"
태형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간밤에 괴물들의 무리에 휩쓸린 모양이다.
"달걀 납품하는 날이어서···. 내가 그 차 얻어타고 같이 왔는데···."
그는 길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저게 뭐야?"
사무실에서 나온 사람들이 버스의 문만 보이자 저마다 묻기 시작했다.
'젠장 이거 어떻게 설명한다?'
갑자기 많은 사람이 버스 문 주변으로 모여들며 저마다 한마디씩 하자 당혹스러웠다. 마치 괴물들에 둘러싸여 있는 느낌이랄까?
"이봐, 우리도 저기 들어가면 안 돼? 다 같이 살자고"
양복 입은 사내가 말했다. 가슴팍 이름표에 직책도 같이 나와 있었다. 마트 점장이다.
"학생, 저 문으로 들어가면 어디로 가는 거야? 우리도 좀 보내줘"
"이봐 젊은 양반, 같이 좀 살자"
그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아무리 지난 며칠간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을 계속 겪었다고 해도 이들의 반응은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나 큰 죽음의 공포에 지속해서 노출되다 보니 삶에 대한 간절함이 더 강해져서 그런가? 혹시 이 신기한 문이 그들에게 희망의 빛으로 보이는 건가?
그럼 난 뭐지? 노아? 이 버스는 방주?
그럴 수 없고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버스는 내 공간이다. 그리고 우리 식구의 공간이다. 내가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없다. 그저 할 수 있는 만큼만 도움이 되고 싶을 뿐이다.
이 도움도 솔직히 나의 멘탈을 위한 것이다. 내가 외면하지 않았다는, 내가 할 만큼은 했다는 그런 안도감? 혹은 스스로에 대한 합리화?
그런데 이들은 단체로 몰려오더니 저 문의 출입을 요구하고 있다. 처음에는 부탁하는 태도였지만 점점 언성이 높아지며 강압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물론 이해할 수 있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지, 목숨이 바람 앞에 등불인데 이런 신기한 문이 등장하면 어떻게든 안으로 피신하고 싶겠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거기까지
"아무도 못 들어옵니다."
갑자기 군중이 조용해졌다. 아주 잠깐
그리고 다시 웅성거림이 시작되더니 이내 고성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때 양복 사내가 난데없이 버스 문으로 뛰어갔다.
쿵!
그리고 그는 마치 단단한 유리 벽에 부딪힌 것처럼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뒤로 자빠져 쓰러졌다.
모두 그 광경을 눈이 휘둥그레진 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문은 아무나 못 들어옵니다."
아주 잠깐의 침묵을 깬 건 마트 유니폼을 입은 한 아주머니였다.
"그러면 누구만 들어가요? 총각이 열어주면 안 되나?"
난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이해가 안 되겠지만 저도 방법은 모릅니다."
내가 생각해도 설명이 이상했다. 하긴 절박한 저들에게 어떤 설명이 먹힐까? 그들은 점점 나를 혼자만 살겠다고 버티는 파렴치한으로 만들고 있었다.
뒤에 있던 마트 유니폼의 아주머니가 문으로 뛰어왔다. 양복의 사내처럼 막무가내로 들어가려고 하진 않았지만 문 안으로 들어가 보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난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쿵
아주머니의 머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혔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시도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다들 버스의 문으로 몰려들어 서로 먼저 진입을 시도해보려고 난장판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난 뒤로 조금 물러서서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않은 채 그 모습을 그냥 지켜봤다. 다들 직접 시도해봐야 포기할 거 같았다.
얼마간의 소동이 지난 후 그들은 버스 문 주변에 널브러져 앉아 있었다. 서로 밀치다가 얼굴에 상처를 입은 사람도 보였고 그사이에 싸웠는지 여전히 서로를 밀며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며칠 동안 여기서 버틴 거?"
난 그 모습을 바라보며 태형에게 물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며칠간 이런 사람들과 함께 마트 안에 있었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대다수 일반 사람의 모습인지는 모르겠다. 난 그저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면 얼마나 달랐을까?
"성희야 별일 없지?"
"어"
성희의 모습이 조수석 쪽으로 슬쩍 보였다. 하지만 그건 나만 볼 수 있었다.
"이거 캠핑카야?"
갑자기 태형이 물었다.
"응, 할아버지가 만드신 거"
태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카센타 할아버지? 정말 대단하시다. 그런데 왜 문만 보이는 거지?"
"나는 다 보여, 보이는 사람은 탈 수 있는 거 같아"
태형은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지만 그도 조금씩 이해를 포기하는 상태에 적응하고 있었다.
괜히 마트로 들어왔다가 이런 소동을 일으켜서 마음이 불편했다. 생각해보면 저들은 악당도 괴물도 아니다. 그저 살아남고 싶은 인간일 뿐이다.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음을 알고 있다.
내가 여기서 지금 뭘 할 수 있을까?
"입구부터 다시 막읍시다."
아까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고 뒤에서 보고만 있던 어떤 청년의 음성이다.
입구 막기 전에 버스부터 빼야겠다.
"이거 보이진 않겠지만 버스에요."
내가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필요한 거 조금만 챙기고 나갈게요."
난 버스에 들어가 예전에 사용했던 50리터 봉투를 꺼냈다. 이미 두 장이 겹쳐 있었다. 그리고 아까 진입할 때 봐두었던 곳으로 뛰어갔다.
티셔츠와 운동복 바지 여러 벌, 남녀 속옷 등을 넣었다. 그리고 칫솔도 챙겼다. 비누와 치약도 보이는 데로 넣었다.
나의 모습을 마치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멍하니 바라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묻기 시작했다.
"버스라고?"
"이게 어떻게 버스야?"
난 버스에 올라 들어왔던 곳으로 천천히 후진했다. 조심해서 움직였으나 버스 모서리에 진열대가 걸려 넘어졌다. 그리고 잡동사니가 버스에 조금 밀려서 튕겨 나갔다.
그 모습을 그대로 지켜보던 사람들은 투명한 버스의 움직임에 놀란 표정으로 입만 벌리고 있었다. 상식적이지 않은 일에 익숙해진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마트 정문으로 나올 때까지 탐지 램프는 들어오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이제 저들은 다시 마트의 입구를 봉쇄하고 지내던 방식으로 돌아갈 것이다.
다들 우리의 존재를 잊은 듯 급하게 부서진 유리문 쪽에 카트와 잡동사니를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부실해 보이는 방벽이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그거뿐인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난 버스에서 내려 잠시 그들을 도왔다. 태형이가 땀을 흘리며 슬쩍 날 바라봤다.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무렵, 방벽이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자 갑자기 심한 허기가 몰려왔다. 생각해보니 오늘 아침을 굶었다.
입구 앞에 앉아서 땀을 닦으며 쉬고 있는데 성희가 버스에서 내리더니 근처에 널브러져 있는 박스들을 찢어 바닥에 깔았다.
"탐지 램프는?"
"성운이가 보고 있어"
성희는 다시 버스로 들어가더니 일회용 접시에 삼겹살과 쇠고기를 잔뜩 담아서 나왔다. 그 뒤로 그녀를 따라 나온 작은 성희의 손에는 당근과 양파 그리고 사과가 들려있었다.
그렇게 마트 앞에 찢어진 박스가 넓게 깔리고 시골 동네잔치 하듯 음식이 바닥에 차려졌다.
"괴물 나타나면 어떡하지?"
다들 입구 밖에 있는 게 불안한 표정이었다.
"버스에 탐지기가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제가 소리칠게요."
다들 믿지 못하는 표정으로 그대로 서 있는데 중년의 아저씨가 마트 안에서 소주 한 상자와 종이컵을 들고나왔다. 소주 상자 위에는 큰 쌈장 통이 올려져 있었다.
"자! 일단 먹자! 마트 고기는 다 상해서 먹지도 못했는데!"
그가 먼저 자리에 앉더니 쌈장에 고기를 찍어 먹고 종이컵에 소주를 따랐다.
난 재빨리 아저씨 옆에서 잔을 들었다. 미지근한 소주가 종이컵으로 쏟아지자 알코올 냄새가 훅 올라왔다.
"아! 운전해야 하는데"
옆에 마트 아주머니가 앉으며 나무젓가락으로 삼겹살을 집으며 날 바라봤다.
"총각 음주운전 하면 안 돼"
멸망한 세계에서도 음주운전은 안 된다. 난 아쉬운 마음에 종이컵을 아주머니에게 넘겨드렸다.
"아깐 미안했어"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수다에 다른 사람들도 한둘씩 주변에 앉기 시작했다. 내가 나무젓가락을 나눠주자 민망한 표정으로 받아서 들더니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총각 미안혀"
마트 아주머니의 음성이다. 마트 점장도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구석에 앉아 고기를 집어 먹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버스의 열린 문을 힐끔거리며 미련을 버리지 못한 표정이었다.
"무슨 마법 같은 거예요? 아저씨는 능력자?"
교복 입은 여학생이 묻는다. 뭐라고 답해야 할까? 그래 마법 같은 일이긴 하다. 난 할 말이 없어 미소만 지었다.
"같이 먹어"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의 음성이다. 아까 교복 입은 학생이 모시고 나온 것 같다.
"전 괜찮아요. 부족하면 말씀하세요."
그런데 대충 고기양을 보니까 리필을 아주 많이 한 거 같은데? 코르카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 성희가 먼저 말했다.
"한 개밖에 안 떨어졌다."
오? 나쁘지 않은데? 역시 먹는 거로 쪼잔하게 굴면 안 된다. 고맙다 버스야, 고마워요. 할아버지
그들은 언제 두려움에 떨었는지도 모르게 마치 일상처럼 수다를 떨며 고기를 먹고 있었다. 어른들은 소주를 서로 나눠마시며 잠시나마 현실을 잊은 듯 그렇게 점점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나와 성희는 살짝 뒤로 빠져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괴물들에 당하지 않더라도 마트에 있는 음식들이 다 떨어지면? 물부터 떨어질 거다. 마트에 생수병이 쌓여있어도 인간의 물 소비량은 엄청나다.
물 부족, 음식 부족에 시달리며 결국 그들은 암울한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다른 어딘가에 숨어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결말도 이렇게 비슷하게 흘러가겠지.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아직도 모르겠다.
난 그때 문득 마트 입구 위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행복 마트>
적어도 지금 이 짧은 순간만큼은 그들은 소소하게 행복해 보였다.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까 혼자 뒤에서 보고만 있던 청년이 나에게 다가왔다.
이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재훈이라고 합니다. 고맙습니다."
젊은 청년치고는 너무 진중해 보였다. 옷차림도 깔끔했고 말투도 이십 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며 속삭였다.
"버스에 사다리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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