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사일런트 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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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에 오르니 습한 안개의 기운이 콧속으로 훅하고 들어왔다.
그리고 지붕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도 바뀐 게 없는데'
끼이이
'뭐지? 괴물인가?'
갑자기 내 머리 뒤쪽에서 하얀 생명체가 푸드덕거리며 앞쪽으로 날아갔다.
"갈매기? 어떻게?"
한 번 더 자세히 살펴봐도 정말 갈매기가 맞았다. 녀석은 멀리 날아가지 않고 블루건의 포신 위에 앉아서 그 날카로운 눈으로 날 노려보고 있다.
"내가 일부러 데려온 건 아니라고"
놈이 내 말을 알아들을 리 없겠지만 여기에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는 이상한 안도감에 말을 걸고 싶었다.
지붕에서 김씨 할아버지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진화 후에 아무도 올라온 적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저거 뭐야? 새?"
성희가 지붕에 올라오며 물었다.
"갈매기야"
"어···. 어떻게?"
우리가 있는 이곳이 원래 있었던 강릉 근처가 아니라면, 정말 태형이 말한 대로 우리가 다른 어떤 곳의 손님이라면 저놈도 우리 버스와 같이 온 거다.
"버스에 앉았다가 같이 딸려 온 모양인데"
여기가 어디인지, 어떻게 여기로 온 건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저 앞에 보이는 저 갈매기는 분명 우리의 지구에서 흔하게 보던 바로 그 새다.
여기가 우리가 있던 지구의 또 다른 어딘가라면 갈매기가 바다처럼 보이는 이곳에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좀 전에 목격한 이상한 수중 생명체의 존재로 봤을 때 우리는 지금 아예 다른 세계에 있을 확률이 높다.
"설마 그 붉은빛 기둥으로 떨어져서 넘어온 건가?"
나도 처음엔 그 생각을 했었다. 그 당시 이미 바다에는 수많은 붉은 빛기둥으로 오염 벌레들이 넘어오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빛기둥 너머로 사라지는 갈매기까지 목격했었으니까
만약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저 갈매기 한 마리도 버스와 딸려 온 게 아니라 붉은빛 기둥으로 넘어온 놈일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는 그 붉은 빛기둥이 없어, 뭐 이미 사라졌다고 치더라도 물이 너무 맑아, 태형이가 말한 오염과는 너무 거리가 먼데?"
내 말에 성희도 난간 넘어 물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오염 벌레가 넘어오기 시작한 지점이라면 여기도 이미 생명체가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겠지"
게다가 방금 멀쩡해 보이는 수중 생명체를 이미 목격했다. 여기가 정말 그 너머 어딘가라면 아직은 오염되지 않은 지역일 거다.
"정말 넘어온 건가?"
성희가 중얼거렸다. 그때 문득 난 버스의 진화 다음 단계가 없는 것 같은 코르카 표시창이 떠올랐다.
그런데도 버스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다. 마지막 진화라면, 버스가 만렙이라면 정말 중요한 뭔가가 하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 이거였나?
이쪽 세상으로 넘어오는 거?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자 성희가 다가오며 묻는다.
"왜?"
그런데 난 대답할 수 없었다.
사실 간절히 여기로 넘어오고 싶었다.
여기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다시 돌아가기 위해, 아이들과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기 위해
그런데 성희의 질문이 오히려 내 뇌리에 다른 의미로 박혔다.
'왜?'
왜 버스의 최종 진화의 종착점이 이곳으로 넘어오는 건데? 왜 그게 내가 되어야 하는 건데?
수많은 이유에 대해 나는 궁금하면서도 사실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신비한 버스를 그저 얻었고 나는 나름 매일 새로운 상황에서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걸 최대한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간절하게 넘어오고 싶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내 의지여야 한다.
내가 판단하고 결정할 문제다. 아무리 나에게 소중한, 생명의 은인인 버스라고할지라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럴 순 없다.
이게 다 할아버지의 큰 그림이었나?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날 보육원에서 데려와 키우신 건 이런 이유였나?
난 그저 할아버지의 목적을 위해 필요한 존재였나?
내 심각한 표정을 말없이 바라보던 성희가 입을 열었다.
"안개가 걷히고 있어"
문득 난 버스의 투명이 꺼져있다는 게 떠올라 급히 팔 액정의 버튼을 눌렀다.
투명[ON]으로 바뀐 걸 확인하고 블루건으로 걸어갔다. 짙은 안개 덕분에 우리의 시야가 막힌 것도 있지만 미지의 다른 어떤 존재도 안개 덕분에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다가가자, 블루건 총신에 앉아있던 갈매기가 다시 날아올라 멀리 날아가려 했다.
끼이이
녀석은 그렇게 조금씩 걷히는 안개 속으로 날아가... 려다 그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광역 방어막에 막혀 물 위로 떨어졌다.
작은 물보라가 일었다. 녀석은 깜짝 놀란 듯 수면에서 발버둥 쳤지만, 광역 방어막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보였다.
놈의 발광에 물이 방어막에 상관없이 사방으로 마구 튀었지만, 녀석만 나가지 못하는 게 정말 기이하게 보였다.
"광역 방어막도 더 넓어졌어."
성희가 녀석을 보더니 말했다. 확실히 버스에 거의 붙어야 했던 이전과 달리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녀석 풀어줄까?"
어차피 이 안에서 야생동물을 키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놈도 자기 의지로 넘어온 건 아니겠지만 이것도 놈의 운명이다.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난 액정의 광역 방어막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놈은 자신을 막고 있던 어떤 힘이 사라진 걸 바로 느꼈는지 후드득 날아가 버렸다. 녀석의 몸짓에 튄 물이 버스 지붕까지 날아왔다.
갈매기가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난 다시 광역 방어막을 켰다.
시야가 조금 더 멀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 너머의 안개는 자욱했다.
액정의 탐지 숫자는 0이다. 그리고 버스는 투명 상태다. 하지만 우리가 지붕에 올라와 있어 안개 너머로 뭔가가 접근한다면 우리를 볼 수는 있을 거다.
퍽!
그때 안개 속에서 갑자기 뭐가 날아오더니 그대로 방어막에 막혀 수면으로 떨어졌다.
"갈매기?"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진 모습이었지만 녀석은 분명 좀 전의 그 갈매기였다.
난 블루건으로 그쪽을 조준하고 안개 속을 노려보며 성희에게 말했다.
"운전대 부탁해"
문득 그때 잊고 있었던 팔 액정의 통신 기능이 떠올랐다.
'이걸 왜 그동안 안 쓰고 있었던 거지?'
성희가 아래로 내려가고 난 오랜만에 통신 버튼을 눌렀다.
"성희야 잘 들려?"
- 왜 굳이 이걸로?
그동안은 창문 열고 소리치며 대화하다 보니 딱히 필요가 없기도 했다.
"혹시 모르니까"
-알았어, 뭐가 보여?
"아니 아직"
내 눈에 보이는 건 물 위에서 끔찍한 모습으로 둥둥 떠 있는 갈매기의 사체뿐이었다.
"어?"
내 당황한 외침에 팔 액정 너머로 성희의 음성이 들려왔다.
- 나도 봤어!
눈앞에 있던 갈매기 사체가 갑자기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마치 뭐가 끌어당긴 느낌이다. 녀석이 둥둥 떠 있던 위치가 운전석에서 잘 보이는 곳이라 성희도 눈앞에서 목격한 모양이다.
- 물속에서 실뱀 같은 게 감기더니 끌어당겼어!
아까 봤던 긴 혀의 생명체가 떠올랐다.
"여기 물속에도 뭐가 많은 거 같다."
탐지 숫자에는 걸리지 않는 생명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내가 물에 빠지면 저놈들이 날 가만히 놔둘까?
아까 버스로 그대로 돌진하던 상어 같은 놈들은 탐지에 걸렸다. 그놈들과 좀 전의 저 생명체와는 뭐가 다른 걸까?
뀌이이이이이이
그때 안개 너머에서 엄청나게 큰 괴성이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아까 버스에 달려들던 상어 같던 괴물도 저런 소리를 냈었다. 추측하자면 괴생명체의 종류에 따라 버스가 탐지할 수 있는 게 다르거나 아니면 예전에 생각했던 데로 적대적인 의지가 생겨야 하거나, 적어도 둘 중 하나일 듯하다.
그때 팔 액정의 숫자가 바뀌기 시작했다.
[ 0 < 0 < 1 ]
놈이 버스의 탐지 영역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아직 시야에 보이는 건 없다.
뀌이이이이
꺽다리류에서 많이 들었던 괴성과 비슷했으나 좀 더 저음이 강했고 그 소리 또한 엄청나게 컸다. 그리고 마치 메아리치듯 한 마리의 소리가 사방에서 울리며 들려왔다.
'아니면 멀리 더 몰려오고 있거나'
어쨌든 저 괴물은 우리 버스를 보지 못한다. 놈은 그저 갈매기가 날아왔던 지점을 추측해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 소리가 높은 곳에서 들려
통신으로 성희의 우려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눈에 보이는 게 없으니, 놈의 괴성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놈의 소리는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고 그 소리의 진원지 또한 허공이었다.
"날 괴물이거나 아니면"
- 다리가 긴···. 으악!
성희가 놀란 음성으로 비명을 질렀다.
"왜?"
의미 없는 내 질문이었다. 이미 그 이유가 눈앞에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아는 놈이다.
날 공중으로 잡아 올린 바로 그놈
그리고 고공에서 추락사할 뻔하게 한 놈
결국 성희에게 머리가 터져 죽은 바로 그놈
거대 촉수 거미다.
놈이 모습을 드러내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놀래라, 난 또 뭐라고"
- 갑자기 큰 촉수가 나타나서 나도 모르게 그만···.
그런데 놈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니 예전의 그놈과는 조금 다른 게 느껴졌다.
우리가 있는 이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투명한 물인데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분명 아주 깊은 물이다.
놈이 아무리 크더라도 수중 바닥을 짚고 걷고 있다면 대가리가 저렇게 허공 높이 떠 있을 수가 없다.
- 저···. 저게 뭐야
성희의 떨리는 음성이 내 팔에서 진동으로 울리며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지금 눈으로 보이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 어디선가 본 거 같은데? 어렸을 때 연못 같은 데서?
"어 맞아, 소금쟁이야"
놈의 가느다란 여러 개의 다리는 사방으로 뻗어서 아주 가볍게 물 위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기다란 다리 위에 달린 대가리에서 뻗어 나온 거대한 촉수 여러 개가 허공을 휘젓고 있는 모습은 정말 기괴했다.
- 버스로 들어와야 할 거 같은데
그녀의 음성이 팔에서 들려올 때 난 이미 지붕 문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내가 광역 방어막을 풀고 블루건으로 상대하기에는 너무 크고 기이한 놈이다. 지금은 우선 버스의 투명 뒤로 한 발짝 물러서는 게 맞는 거 같다.
"벌써 내려왔네?"
지붕 문을 닫고 있는 날 룸미러로 힐끗 쳐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도망 온 거 아니라고"
그런데 사실 저놈 때문에 죽을뻔한 기억이 있다. 그리고 잊은 줄 알았던 그 강렬했던 기억은 다시 살아나 다시 내 공포감을 자극했다.
"체급이 깡패니까"
놈이 날 발견에서 큰 물살이라도 일으키면 버스가 뒤집힐 수도 있다. 광역 방어막이 있더라도 지붕에 있다가 그대로 물에 빠지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난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하나 꺼내 거실 테이블에 앉았다.
"상황 봐서 접촉 파괴로 밀어버리지 뭐"
성희도 운전석에서 일어나 내 맞은편에 앉으며 창밖의 거대 괴물을 노려봤다.
난 액정의 광역 방어막을 껐다. 이제 놈이 우연히라도 버스에 닿으면 그대로 터져버릴 거다. 덩치가 저만하니 코르카도 꽤 나오겠지.
그때 놈의 시커먼 다리 하나가 수면으로 빠르게 움직이며 버스 창문 옆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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